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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世紀 Enlightener

잠언 1:7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이라고 되어 있다. 즉, 모든 창조의 근본이시며, 본체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참다운 지혜자가 되지 못한다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다. 잠언 16:6에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세상에 악의 세력이 들어옴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왔으며 죄로 인하여 사망이 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하게 창조된 세계에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악의 세력이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인간은 죄인으로서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는 죄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

예수의 승천 이후 시작된 교회는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의 공동체였다. 그리스도는 예배모임에 현존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배모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부름을 받았고 예배의 모임을 통하여 받아들여졌으며 여기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고 교회로부터 다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루터가 생각했던 교회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교회에 대해 비교하여 생각을 많이 했다. 교회는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궁금했고 미래의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야 할지 알고 싶었다. 초기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교회가 한편으로는 성경을 떠남으로써, 또 한편으로는 성경에 인간적인 것을 첨가함으로써 부패했..

루터는 그가 죽기 전 해인 1545년, 루터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 당시 교회를 이탈하게 된 동기를 해명했다. 그 서문은 분명 루터라는 이름과 연관된 급진적 ․ 개혁적 시각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할 독자에게 자신을 소개할 목적으로 쓰였다. 그는 독자들에게 개혁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게 된 배경을 밝히려 한다. 1519년에 이르는 역사적 상황을 개괄한 후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난관에 대해 언급하는데, “나는 분명히 로마서에서 바울을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은 겁먹어서가 아니라 로마서 1:17(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 때문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 인해 하나님은 의롭고, 그래서 불의한 죄인을..
좋은 소식(Good News)은 우리가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과 싸울 때, 승리의 정복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그의 구속사업의 본질적인 요소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며, 효과적으로 죄의 모든 결과를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능력을 주시는 일이다. 이 결과의 중심에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이 있다. 십자가의 법칙은 먼저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따르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모든 사람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작용한다. 십자가 법칙은 그들 안에서 역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의 사명에 복종했..
한국 기독교계는 사회와 소통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냉철한 시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대답할 목회자는 별로 없다. 신과 인간의 소통이 어렵고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이 어렵듯이, 기독교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소통하기 힘든 상황이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성령, 구원, 복음 등등.. 대부분이 기성세대라면 이해할 수 있는 한자어다. 그런데 왜 어려운 것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재미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듣는 이들의 삶과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복음전도를 살펴보자. 나는 현재 기독교의 복음전도는 방법적으로 적극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목회자들은 아직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과 60-80년대의 한국교회 부흥을 추억하며, 목회 특히 복음전..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신유(神癒)는 교회 부흥과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생활을 더욱 활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신유는 항상 기독교계에서 민감한 논란 되었고, 일부 이단(異端)들은 신유를 도구 삼아 교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계에서 신유집회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현재 고통 받는 병이 신유로 나을 수도 있다는 믿음에 유명한 교회와 기도원에 많은 교인들이 모여 들고 있다. 나 역시 신유의 능력을 믿고,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적인 사역이라 생각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신유사건은 하나님이 인간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과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낸 증거이다. 하지만 신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