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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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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EAST-TIGER 2010. 5. 6. 08:18


Ⅰ. 서론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부터 계속되었던 그리스도론의 논쟁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있다.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God)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자기계시를 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것도 신약성서의 사복음서가 유일하다. 어떻게 보면 성육신은, 예수의 제자들이 인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격화한 이야기거나 기독교의 형성에 있어서 경전의 신성함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지속된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예언과 계시는,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인간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본다면, 사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을 증언하는 유일한 증거이자, 모든 그리스도론의 논쟁의 해답의 근거가 된다. 


  3, 4세기에 시작된 그리스도의 인성 논쟁은 희랍 철학자들의 이원론 사상이 큰 역할을 했다. 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 것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 한 것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 논쟁을 가속화 시킨 것은 초대교회 교부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들은 이원론 사상에 대한 반박을 위해 그리스도의 단성(單性)론과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공의회가 열릴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되었고 이단들을 숙청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리스도론이 지금까지 끊임없는 논쟁 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Ⅱ.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스도의 인성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했다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 여기서 명사 ‘육체(sa.rx)’는 영혼과 반대는 것으로 육체, 또는 인간성(Humanity)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 바울도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서 그리스도를 ‘사람(a;nqrwpoj)’으로 표현하고 있다.


1. 칼케돈 신조와 성육신


  여러 차례에 걸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확정지었지만, 성육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근거를 다루지는 않았다. 이는 초대교회와 교부들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해답을 요구 받았고, 이 문제에 대한 규정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의 칼케돈에서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칼케돈에 모인 교부들은 그리스도론에 대해 어떤 새로운 첨가보다는 기존의 그리스도론을 재확인하고 문제가 되는 성육신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였다. 니케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칼케돈에 모인 교부들은 훈련받은 신학자들은 아니었다. 그릴마이어(A. Grillmeier)는 이 모임에는 뛰어난 학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이 주교들이 목회적인 관심을 가진 말을 하려 하는 목회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들의 언어 사용법은 철학적 의미를 지닌 기술적 용어들이 아니라 목회적 관심, 예컨대 세례를 받기 원하는 자들이 고백하기 위한 교리문답 같은 것들이었다.


  이 공의회에서 핵심적인 결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는 두 가지 본성이 존재하며, 이 두 본성이 결합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혼합이 일어나지 않았고, 변화도 없었으며, 분리되거나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본성은 각 본성을 침해하지 않고 하나로 존재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은 잠시나마 그리스도론의 두 본성 논쟁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18세기에 일어난 계몽주의로 인해 다시 논란은 가열된다. 계몽주의자들은 두 본성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고, 한 육체 안에 두 본성이 공존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이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그리스도가 이중인격자거나 불안정한 상태의 인간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위협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위협의 요소들은 지속적으로 성육신을 부정하지만 신앙의 기초로서 고백은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이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될 수 없는 영역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신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동시에 정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고서는 신의 입장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육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 의미로는 조물주인 하나님의 인간세상의 개입이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창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는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인간으로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신화에서나 가능한 말이지만 현실에서도 가능하려면 오로지 신만이 그 일이 가능하다. 


2. 육신(sa.rx)의 의미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이는 율법으로 인하여 연약한 육신이 할 수 없는 것 즉 육신 안에 있는 죄를,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의 죄를 정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표현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그리스도가 인간과 동일한 인성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깊게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세상으로 보내실 때에 그 아들 자신은 죄가 없지만, 죄 있는 인간성과 긴밀한 관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죄 있는 육신’ 으로 오셨지만,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죄가 없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모양’이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변호한다. 결국,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인간세상으로 보내실 때에 최대의 비하(卑下)로 그를 보내시되, 그의 인성에는 “거룩하고 흠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인간의 모습으로 결합하여, 신성과 인성이 조화된 하나의 인격체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신의 아들로서만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의 아들(人子)로도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Ⅲ. 그리스도 인성의 성경적 증거


1.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나심


1)구약의 예언


  이사야 7장 14절과 9장 6절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리스도의 인성적 증거이다. 두 구절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처녀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와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특이하게 남자의 개입이 없는 처녀에게서 났고, 유다지파와 다윗의 자손이며, 출생지역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이 예언되었지만, 여자의 몸에서 잉태되어 아들로 태어난다는 예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출생을 의미한다.


2) 복음서의 족보


  신약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있는 족보도 그리스도의 인간적 출생의 근거가 된다.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시작되는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이어진다. 이와 달리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로 시작되는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역행 배열로 그 끝이 하나님까지 닿는다. 이 두 족보를 비교하여 볼 때, 마태는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구약의 예언처럼 그리스도가 다윗의 왕위를 받게 되는 것과 언약의 상속자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그리스도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전제를 하고,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인간 아담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가 인간의 정통성을 가지고 탄생한 것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족보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으로 대표적인 것은, 예수와 인자(人子;Son of man, ui`o.j avnqrw,pou)이다. 그리스도가 신성을 드러내는 메시아적인 호칭이라면, 예수와 인자는 인성을 드러내는 호칭이다. 통상적으로 예수라는 호칭은 임마누엘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다. 인자 또한 예수가 자신을 나타내는 말로서 세례 요한, 사도 요한,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등도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한 유대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의 자손이라고도 불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법률적 자격(Sonship)을 의미한다. 한 예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3절에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성을 소유하신 사람이기에 여러 가지 사람의 이름들을 소유하셨고, 자신은 물론 사도들과 그 당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2. 공생애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만 있었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인간만이 느끼고, 괴로워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의 성질을 이어받았고, 제한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광야의 시험


  그리스도는 공생애 시작에 앞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당한다. 그리스도는 40일 금식 후 배고픔을 느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분명 광야의 돌들로 떡을 만들어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굶주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마귀도 이것을 알고, 첫 시험으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광야의 돌들로 떡을 만들어 그리스도가 겪는 굶주림을 해결하라” 고 말한다. 즉, 마귀도 그리스도가 인간의 성질과 제한성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마귀의 첫 시험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기초적인 굶주림에 대한 시험이라 볼 수 있다. 


  다른 의미로는 복음서 내내 그리스도가 직면하는 사람들의 요구이다. 이것에 대한 물음으로, 마귀가 정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모르고 계속해서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란 가정을 들었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마귀를 가장한 사람들의 요구이다. 이 물음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만나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는 것, 오병이어(五餠二魚)나 칠병이어(七餠二魚)와 같은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요구에 따른 반응으로 나온 기적이다. 즉,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로부터 생산적인 기적을 요구받는다. 그것은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 이 요구에 직면한다.


  그리스도는 이 시험에서 기적을 거부한다. 분명, 복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이 기적을 행할 수 있었고 즉시 가능했다. 또한 공생애 기간 동안 이와 비슷한 시험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사랑을 입증하러 왔기에 전혀 자신을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공생애 기간 동안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은 사랑과 헌신의 기적들이지, 결코 힘, 놀라움, 드러냄의 기적 등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굶주렸지만 기적으로 자기의 굶주림을 채우기는 거부했고, 타인들의 굶주림을 채우는 것은 거부하지 않는다.


  이후 마귀의 또 다른 시험들에서도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지 않고, 다만 말씀으로 인간이 가진 연약함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은 그리스도가 인간이기에,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망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알고, 느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극복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만 존재했다면 광야의 시험은 있을 수 없다.

 

2) 겟세마네(Gethsemane)의 기도 


  최후의 만찬이후 그리스도는 감람산을 지나 겟세마네로 향한다. 가는 도중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고 말하고 베드로는 이에,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한다. 베드로와 동행한 제자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이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이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겟세마네에 도착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홀로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고,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에 오른다. 성서에는 이때의 그리스도의 심정이 기록되어있다. 마가는 이것에 대해 “그리스도가 심히 놀라고 슬퍼 하사(he began to be deeply distressed and troubled)” 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가 겪는 고통의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리스도의 이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죽음 앞에 왜 두려워할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즉, 신(God)이 느끼는 죽음의 개념은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들의 갈증을 해소하게 하는 단서가 뒤이어 나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그리스도의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 그리스도의 간구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 됨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워 죄의 종인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본체로서 자기를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비웠다는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죄의 종인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겟세마네 기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로서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양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감추어 두신다. 그것은 공생애 초기 광야의 시험에서도 그랬다. 분명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는 마귀의 시험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모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자신을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낮추셨다. 그래서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았고 공생애 기간 내내 마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선지자 노릇과 이적을 구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때의 그리스도는 아직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제자들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물어봤을 때,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언급하면서, 때로는 비유를 들어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결론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였다.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그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의 모양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근본 본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공생애 기간 내내 인간의 성질과 제한성을 가지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게 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들을 비추어 본다면 빌립보서의 말은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그렇다면 겟세마네의 기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가장 절박한 간구였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최대 목표는 인류의 죄를 위한 십자가의 형벌이었다. 이미 그것에 대해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언급하셨다. 그는 장차 다가올 십자가 형벌에 두려움을 느끼셨고, 이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스도는 이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간구한다. 그의 기도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도울 정도로 힘겹고 처절한 기도였고,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간절하고 치열한 기도였다. 특히 땀이 피가 된다는 표현은 인간 그리스도의 절박함을 나타낸 제자들의 안타까움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도는 십자가의 죽음이 그의 절대 순종이라는 의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양에서 나오는 꾸밈없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많은 경건학자들은 겟세마네의 기도가 이사야의 예언을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은 감당할 수 없는 인류의 죄를 담당한 자의 고통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어떠한 신학도 그리스도의 심중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십자가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겟세마네의 기도로 연결시켰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리스도가 그의 신성이 없는 일종의 반신(半神, a sort of demigod)의 상태는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광야의 시험, 공생애에서도 그랬듯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그리스도의 의지는 하나님께 순종으로 결론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은 달갑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이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영적인 고통은 곧 다가올 십자가의 형벌에서의 육체적 고통과 상응하는 중요한 증언이다. 그리스도는 이 기도를 통해 인간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냈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통보다 더 강렬한, 순종의 의지로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한다.


3)그리스도의 수난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낸다면 그의 수난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그리스도의 수난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복음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면, 그의 수난은 구약의 예언이 완성되는 순간이었고 다가올 부활의 필연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학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역사성이다. 수난전승을 옹호하는 신학자로 페쉬(R. Pesch), 타이센(G. Theiβen) 등은 수난전승이 이미 문서 전승 단계를 거쳤으며, 마가를 통하여 약간의 편집 과정만을 겪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반해 크로산(J. D. Crossan)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으로 확실하지만, 그와 관련한 이야기(narratives)은 그 사실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든다. 그 이유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사실을 바탕으로 그것이 불가피한 그의 운명이었으며 그 처형과정을 설명해 줄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했기에 구약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아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두 입장이 공통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역사적 사실(fact)이였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역사성의 결여를 다루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복음서를 기본 자료로 본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역사성을 넘어서 그것이 의미하는 상징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당시의 로마에는 세 가지 지독한 극형이 있었는데, 십자가형과 화형, 그리고 맹수에 의한 처형이었다. 이 처형이 지독한 극형이 되었던 이유는 단순히 비인간적인 잔인성이나 공개적인 모욕 때문만이 아니라, 처형되고 난 후 매장할 시신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불 속에 던져지고 맹수에게 던져짐으로 육체적으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우리가 종종 잊고 있었던 것은 십자가 위에서 시신을 탐하는 까마귀와 밑에서 죽은 시신을 먹으려고 기다리는 개들이다. 십자가 처형을 다룬 그리스-로마의 저술가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자들을 “육식조류를 위한 부정한 음식과 개들을 위한 재수 없는 먹거리”로 묘사했다. 이러한 근거를 종합해본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그 당시 인간에게 내려지는 최악의 형벌임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이 확정된 이후, 공관복음에 나타난 형장으로 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심문과 채찍으로 인하여 육신이 쇠약해져서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갈 수 없게 되고,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간다. 특이한 점은 마태, 마가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가 뒤따르는 백성들 중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 위로의 말을 전한다.


  골고다에 도착한 그리스도는 같이 온 행악자 두 명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 로마병사들은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덜고자 쓸개 탄 포도주를 권하지만 그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로마병사들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백성들의 조롱은 인간 그리스도의 극치를 나타낸다. 심지어 그리스도와 같이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도 이에 참여한다. 그들의 물음은 광야의 시험 때 마귀가 했던 말과 같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공관복음에 나오는 이 구절들은 자연스럽게 광야의 시험과 연결된다. 그의 공생애 사역 중에도 이러한 물음들은 계속 요구되어 왔지만, 결정적으로 십자가 처형에서 더욱 힘을 얻어 그리스도에게 질문되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알려주고, 광야의 시험과 겟세마네의 기도가 가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해주는 근거가 된다. 


  공관복음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무리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고 말하신 뒤 그 자리를 떠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체포 이후부터 이 질문에 침묵하신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hli hli lema sabacqani;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신다. 그리스도의 이 말은 겟세마네의 기도처럼 절박한 표현이다. 마치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죽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나오는 인간본능의 탄식처럼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진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간구이자 탄식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반응은 은연(隱然)의 침묵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한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기쁨이 있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그가 그 고통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기쁨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 기쁨이 부활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리스도가 기쁨의 감정과 십자가 처형 가운데 느끼는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가능했는지 의문이다. 복음서의 기록에는 십자가의 기쁨을 언급하는 본문이 없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에게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시던 당시 그리스도가 가졌던 감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어떤 영감내지 계시가 주어졌을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통과 기쁨의 복합적 존재 양상에 관한 것보다 더 큰 대조는 인간의 경험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고난과 환난 중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약성서가 가진 역설의 가르침이지만, 십자가 형벌은 그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구약성서부터 계획하신 대속(代贖)의 순간이었다. 이것에 대한 단서로 히브리서 5장 7~8절의 표현이 적절하다. 그리스도는 육체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 형벌을 순종함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대제사상이라 칭하심을 받으신 것이다.


  한편,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육신의 가족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육신의 혈육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신다. 이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있는데, 이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각 복음서는 자기들의 독특한 신학사상과 공동체의 상황과 요구를 반영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했다. 공통적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초월하고, 죄를 용서하며, 자연을 통제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세가 있는 것을 기록하였고 고난과 부활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갈등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아마 그런 갈등과 긴장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공관복음은 마가복음과 Q문서를 기초로 한 기자들의 예수에 대한 평전(評傳)과 같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보면,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인성을 1장부터 전제를 한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인간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과 니고데모 및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랍비로 간주했고, 사역 도중에 피곤하고 갈증을 느꼈으며,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음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로마 병사가 그리스도의 몸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를 기록하였고,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그의 인성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직접 보고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난 것과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과 조반을 같이 하신 것은 요한만이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다. 


  요한의 이러한 진술은 로고스(Logos)가 성육신이 되었을 때, 그 육신은 정말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 누가처럼 그리스도의 족보와 탄생, 유년시절 서술 없이도 그리스도와 같이 공생애를 경험한 요한의 기록들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는 요한 서신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여,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들이나 의심하는 자들을 향한 변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요한이 성육신의 실제를 부정하는 어떤 형태의 가현설과 단성론을 반박하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 이에 요한은 그리스도와 인간 예수 사이에 구별을 짓고, 더욱이 전자를 위하여 후자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적그리스도’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만진 사람으로서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의 사역의 목적과 결과의 완성으로 볼 수 있지만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각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덤에 매장했다고 공통적으로 진술한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사역들에 대한 기록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게 한다. 이는 모든 신학 이론의 전제가 된다. 



Ⅳ. 결 언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가 인간인 동시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임을 기독론의 전제로 한 결의이다. 그러나 이 신조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방법과 이의에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칼케돈 신조에서 그리스도는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이후에도 기독론을 위협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신·인성에 대한 의문에 철학적인 사유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 


  일단 우리가 성서를 보면서 공통적으로 전제할 수 있는 것들은, 공관복음의 기자들이 증언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인간들 가운데서 같이 생활하였고, 팔레스타인에서 나시어 그 곳에서 자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와 공관복음 이외의 성서에서의 그리스도가 가지는 인성이 상치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의 대부분의 책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고난과 부활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안타깝게도 그 책들은 397년 이후부터 계속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마치 오래전의 사실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로 변형되어 한낱 신화나 설화로 전락해버리는 것처럼, 신약의 책들은 그것을 작성한 기자의 의도와 신학적 전제와는 상관없이 세속화된 인간의 이성과 체계적인 논리에 맞추어 해석하려 든다. 그것은 신학이 범하는 오류이다.


  위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복음서의 예들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질문되어지는 한 가지 공통문구가 있다. 그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질문되어진다. 나는 이것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신성으로만 이 세상에 오셨다면 이 질문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할수록 그 질문은 거세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일으키는 이적을 눈으로 보았고, 몸과 마음으로 체험을 했는데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것에 대한 결론으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거하셨을 때 분명히 인간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질문하는 것은 같은 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한 질문이다. 그들 눈에는 그리스도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증언이다.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들은 확실히 그리스도를 보았던 사람들의 말을 엮어 체계화시켰거나 직접 보고 경험하여 확인한 것들을 기록했다. 여기에서 의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회복해주는 역할의 근거가 되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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