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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비스러운 법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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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비스러운 법칙

EAST-TIGER 2010. 11. 3. 02:44


  좋은 소식(Good News)은 우리가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과 싸울 때, 승리의 정복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그의 구속사업의 본질적인 요소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며, 효과적으로 죄의 모든 결과를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능력을 주시는 일이다. 이 결과의 중심에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이 있다. 


  십자가의 법칙은 먼저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따르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모든 사람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작용한다. 십자가 법칙은 그들 안에서 역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의 사명에 복종했으며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의 구원의 원리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은 반드시 쓰라림, 어두운 증오, 그리고 절망의 원인이 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희망과 사랑 가운데서 성장을 위한 기회, 그리고 가장 높은 질서 가운데서 깨달음을 통한 치유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과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셨고, 그와 더불어 고통을 받고 죽으므로, 그와 함께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구체적인 양식


  고통의 공통적인 형태의 하나는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므로 그 결과로 오는 유형이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한 결과로 오는 고통은 아마도 외적으로 당하는 고통,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질병, 또는 감정적 고뇌로 올 것이다. 모든 생각, 욕망, 그리고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흔적 속에 얼마의 부조화, 약간의 고통을 동반한다. 이 고통이 회개를 위한 동기가 되지 않으면, 그 이상의 부조화와 더 악한 죄,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유형은 실존적 무지이다. 즉, 영, 마음과 몸 전체를 위하여 필요한 어떤 생명력 넘치는 의미와 가치의 무지이다. 모든 사람은 실존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허물 때문이 아니라, 단지 원죄를 가진 인류의 구성원이 된 결과 때문이다. 이 실존적 무지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그 존재와 가르침 속에서 실존적 무지를 정복하고 있으며, 그의 치유하는 빛과 길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가 이룩한 승리를 공유하도록 부름 받았다. 


  원죄를 가진 인류의 구성원이 되므로 오는 고통은 참된 선을 추구하는데 진실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 곧 현세욕(concupiscence)은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은 소위, “돌발사고”(accident)나 자연적인 재난을 포함한다. 원죄로부터 야기된 고통이 자기-초월과 진지한 회개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실존적인 무지에서 발생하는 고통은 깨달음을 통한 치유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여 줄 수 있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은 올바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성장을 위한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십자가의 신비로운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종류의 고통을 변화와 자기-초월을 위한 계기로 사용하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치유하심과 깨달음의 은총의 실체, 그리고 그 강력한 임재를 인정하라고 부르셨다. 약함의 경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찾아오는 질병 속에는 언제나 초월을 향한 부름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실존적 무지 때문에 어떤 사람이 질병에 걸렸다면, 마음-비우기의 기도하는 과정과 실존적 분석을 통하여 질병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면, 질병이 어떤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믿음의 인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질병을 정복해야 할 원수로 보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질병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한편, 돌발사고는 어떤 의도, 계획 또는 이해 가능성과는 별개로 우연하게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다. 모든 사람은 예상하지 않은 고통스러운 사건에 종속되어 있으나, 소위 돌발사고는 사람이 취하는 태도가 대부분의 고통의 질을 결정한다. 돌발사고의 원인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연의 문제로 보는 사람은 공포, 두려움, 스토아 사상의 수동성, 또는 기껏해야 나쁜 상황을 가장 잘 이용하려는 해결 등으로 반응할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통한 치유를 추구하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돌발사고”는 우연이나 원죄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사건이며, 자아-초월을 향한 하나의 부르심이다.


  인간의 원죄와 개인적인 잘못 외에도 성장의 삶 속에서 생기는 고통의 유형이 있다. 이 고통이 적절하게 사용되면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끊임없이 보다 풍요로운 성장과 성숙으로 인도할 수 있다. 실존적 분석은 성숙 과정 속에서 문제의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고, 성장에 관계된 긴장과 고통의 현존 속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와 그리스도-자기에로 완전하게 성숙하도록 자라나는 풍요로운 방법을 식별하는 적극적인 깨달음이 요청된다. 


  정신과 의사인 카지미에르즈 다브로스키(Kazimierz Dabrowski)는 심리학적 성숙을 설명하기 위하여 “긍정적 붕괴”(positive disintegration)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표현한다.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심리적 성숙에 대하여 실존적 분석을 실시하고 특히 도덕적, 지성적, 그리고 종교 회심과 같은 그러한 근본적인 성장 변화에 관해서는 유용한 도구이다.


  다브로스키의 분석에서, 고도의 성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유형의 붕괴가 필요하다. 이 긍정적 붕괴의 과정은 저급한 수준의 기능과 구조의 용해를 포함하므로, 고도의 붕괴가 성취될 수 있다. 용해되어야할 일차적이며, 원시적인 통합과 기능의 단계가 있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새롭고 풍요로운 통합이 성취될 수 있다. 다브로스키에 의하면, 긍정적 붕괴는 종종 자기에 대한 불안, 열등감의 느낌, 수치와 죄의식의 경험, 환경 부적응, 그리고 다양한 정신 신경증적 갈등에 의하여 예고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소위 이들 부정적인 경험은 아주 긍정적인 붕괴 또는 죽음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표지가 된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새롭고도 고도의 차원으로 통합된 세계-내-존재가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한 개인이 성장 과정 속에서 긴장과 고통을 경험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좌절시키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나의 깨달음의 방법으로 그가 사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긍정적 붕괴 이외에, 우리 자신의 경험 속에 있는 붕괴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진실 되고, 깨달음을 가져오는 길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는 부정적 붕괴(negative disintegration)가 또한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관하여 아직도 고찰해야 할 형태와 유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의로운 자의 고통”(suffering of the just)이다. 이것은 의로운 자가 그들의 의로움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대신 겪은 고통의 신비가 있다. 그 고통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한 개인이 겪는 고통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오는 고통이 있다. 즉 모든 아담의 아들, 딸들이 직면하도록 부름을 받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변형되는 모든 고통에는 빛나는 기쁨이 있다. 고통 가운데 나타나는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제공되는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는 승리의 가장 충격적인 특성의 하나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는 그 치유의 의미, 가치, 그리고 능력 면에서 너무나 풍성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주님의 고통과 죽음 속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와 가치를 단지 몇 가지만 고찰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고통이 주는 충격적인 특징 중 하나는 예수께서는 인간 자신의 죄성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고통 중에서 그보다 더 악한 고통을 결코 경험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죄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더불어, 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다. 여기에 들어있는 치유의 메시지는 단순히 의롭게 살아도 삶 속에는 우리가 회피할 수 있는 많은 아픔들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죄에서 발생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때때로 그런 고통의 종류에도 상처를 받기 쉽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 고통이 자유로운 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완전히 복종하므로 이루어진 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고통과 죽음을 무의미함이나 또는 맹목적인 어떤 힘이거나 또는 운명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신비로운 지혜와 사랑의 섭리가 그의 수난과 죽음 속에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는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였고, 아버지를 신뢰하였으며, 그 안에서 승리하셨다. 여기에서 치유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통과 죽음은 완전히 의미 없는 공포가 되기를 중단하고, 그 대신에 자기-초월과 승리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수난과 죽음 가운데서 아주 인간적이셨다.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완전을 추구하며, 그리고 불완전을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절박한 신체적인 고문과 파괴에 직면하여 극도의 격변과 고뇌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고뇌 속에 들어있는 치유의 메시지는 격렬한 고통과 확실한 죽음의 맹공격 앞에서 두려움과 우울증과 도피하고 싶은 욕구와 영혼의 다른 고뇌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아버지의 뜻이 명백하게 표명되고 나면, 우리는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 내적인 힘의 선물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다. 


  예수의 마지막 고통과 죽음의 그 이상의 특성은 황홀함이다. 그리고 이 황홀함의 모든 근원과 영감은 아버지셨다. 그의 사적이고 공적인 삶 속에서와 똑같이, 그의 마지막 아픔과 죽음 가운데서도 예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감람산의 고뇌 가운데서, 예수는 인도하심과 힘을 위하여 아버지께로 피하셨으며,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돌봄과 임재는 언제나 그의 천사를 통하여 성서 가운데 나타나셨다.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는 시편 22편을 통하여 승리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드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의탁하신 분은 사랑의 아빠(Abba)셨다.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치유의 메시지는 아빠(Abba)가 모든 사람들의 힘의 원천이시며,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께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에게 아직 생각한 적이 없는 두 형태의 고통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하나는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산 결과로 생기는 고통이며,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참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받는 고통이다. 이들 두 형태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예수 안에 나타나 있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께서 그러하였듯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개인의 죄가 온 인류와 관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똑같이 한 사람의 선한 행위는 다른 모든 사람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구속함의 승리를 이룰 수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서로의 짐을 서로 지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때때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죽음을 의미한다. 성서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은 그 자신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이 갖는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로서 고통 가운데서 승리하므로 극복하는 그 자신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누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다와 소크라테스의 평온한 죽음과 예수의 잔혹하고 폭력적인 수난과 죽음은 종종 대조되었다. 그러나 부다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그들의 죽음의 이유와 그들이 가진 마음의 태도에 대하여 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부다는 깨달음에 관한 그의 메시지를 설파한 이후에 복잡한 상태를 떠나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에게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부다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므로 도반들이여, 지금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썩음에 복종하면 복잡한 상태에 이른다.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라.” 그의 마음의 상태는 하나의 위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 그가 열반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통과하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의 내부에서 그에게 말하는 양심과 지혜의 음성에 대하여 그가 신실하였던 결과였다. 플라톤이 말하는 소크라테스는, 모든 삶은 어떻게 죽는 가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죽음 가운데서 인간은 감각세계에 수감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깨달음의 사람은 영혼과 참 삶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열망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족쇄로부터 마지막 해방이며, 그가 바라던 궁극적인 영역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음이 죄와 그 효과를 정복하고, 인류를 구속하며,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죽으셨다. 인간 육체의 완전에 가치를 둔 유대인의 하나로서, 예수께서는 죽음을 육체의 갈망, 환상, 또는 보다 높은 통전을 성취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지고 초월되어야 할 육체의 붕괴라고 보았다. 예수의 죽음 가운데는 어둠의 세력과의 예고된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새로운 아담으로서 싸웠다. 그리고 그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그는 우리를 부활과 생명의 새로움으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어, 우리 모두의 구세주가 되셨다. 


  예수는 부다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인류의 모든 죄악의 무게를 그의 어깨에 메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는 모든 인류에게 어떻게 고통을 당하며, 어떻게 죽는가의 한 실례를 제공하셨다. 이 속에는 죽음을 직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치유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의 죽음 속에서, 예수는 언젠가 죽어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의 모델이며, 은혜로운 힘의 원천이시다.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을 취하시므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는가를 보여 주시므로 죄와 죽음의 효과를 정복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또한 제공하셨다. 그는 고통과 죽음을 직면하여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염려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느낌이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붕괴는 영혼을 부여받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통일성에 대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에 적절하게 이해되고 참여하게 되면, 육체적인 붕괴는 보다 높은 통전의 양식, 곧 부활에 이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긍정적인 붕괴의 지고한 양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은 보다 높은 실존과 자기-초월의 선물을 받기 위하여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그리스도-의식 속에 참여하므로 죽음을 실제 그대로 알게 된 자들은 그것은 소멸이 아니고 변화이며, 탁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생동력 가운데서 거친 가슴의 꿈을 초월하는 존재 양식에 이르는 통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슬픔을 보게 되면, 기도와 그 자신의 사랑의 현존을 통하여 기쁨이 발생하도록 노력한다. 개인이나 사회 속에서, 몸, 정신, 그리고 영혼 속에 있는 질병을 보게 되면,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통하여 생명의 전체성과 완전성이 성취되기를 추구한다. 분노와 불일치, 미움, 다툼, 또는 전쟁을 보게 되면, 그는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그리고 평화를 이룩하는 자가 되려고, 자선과 선행의 근원이 되려고 노력한다.


  고통 속에 있는 기독교인의 기쁨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그것은 악을 직면하여 냉담하거나, 또는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을 위하여 고통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결코 질병이 아니다. 개인이나 사회의 악을 마주하고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전혀 변명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박해와 시험을 극복하고 성취한 승리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기쁨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가 무엇보다도 아주 어려운 여건 속이라 할지라도 그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을 때에 느끼는 기쁨이다. 고통 속에서 누리는 기독교인의 기쁨은 승리를 통하여 태어나는 것으로, 심지어는 질병 속에서, 박해 속에서, 투옥되었을 때에도, 매를 맞을 때에도, 그리고 죽음이라는 모든 여건 속에서 초월하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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