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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유] "뭐하러 사람을 샅샅이 다 알려고 해요?"

EAST-TIGER 2020. 9. 7. 09:48

오랜만에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다시 보고 나서 배우 이나영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과 드라마들이 정리된 목록을 보면서, 본 것과 안 본 것들을 살펴보았다. 고등학생 때 그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느 영화 잡지에서 그녀가 일본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다가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그녀의 연기를 처음 보았고, 김성수 감독의 영화 <영어완전정복>을 보고 배우로서 가진 그녀의 매력을 처음 느꼈다. 이후 드라마 <도망자 Plan. B>는 보다가 말았고, 유하 감독의 영화 <하울링>에서 그녀의 캐릭터와 연기는 어딘가 어설펐다. 오히려 화장품과 맥심 커피 등 그녀가 나온 CF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이나영이 출연한 것과는 별개로 최호 감독의 영화 <후아유>는 오래전부터 보려 했던 영화였다. 보는 것을 미루다 보니 몇 년 동안은 볼 생각마저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보게 되었다. 

 

"투명인간 친구라는 말 알아? 만나는 것도, 전화도 안돼. 이 약속을 지켜야 돼. 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어. 그래서 힘이 되는 친구. 누군가에게 투명하게 솔직해지고 싶은 날. 하고 싶은 말이 터져 나오는 날. 투명 친구를 찾아. 난 늘 네 곁에 있다."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까지 대략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이동통신 기술과 인터넷 서비스는 급속도로 성장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중흥기로 접어들기 직전인 2000년대 초반, 인터넷 게임 중소기업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시작한다.

 

2년 동안 아바타 채팅 게임 "후아유"를 제작하고 베타 서비스가 시작됐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해 직원들의 월급은 몇 달째 지급되지 않았고 회사도 폐업의 기로에 서 있다. 영세한 기업의 사무실은 한강이 보이는 63 빌딩. 게임의 기획자인 형태는 사무실이 자신의 집이자 꿈이다. 같은 건물에 있는 아쿠아리움에서 잠수사로 일하는 인주. 국가대표 수영선수였지만 청각 장애가 생겨 은퇴하게 되었고, 일하는 아쿠아리움에 "인어 쇼" 프로젝트를 준비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런 그들이 각각 "멜로"와 "별이"라는 대화명으로 채팅 게임 "후아유"에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절대 만나기 싫어. 날 설명해야 되잖아." 

 

비슷한 소재이지만 장윤현 감독의 영화 <접속> 같은 개연성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별로 없다. 그 영화에서 공동 작가단으로 참여한 김은정 작가가 이 영화의 공동 작가단에도 참여했지만, <접속>과 비교하면 좀 더 가볍고 밝은 분위기로 영화가 전개된다. 어쩌면 이것이 모뎀으로 PC통신을 하던 시대와 케이블로 인터넷을 하는 시대를 구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애틋한 채팅을 지속하는 것보다 사진이나 빠른 "번개"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분명 <접속> 때보다 강하다. 

 

영화 초반부터 형태가 인주의 개인 정보들을 미리 알고 먼저 인주에게 다가간다는 설정이, 극 전개상 최대의 단점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고, 인주는 통발에 걸린 물고기처럼 큰 저항도 못한 채 형태의 투박한 고백을 받아들인다. 형태와의 교제를 시작했지만 인주는 "멜로"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멜로"가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주의 태도는 급변했지만, 형태의 끈질긴 구애를 인주가 받아들임으로써 영화가 끝난다. 인주는 형태에게서 "멜로"를 찾았던 것일까? 아니면 "멜로"를 잃고 싶지 않아서 형태를 받아들인 것일까? 극 중 형태의 비중이 인주보다 크게 느껴졌고, 이 둘 외에 다른 배역들이 가진 역할과 이야기들은 흐지부지하다. 전체적으로 영화보다는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또는 <드라마시티>에서나 볼 듯한 내용과 전개였다.  

 

델리 스파이스의 "차우차우",  유리의 "난 괜찮아", Gigs의 "짝사랑", 윤종신의 "환생", 롤러코스터의 "Love Virus" 크라잉 넛의 "밤이 깊었네", 줄리아 하트의 "오르골"과 "유성우", 불독맨션의 "사과" 등등.. 2000년대 전후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바로 알 법한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형태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의 연기는 준수했다. 인주를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형태의 복잡한 내면이 드러난다. 감독이 요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승우의 목소리가 얇고 날카롭게 들려서 로맨틱하진 않다. 인주 역의 배우 이나영의 연기가 조승우보다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좋았다. 보이는 표정과 함께 들리는 대사들에서 인주의 심리 상태가 잘 전달되었다. 특히 극 중반에 벤치에서 형태와 인주가 점점 감정이 격해지며 다투는 장면이, 영화의 명장면이었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에서 처음 보았던 배우 조은지가 보영 역을 맡았다. 이 영화가 차기작이었는데 초반을 제외하면 출연 분량이 너무 적었다. 조근식 감독의 영화 <품행제로>에서 김상만 역을 맡은 배우 김광일을 초반에 잠시 볼 수 있었다. 볼 때마다 가수 휘성이 생각나는 얼굴이다. 박해일이 인주의 옛 애인으로 우정 출연했다. 

 

최호 감독은 이 영화 이후 <사생결단>과 <고고 70>을 연이어 만들었다. 그의 영화들은 음악 영화라고 생각하며 본다. 

 

"뭐하러 사람을 샅샅이 다 알려고 해요? 나 알아요? 이렇게 만나고 있어도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도 없잖아! " 

 

서로에 대한 경계와 개인의 취향이 뚜렷해진 시대지만, 비대면 만남 방식인 채팅과 인터넷 개인 방송들은 형태만 달라질 뿐 계속 변화 발전 중이다. 그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원초적 본성들도 함께 보게 된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고해성사" 하듯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에게 쏟아버리고 마음 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나 무엇을 알고 싶을 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만 접속하면 거기에는 나와 비슷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있다. 생각과 마음들이 부딪히는 곳 어디서든, 상상할 수 있는 관계들이 형성된다. 그래서 현실과 가상은 형식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세계이거나 그렇게 되고 있다.  

 

극 중 형태가 포털 검색기에 인주의 개인정보들을 넣어 인주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와 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Blog를 찾았거나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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