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世紀 Enlightener

루터의 교회론에 대한 비평 본문

內 世 上 /Theologist Note

루터의 교회론에 대한 비평

EAST-TIGER 2020. 6. 11. 07:36

 

예수의 승천 이후 시작된 교회는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의 공동체였다. 그리스도는 예배모임에 현존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배모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부름을 받았고 예배의 모임을 통하여 받아들여졌으며 여기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고 교회로부터 다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루터가 생각했던 교회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교회에 대해 비교하여 생각을 많이 했다. 교회는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궁금했고 미래의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야 할지 알고 싶었다.


초기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교회가 한편으로는 성경을 떠남으로써, 또 한편으로는 성경에 인간적인 것을 첨가함으로써 부패했고 교리가 왜곡되었다고 확신했다. 교회 성격에 관한 루터의 초기 견해는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말씀은 정복하러 나아가며, 말씀이 정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을 얻는 곳이면 교회는 어디든 존재한다. 이 책에서 루터가 생각하는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래서 주교가 서품 한 사제직은 교회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불가결한 것은 아닌 반면, 복음의 설교는 그 교회의 본성에 필수적이다. “말씀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참 교회가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로 이루어지고, 어떤 인간의 모임도 이 복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할 수 없다. 루터의 교회 이해는 역사적이기보다는 기능적이다. 교회나 성직자들을 합법화하는 것은 사도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이 아니라 신학적 연속성이다. 사도들에게 역사적 연원을 찾는 단체의 일원이 되기보다는 사도들처럼 동일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와 달리 세바스찬 프랑크 같은 급진 개혁자들은 사도교회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래 국가와 긴밀한 유대를 누림으로써 완전히 타협하고 말았다고 본다. 프랑크는 참 교회가 사도 이후 더 이상 없었다는 특유의 급진적 견해를 내세운다.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외적인 것(externa)”은 그가 “타락했다(lapsus)”고 간주한 성례를 포함한 외적 의식을 가리킨다. 참 교회는 그리스도가 흩어진 자기 교회의 백성을 자기 왕국에 모으려고 영광 가운데 돌아올, 시간의 종말에 존재하게 될 뿐이다. 그때까지 참 교회는 숨겨진 채 있을 것이다. 급진 개혁자들 대부분이 ‘성경만으로’라는 원칙을 적용하는 데 극도로 엄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도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도 일관적이었다. 참 교회는 하늘에 있었고 그 어설픈 제도적 모조품들이 땅에 있었다.


이 급진적인 방식에 대응하여 루터는 두 가지 난점을 해결해야 했다고 본다. 교회가 제도적이지 않고 복음 설교로 정의된다면 어떻게 급진 개혁가들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를 구분할 수 있는가? 그 자신도 “교회는 광신도(급진개혁파를 의미하는 것 같음)가 지배하는 곳에서조차 그들이 말씀과 성례를 부인하지 않는 한 거룩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 주변 정치적 상황에 유념하여 그는 제도적 교회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반격했다. 루터가 ‘성경만으로’라는 원리의 급진적 내용을 전통에 호소하여 완화시킨 것과 같이 교회를 역사적 제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참 교회에 관한 잠재적인 급진적 견해를 완화시켰다.


교회제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은총의 수단이다. 그러나 교회가 참으로 가시적이고 제도적이라고 주장하여 급진파를 반격할 때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가톨릭의 견해와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루터는 이 문제를 전적으로 인정했다. “우리 편에서 우리는 교황 측에 기독교적이고 좋은 것이 많이 있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참으로 기독교적이고 좋은 모든 것은 거기서 찾을 수 있고, 이 근원에서 우리에게로 온 것이다. 예를 들면 교황의 교회에 참 성경, 참 세례, 죄를 용서하는 참 열쇠, 참 목회 사역 직분 또는 주기도문, 십계명 및 신조 형식의 참 교리문답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교적 직분을 갖고 있더라도 그릇된 교회는 겉모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해야 했다. 즉 중세 교회가 참된 것처럼 보였어도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 교회사에서 거론된 도나투스 논쟁과 비교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리 운동가였다. 그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가 박해 시 로마 제국에 대한 그릇된 처신으로 타협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종교적 온전성을 타협하지 않는 이들만이 참 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입장을 고수했다. 교회는 성자와 죄인이 섞여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동일한 교회에 의로운 이와 사악한 이가 공존했고 어떤 사람도 사악한 이들을 교회에서 내보낼 권한이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복음 13:24-31)”를 통해서 어느 날 아침 밭주인이 와서 밀과 가라치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았다. 가라지만 없애는 제초제가 알려지지 않은 때라 그는 가리지만 제거하기를 꺼려했다. 그 와중에 밀도 해칠 수 있기에 그의 해결책은 밀 추수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잘라내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이 비유는 교회에 적용된다. 비유 속의 밭처럼 교회는 밀과 가라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담고 있고, 그들은 심판 때까지 공존한다. 그날 그들 사이에서 심판하신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심판을 선취하도록 허용받지 않았다. 교회는 이처럼 시간의 종말까지 선악을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문자적으로 ‘전체’라는 의미)”이라는 용어가, 교회에 적용된 것처럼, 성자의 죄인이라는 혼합된 구성원을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도나티스트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혼합적’ 단체로의 교회를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받아들인 데 반해, 급진파들은 의로운 이들의, 의로운 이들만의 단체로서 교회를 보는 도나티스트의 견해를 전개한다. 도나티스트처럼 급진파들은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완벽을 요구했다. 교회와 세상은 빛과 어둠처럼 상반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루터와 츠빙글리가 정치적으로 타협했다고 간주할 것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부패한 성직자들은 교회에서 “마치 말린 후추 씨 사이에 쥐똥이 보이듯, 알곡 사이에 쭉정이가 보이듯” 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시인하고 루터가 동의한 교회 현실 중 하나였다. 연관 개혁은 교회를 설립하게 만들었으나, 급진 종교개혁은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서 찾고 있는가? 교회에 관한 그의 이론의 이 측면이 참 교회에 항상 부패가 있으리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2008.12.26 16:3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