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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돼?"

EAST-TIGER 2020. 10. 19. 09:20

 

가끔 책을 보듯 영화를 본다. 한 번에 한 편의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한 영화를 며칠 동안 나누어 보기도 한다. 후자의 방식으로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았다. 배우이자 감독인 Greta Gerwig은 작년에 감독한 영화 <작은 아씨들>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지금까지 보여준 영화들에서는 몸과 마음의 향수(鄕愁)를 자극하는 주제들로, 여린 감성이 돋보이는 연출들을 보여주었다. 영화 <레이디 버드>도 오랫동안 살아왔던 미국 서부 새크라멘토 지역을 떠나 미국 동부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기를 그렸다. 

 

"난 캘리포니아가 싫어, 동부로 가고 싶어." 

 

영화는 미국 작가 Joan Didion의 말로 시작된다. "Anybody woh talks about California hedonism has never spent a Christmas in Sacramento." 새크라멘토의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등 보다 따분하고 심심한 도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주인공인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 출신으로 그곳에 살면서 Joan Didion의 이 말을 몸소 보여준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단짝 친구 줄리와 가톨릭계 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최대한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인기 있는 학생이 되어 멋진 남자 친구와 교제하고 싶고, 동부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하는 크리스틴. 그러나 첫 남자 친구는 동성애자였고 두 번째 남자 친구는 크리스틴이 보기에 뭔가 문란하다. 아버지가 실직을 해서 어머니가 주말에도 야근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 이런 현실에서 크리스틴은 더욱 자신의 꿈을 좇는다.      

 

"다들 보통 몇 살 때쯤 섹스를 해?"

 

지나치게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청소년 영화이다.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장면들이 적절히 섞여서 심심한 연출이지만, 학창 시절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할 수 있는 고민들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한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틴과 부모님 간의 대화들이 인상적이었다. 조력자이자 친구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크리스틴은 자신의 고민들을 쏟아내고 그것들 때문에 서로 간의 갈등과 화해가 반복된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끊어질 수 없고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 그래서 영화 분위기는 대체로 보수적이다.

 

크리스틴 역에 Saoirse Ronan은 Peter Jackson 감독의 <러블리 본즈>에서 처음 보았다. 신비로운 외모와 생기발랄한 그녀의 분위기가 이 영화에서도 돋보인다. 카일 역에 Timothee Chalamet도 최근 여러 영화들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는 배우이다.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것은 크리스틴 부모님 역에 Laurie Metcalf와 Tracy Letts. 크리스틴의 생일 때 작은 컵케이크에 초를 꽂아 나타는 아버지와, 딸을 사랑하고 가장 많이 대화하지만 표현이 서투른 어머니. 특히 공항 앞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크리스틴에게 따뜻한 작별인사를 못하고 차갑게 돌아섰던 어머니가, 마음을 돌려 공항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Jon Brion은 이 영화에서도 몽환적이면서 감성 있는 곡들을 선보였다. 메인 테마곡이 좋았다.  

 

실제로 Greta Gerwig 감독이 새크라멘토 출신이다. 그러나 학창 시절 자신은 크리스틴과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던 학생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의 영화를 처음 보았는데, 무엇보다 이야기 전개에 강점이 있다. 아기자기한 연출들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나와 동갑내기라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동안 묘한 유대감을 느꼈다.

 

 

"부모님이 제게 좋은 이름을 지어준 것 같아요." 

 

동부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크리스틴을 지지해준 사람은 없었다. 가난한 것을 감추기 위해 소위 "일진" 친구들에게 거짓말과 과장스러운 행동들을 해야만 했었다. 부모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도 내가 좋다면 그렇게 해야 했었다. 항상 "처음"은 소중했기에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과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싶었다. 어떤 낭만을 가지고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에게 크리스틴은 낯선 사람이 아니다. 왜 그녀가 새크라멘토를 떠나 새로운 삶을 바라고 원했는지에 대해 많은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한번 이상 자신이 살던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니까. 단발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만족감도 그것과 유사하다.

 

함께 있을 때만 가질 수 있던 꿈과 소망들.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에 있었기 때문에 "레이디 버드"였고, 뉴욕에서는 단지 "크리스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나의 색을 드러낼 수 없다. 살아온 환경들 속에서 나는 칠해지고 물들여진다. 그래서 어떤 "결"이 생겨서 그 결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며, 적당하게 때로는 급격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끊는다. 언제나 나의 모든 말과 행동들은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현실이 될 때,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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