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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무엇이든지 언젠가는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EAST-TIGER 2020. 8. 12. 02:06

 

유희열이 Guest로 참여한 팟캐스트 <손미나의 여행 사전> 시즌1 에피소드 4회를 듣다가 보게 된 영화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테마였고, Toy 5집 <Fermata> 타이틀 곡인 "좋은 사람"의 뮤직비디오가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제작되었기에, 유희열이 Guest로 참여해서 뮤직비디오 제작에 관한 이야기들과 베네치아 여행기를 풀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유희열은 베네치아를 무대로 한 영화로 David Lean 감독의 1955년 영화 <Summertime>, 한국어 판 <여정>을 추천했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Arthur Laurents의 소설 <The Time of Cuckoo>을 각색하여 만들어졌다. 손미나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는지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지 않았다. 팟캐스트를 재미있게 들어서 그 영화가 보고 싶어 졌고, 오래된 영화라서 그런지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었다.  

 

"허드슨 양 그거 아세요. 그 기적들이 가끔 일어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조금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 로렌스>, <닥터 지바고> 같은 휴먼 드라마 명작들을 만들어 낸 David Lean 감독이. 영화 <Summertime>은 그 명작들이 탄생하기 바로 직전의 영화이고, 몇몇 장면들은 <닥터 지바고>에서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풍경 묘사와 미장센에 탁월함은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인상적인 연출은, 제인이 카페에서 고른 치자꽃을 레나토가 사주었지만, 함께 걷는 도중에 그 치자꽃을 수로로 떨어뜨리게 되고, 레나토가 그 꽃을 주으려고 수로 쪽으로 가지만 손에 닿을 듯 말 듯 끝내 줍지 못한다. 그리고 제인과 레나토가 이별하는 기차역 장면에서도 레나토는 제인을 위해 준비한 치자꽃을 전달하지 못한다.

 

제인 허드슨 역으로 열연한 Katharine Hepburn. Oscar Awards에서 여우주연상만 4번을 받은 당대의 대배우였기에 모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연기를 처음 본 것은 이 영화이다. 그녀가 이 영화를 촬영했을 때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해서 친근하게 그녀의 연기를 보았다. 낭만적인 여행지에 혼자 온 여자의 외로움과 보수적이면서도 새침한 "미국 여자"의 말과 행동들이 인상적이었다. 

 

레나토 데 로시 역으로 제인의 상대 역인 Rossano Brazzi는 이탈리아 배우이고, Graham Baker 감독의 <오멘 3>에 드칼로 역으로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는 이미 나이가 지긋이 든 성직자 역을 맡았고 영화 자체가 재미가 없어서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아내와 별겨 중인 유부남 역으로 제인과의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제인에게 "이탈리아에 오셨으니 이탈리아 사람을 만나야죠." 라고 말했던 피오리니 부인의 말처럼, 제인은 레나토를 만나서,  그녀가 베네치아 여행 때 원했던 "환상적이고, 신비롭고, 마법과 같은 기적" 같은 로맨스를 하게 되었다. 불륜을 원하지 않았던 제인을 설득하는 레나토의 말과 행동들이 이 영화의 압권이었다.

 

개인적으로 피오니리 부인 역에 Isa Miranda의 연기가 짧지만 강렬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암시와 조언을 해주는 역할이었고, 실제로 Katharine Hepburn보다 두 살 어린 배우였지만 기품과 멋이 있는 중년 여자의 느낌을 연기로 보여주었다. 특히 이탈리아 여자의 영어 발음이 이렇게 매혹적으로 들릴 줄은..

 

마우로 역의 Gaetano Autiero는 이 영화 전체에서 클리셰적인 연출로 설정된 꼬마 아이다. 제인을 따라다니며 감초 역할을 담당한다. 이때 그의 나이가 15살 정도이거나 더 어렸을 텐데.. Lean 감독은 그가 흡연하는 장면을 대놓고 영화에서 보여줬다.  

 

"처음으로 미국인처럼 행동하지 않았네요."

 

100분 정도 러닝타임의 영화이고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베네치아를 볼 수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당시의 미국인과 이탈리아인이 가진 서로 간의 선입견들도 흥미롭다. 기승전결이 확실해서 특별한 여운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단순하게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에 온 여자가, 다시 그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를 떠나는 틀 속에 남녀의 로맨스가 채워졌다. 산 마르코 광장과 그 주변이 영화의 주 배경이라서, 여행지로서의 베네치아에 대한 매력은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느낌이다.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미국의 석유부자 멕클헤니와 그의 아내가 하는 말들이 그나마 베네치아 여행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로 여겨진다. 제인과 레나토의 로맨스는 영화 중반이 조금 지나서부터 시작되고, 다소 정적이기에 요즘 감각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전개에 있어서 충분히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제인은 베네치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부터 8mm 카메라로 베네치아의 풍경을 열심히 담아내지만, 정작 레나토와의 로맨스를 카메라로 담는 장면은 없다. 제인은 레나토의 가게와 그 주변을 카메라로만 담았을 뿐이다. 편지를 하겠다는 말이나 다시 만나자는 기약을 서로 주고받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개인 일상으로 추가하고 싶지 않은 어떤 심리적 거부가, 결말에서 제인이 레나토에게 갑작스럽게 통보하는 이별에서 느껴진다. "무엇이든지 언젠가는 일어나기 마련입니다."라고 제인에게 레나토가 말했던 것처럼, 제인도 행동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 보인다. 영화 초반부에 여행지에서 어떤 "기적"을 원했던 제인이, 원했던 그 기적보다 "현실"을 택한 셈이기에, Lean 감독 특유의 현실 순응적 결말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팟캐스트에서 손미나와 유희열이 말한 것처럼, 혼자가 아닌 최소 둘 이상이 가야 될 여행지인 것은 분명하다. 혼자 여행하기에는 하루 또는 이틀 여정으로, 둘 이상이라면 3일 이상의 여정을 계획하면 적당할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수상버스와 수상택시의 가격 차이가 엄청나다는 점을 알 수 있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베네치아 여행은 상당한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영화 초반부에 제인이 베네치아를 여행하기 위해 많은 돈을 준비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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