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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비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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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비평

EAST-TIGER 2020. 6. 11. 07:32

 

루터는 그가 죽기 전 해인 1545년, 루터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 당시 교회를 이탈하게 된 동기를 해명했다. 그 서문은 분명 루터라는 이름과 연관된 급진적 ․ 개혁적 시각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할 독자에게 자신을 소개할 목적으로 쓰였다. 그는 독자들에게 개혁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게 된 배경을 밝히려 한다. 1519년에 이르는 역사적 상황을 개괄한 후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난관에 대해 언급하는데, “나는 분명히 로마서에서 바울을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은 겁먹어서가 아니라 로마서 1:17(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 때문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 인해 하나님은 의롭고, 그래서 불의한 죄인을 벌주신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수사로서 흠 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 나는 불안한 양심을 가진 죄인이라고 느꼈다. 내가 내 행동으로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없었다. 죄인을 벌한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를 싫어했다. 나는 이 구절에서 바울의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밤낮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선물(믿음)로 의인이 살아가는 것으로, 또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다’는 문장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기록된 것처럼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그 수동적인 의를 가리킨다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나는 성경의 전체 면모를 새로운 견지에서 보았다. 이전에는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싫어했지만, 이제 나는 그 구절을 사랑하게 되었고, 가장 감미로운 것이라고 격찬하게 되면서 바울서신의 이 구절이 내게는 바로 천국 문이 되었다.”


새 발견의 전율로 충만한 이 유명한 글에서 루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에 대한 그의 이해가 급격히 바뀐 것은 근본적인 것이었다. 원래 루터는 의인의 전제조건을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기 전에 죄인이 먼저 해야 할 인간적 업적이라 여겼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점점 확신하여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처벌적 의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그가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찾았는지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죄인에게는 주는 의이다. 달리 말한다면, 죄인들이 의롭게 되려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자애롭게 죄인에게 주어 이 전제조건을 충족시킨다.


재미있는 비유가 생각났는데, 만약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많은 벌금을 내야 풀려난다고 하자. 이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한 그 약속은 이뤄진다. 앞에 말했듯이, 처음에는 루터도 공감한 것처럼 펠라기우스는 당신이 다른 곳에 쌓아둔 필요한 돈이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접근한다. 당신의 자유가 훨씬 더 값지므로 협상 제안을 받는다. 그래서 당신은 벌금을 낸다. 필요한 밑천을 갖고 있는 한 여기에 어려울 게 없다. 루터는 죄 있는 인간에게 이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밑천이 도대체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점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내가 돈이 없으므로 자유의 약속은 내 처지와 거의 관계없다는 가정에서 말을 전개하는 것이다. 반가운 소식은 두 사람 모두에게 복음은 나의 자유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돈을 받았다는 점이다. 즉 그 전제조건이 다른 사람에 의해 나를 위해 충족되었다는 말이다.


이 글에서 루터가 말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하나님은 개인들을 그들의 공로 대로 보상하는 무자비한 재판관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선물로 의를 주는 자애로운 하나님이라는 통찰이다. 루터 연구가들은 그의 의인 신학이 1515년 어느 시점에 결정적 변화를 겪었다고 대체로 공감한다. 루터의 통찰에 중심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 교리였다. 의롭게 된다는 개념은 이미 나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은 애매하다. 의롭게 하는 믿음의 성격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믿음만이 의롭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루터는 “믿음”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단순한 말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그의 믿음은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루터는 복음이 역사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믿는 데 만족하는 믿음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죄인들은 복음의 자세한 역사적 내용을 완전히 믿을 능력이 있지만 이 사실 자체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위해 충분한 것이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구원사역을 우리를 위해 성취했다는 것을 믿고 의탁하는 일과 관계있다. 그다음으로 믿음은 ‘신뢰(fiducia)'라고 이해해야 한다. 신뢰의 개념은 종교개혁 시 믿음에 대한 개념으로 중요하다. 루터는 항상 비유를 하여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이 없는 이는 바다를 건너야 하지만 하도 놀라서 배를 믿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고 배 타고 건너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믿음은 어떤 것이 옳다고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다. 루터의 비유를 보면 믿음은 배가 있다고 믿는 것만이 아니라 배에 발을 들여놓고 거기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 루터는 그의 1520년 [기독교의 자유(The Liberty of Christian)]라는 글에서 말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교리 덩어리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신자의 결합이다. 그것은 신자 전인이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이로써 신자에게 실제로 그리스도가 몸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은택을 아는 것이다”라고 뷔텐베르크에서 루터의 동료였던 필립 멜랑히톤은 썼다.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그 은혜 용서, 의인, 희망 등)는 신자에게 유용하게 된다.


결국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죄인이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믿음을 인간의 행위 또는 업적으로 취급하는 셈이 된다. 루터는 의롭게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제공하셔서 죄인이 할 일이라곤 그걸 받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처럼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의롭게 됨” 은 이 교리의 뜻을 분명히 드러낸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하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받는다. 믿음으로는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신다는 증언이다. 믿음 그 자체조차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의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할 전제조건을 충족시킨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의롭게 될 전제조건을 충족시켰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의가 아니라 그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도록 하는 의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 교리의 주요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각 죄인이 자기를 의롭게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의롭게 하는 데 주도권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이고 그 죄인을 의롭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밑천을 하나님이 제공한다. 이 밑천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같은 의를 말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공통적으로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을 의롭게 하는 의를 그들에게 자애롭게 준다고 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여기에서 그 ‘의’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루터는 신자 밖에 그대로 있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문제의 의는 내적이고, 루터에게 그것은 외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의가 자신의 일부가 되게끔 의롭게 하는 의를 부여한다. 그 결과 비록 죄인 밖에서 시작했지만 이 의는 그 인간의 일부가 된다. 루터로서는 그 의는 죄인 밖에 그대로 있어서 외적인 의가 된다.


1515-16년 강의에서 루터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외적인 의’ 개념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로 발전시킨다. 그의 로마서 4장 7절에 대한 주석은 “성도들은 자신의 눈에는 항상 죄인이어서 외적으로 항상 의롭게 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신의 눈에 항상 의로워 외적으로 항상 죄인이다. 내적으로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우리가 볼 때에 또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밝히려 함이요. 외적으로란 말을 하나님 앞에, 또한 하나님 생각에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또는 우리 공적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전가하셔서 우리가 의로울 때가 외적으로 의롭다.” 루터의 말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외적 의 때문에 의롭다. 그 의는 그들에게 전가된다. 즉 믿음을 통해 그것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취급된다. 믿음에 관한 루터의 개념의 본질적 요소는 그리스도와 신자가 믿음으로 결합된다는 것임을 보았다. 이리하여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와 신자를 이어주며, 그 기초 위에서 신자를 의롭게 만든다. 그래서 기독인들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전가로 의롭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 우리 죄를 막아주신다. 이 의는 우리 죄와 싸울 수 있게 하는 보호 방패와 같다. 이 접근방식은 신자에게서 죄가 지속되고, 동시에 신자의 점진적 변화와 장래 그 죄를 없애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려고 완벽하게 의로워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죄는 불신, 또는 하나님 측의 잘못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의 자애로운 보살핌에 맡겨야 한다는 지속적인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말 가운데 신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즉 소망 속에서 의로우나 실상은 죄인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약속으로써 의로우나 현실상 죄인이다.

 

2008.12.2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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