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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계는 사회와 소통하고 있는가?

EAST-TIGER 2010. 6. 1. 07:15


 한국 기독교계는 사회와 소통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냉철한 시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대답할 목회자는 별로 없다. 신과 인간의 소통이 어렵고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이 어렵듯이, 기독교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소통하기 힘든 상황이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성령, 구원, 복음 등등.. 대부분이 기성세대라면 이해할 수 있는 한자어다. 그런데 왜 어려운 것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재미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듣는 이들의 삶과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복음전도를 살펴보자. 


  나는 현재 기독교의 복음전도는 방법적으로 적극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목회자들은 아직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과 60-80년대의 한국교회 부흥을 추억하며, 목회 특히 복음전도를 하고 있다. 우리는 대중들의 출입이 잦은 지하철이나 공원 등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들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대단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쉬운 마음을 가지며 ‘과연 효과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전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지상명령이고 바울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성교회들은 전도의 본질적 의미를 잊은 채 산술적인 교회부흥을 위한 수단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의미 없는 결신을 통해 교인 수를 늘려가고 그것을 서로 자랑한다. 


  기독교에서 전도는 소통의 기본적인 도구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자발적인 결단을 통해 하나님을 자신의 삶으로 영접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전도가 복음전파의 목적에서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변모했다. 대부분의 기성 교회들은 인위적으로 사람들을 모으려 경쟁의식을 가지고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을 단순화시켜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는 말과 비슷한 문구로 대체했으며 알고 깨닫는 것이 아닌, 무작정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 칭찬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마저도 만만치 않다. 왜 그럴까? 바로 교회와 사회 간 소통의 골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도 프로그램은 실용적이고 체계적이다. 이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이 빠졌다. 전도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우리의 삶 자체가 전도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때 강제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항상 선택은 듣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고, 예수의 삶을 통해 그를 믿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을 들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전도의 모범이라 생각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비유한다. 이 비유는 적절하다. 향기는 자발적이고 생산적이다. 꽃은 잎의 색깔도 아름답지만 진한 향기가 있기에, 가깝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고 꽃 주변으로 몰려든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의 대상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우리의 향기를 맡고 우리 주변으로 몰려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빛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라. 어둠 속에서는 작은 빛도 강렬히 빛나며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숨기는 곳이 없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은 빛 주변으로 몰려든다. 즉 빛은 어둠 가득 한 온 세상을 밝히고 죄에 물든 사람들이 빛으로 몰려들면서 자신과 상대방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빛과 향기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와 사회 간의 진정한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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