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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설교의 관계 : 신학적 설교는 기독교의 새로운 변증이다. 본문
Ⅰ. 문제제기
오늘날 기독교에는 설교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고, 설교의 자료도 엄청나다. 교회공동체는 매 주일 담임 목회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그 설교는 교회공동체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준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마치 설교를 하지 않으면 목회의 큰 지장이 생길 정도로 매 예배 때마다 설교를 준비하고, 주일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요일에 걸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를 듣는 교회공동체는 자신들의 관심과는 무관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가끔은 자신들의 영적인, 육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목회자의 설교에 암묵적 동의를 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설교를 스스로가 모니터링 하거나, 교회공동체의 요구를 들으며 자신의 설교를 되짚어 보며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야 하지만, 그렇게 여유 있는 목회자들은 우리 주변에 별로 없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설교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싫든, 좋든 교회공동체는 마냥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설교할 수 있는 근원이 무엇일까? 그들은 타고난 연설가이고 이야기꾼인가? 그들은 모르는 것이 없는 천재일까? 이 질문에 동의의 답을 내린다면, 온 세상은 기독교가 바라는 대로 복음화 됐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언제부턴가 목회자들의 권위는 교회공동체와 세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그들이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설교해 왔고, 앞으로도 설교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목회자들의 지속적이고, 반복되는 설교 속에서 높은 수준의 설교 능력을 기대하기에는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나의 혼인잔치에 비유할 수 있다. 질 좋은 포도주는 잔치의 처음부터 나오지만, 마지막까지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으로, 사람들의 상식을 넘어섰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질 좋은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이고, 일시적인 간섭이었다. 이 기적은 이후에는 예전과 같이 잔치 마지막은 질 나쁜 포도주를 마셔야 했다.
안타깝게도 목회자들은 목회사역 전반을 책임지는 하나님의 종이자 연약한 인간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목회사역에서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가? 정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설교 하는가? 그런데 왜 교회공동체는 목회자의 설교에 목마름을 느끼는가? 목회자들이 교회공동체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하고,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할 교회공동체의 고민들이다.
Ⅱ. 설교는 정말 중요한가?
이 질문은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와 교회공동체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매스 미디어(mass media) 커뮤니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말과 영상이 동시에 송출되는 매체(인터넷, 텔레비전 등)에서 한 사람이 약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말하고 있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한다. 뚜렷한 의무감이나 의식이 없다면, 그것은 상당히 지루한 일이고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매주 기획되고 계획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점에서 설교의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설교 대신 토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하나님(God)’ 이라는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비교해보는 것은, 서로의 신앙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매우 훌륭한 토론이자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교회 현장에서 설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예배에서도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정말 설교는 중요한 것일까?
1. 설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론 여러 가지 견해차이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설교는 교회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교의 본질적 중요성은 무엇일까? 설교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소통(communication)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계시고, 돌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만물들은 그 어떤 것도 침묵하고 있지 않다.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만물들은 화답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에게 언어를 허락하여 자신의 말씀과 계획의 전달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그 후 지금까지 하나님께 합당한 설교자들 통하여 이 일을 계속 행해 오셨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고후 5:20). 여기에서 우리는 설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로서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한 말씀을 통하여 설교 사역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 가운데 설교의 모범을 제시하셨고, 열두 제자와 칠십 문도를 파송하셔서 설교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은 사도들에게 이 소명을 믿는 자들에게 남기셨다(마 28:19-20). 즉, 그의 권능과 임재의 약속은 온 세상으로 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백성들을 제자로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한 도우미로 성서를 영감하신 성령께서, 성서를 증거 하는 사람들을 통해 분명하게 역사하시고, 듣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사,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만드신다(고후 4:4-5). 또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완전한 자로 세우시기 위해 설교를 사용하여 증거 하신다(골 1:28).
이러한 근거에서 셋째로 설교에는 삼위일체의 의미가 들어있다. 설교에는 위대한 권위, 곧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갖고 있다. 또한 설교는 큰 권능도 갖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죄악 된 인류를 위해 선포하시고, 행하신 일들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복음이 없는 곳에 가서 그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전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때를 따라 필요한 말들을 말하게 하시고, 듣는 자로 하여금 내, 외적인 변화 일으키실 것이다.
2. 성서는 설교의 원천인가?
하나님의 제한된 피조물인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려고 택하신 이상(異常)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적 증거는 성서뿐이고,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심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전제는 성서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담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성경은 계시이며 구원과 관계된다.
단적인 예로 구약성서는 그 자체를 성취하려고 오신 분에게까지도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첫째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절대 폐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성서를 공부하셨고, 성서에 의해 자신의 삶을 구성하셨으며 성서가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것으로 인정하셨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성서가 권위 있고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셨다.
또 다른 이유는 성서의 말씀들이 지금도 성취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는 인간의 언어에서는 찾을 수 없는 능력과 예리함을 갖고 있다. 이것이 성서적 설교의 배후에 존재하는 명확한 전제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 메시지를 정확히 추출해서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들려지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새로운 사상의 발명자가 아니고 도사나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설교의 원천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얻거나 다른 사람들의 사상들을 수집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성서로부터 얻는다. 설교자가 앞서 말한 성서의 능력을 믿는다면, 설교자의 고뇌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한다. 이렇듯 설교자는 성서가 가진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만드는 시대의 연금술사(alchemist)이다.
Ⅲ. 우리의 설교는 왜 빈곤할까?
성서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나타내고 신앙의 기준이라는 이론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인정한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이 전제는 매우 다른 사항으로 취급되고, 성서적 설교는 빈곤하다. 많은 설교학자들이 목청 높여 성서적 설교를 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설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성서에 근거한다고 믿으며 설교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설교는 빈곤한 것일까? 왜 우리의 설교를 듣는 교회공동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1. 모르고 있는 사실들
우리의 설교가 빈곤한 이유는 많다. 그것은 급변한 시대 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신앙은 늘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체된 신앙마저 시대 흐름 속에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를 위협하는 시대의 흐름은 무엇인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물론 여기에 열거된 이유들이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첫째로,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계는 신앙적 원천인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 많은 성직자들이 기독교의 교리나 성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까지도 거의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교회공동체가 더 공허하다. 믿음이 수단화 되고 의식화 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니고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사교집단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가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교회공동체는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데 설교자는 성서적 설교를 표방하며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반복되는 말들만 그들에게 전한다. 이것은 아주 좋은 수면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졸고 있는 교인들에게 호통 칠 수 없고, 교인들 역시 목회자의 목회 능력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금 시대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속도로 정보화, 첨단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이 혁명의 특징은 실시간, 즉각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현혹시킬 수 있다. 다양한 주제의 지식과 의문들은 인터넷 검색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스스로 알 수 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의 바람은 무엇보다 거세다. 이런 시대에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계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교회는 변화에 둔감하고, 내면적 변화보다는 외면적 변화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교회는 대형화 되고 첨단화되는데 내면의 신앙은 늘 제자리에 있다. 문제는 이런 시대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멀티미디어 시대의 기술과 사상은 교회공동체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설교자들은 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주면서 설교할 수 있고, 인터넷이 가능하면 어디서든지 실시간적으로 접속하여 웹 스트리밍(web streaming)을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렇듯 기독교의 예배는 폐쇄적인 예배에서 상당부분 열린(open) 예배가 되었고, 문화 콘텐츠를 이용한 다양한 예배들이 등장했다. 또한 교회공동체는 효과적인 목회를 위해 조직화되고 세분화 되었다. 이런 다양한 변화들은 목회현장에서 실제적인 장점으로 작용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에 대한 문제점들도 간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시대적 흐름 속에서 주일이면 케이블 방송의 기독교TV와 인터넷 예배 등을 통해 직접 교회에 가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늘고 있고, 그로 인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즉 교회공동체 자체가 파괴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관념이 이미 이미지화(‘교회는 ~ 곳이다.’) 되어 가고 있고, 더욱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이나 공동체가 그 이미지화를 돕고 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해체적 성격에 맞추어 교회 자체에 대한 부정(否定)이 심화될 것 같기 때문이다. 교회가 웹 사이트(web site)의 주소로 전락하여 자신이 좋아하고 듣기 원하는 설교자를 선택하여 설교를 듣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든, 누워서 드리든, 샤워를 하면서 드리든 상관없게 되어버린다. 게다가 교회 자체가 외형적으로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곧 교회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교회는 경건성과 교인들 간의 교제를 잃어 본질마저 위태롭게 된다. 즉, 교회가 어디에도 있을 수 있게 되겠지만, 교회의 본질적인 의미가 어디에서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
셋째로 지금 시대는 권위(authority)를 거부하는 시대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권위를 의심하며 파괴하고 있고, 남녀평등과 인권운동은 점차 그 범위가 사회 전체로 넓어지고 있다. 심지어 가정의 파괴가 빈번한 것은 가장 가까운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직의 권위를 인정하며 교회의 전권을 위임한 목회자의 권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설교가 빈곤한 간단한 이유가 있다. 즉, 우리가 성서적 설교를 안 해서 문제가 아니라, 설교의 원천인 성서의 권위가 시대의 흐름 속에 위태롭기 때문이고, 자연스럽게 목회자와 교회의 권위도 도전(挑戰) 받는 것이다.
넷째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출현은 설교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많은 길이 있고 그 길 중의 어떤 것도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한 길(one way)을 선포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교인들은 자신들이 듣는 설교에 대해 비평을 늘여놓을 것이고, 설교자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들과 목회자들 중에서 우선 사항들이 매우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다. 지금의 교회들은 정형화된 예배보다 사교모임, 사회적 기능, 사회 활동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한다. 반면에 목회자들은 더 높은 학위, 섬세한 상담, 비전문적인 정치, 사회학과 리더십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설교가 아니라 교단 행정 관리와 위원회 모임들에 전념하고 있다. 이런 양상(樣相)은 결과적으로 현대 설교가 생기가 없고, 미비해지는 경향을 낳았다. 그래서 설교가 너무나 우유부단하고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는 설교시간이 지루하다. 형식적인 의상, 언어, 태도와 주제는 교인들이 일주일간 고단한 삶의 터전 속에서 교회에서 육체적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다음 주일날 여러분이 사역하는 지하실 같은 교회에 조용기, 전병욱, 이재철 목사, 심지어 교황이 무료로 집회를 연다면, 교인들뿐만 아니라 타 교회와 지역 주민들까지 떼를 지어 모여와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한다면 정말 문제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교인들이 집회 이후 담임 목회자의 설교와 집회에서 있었던 설교를 비교하며 한탄한다면,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왜 부끄러운 일인가? 공통적으로 교인들은 자신들의 목회자의 설교에서 미처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영적인 부분에 굶주림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목회자들의 설교는 앞서 말했지만, 생기가 없고, 애매모호하다. 즉 우리의 설교는 교인들의 영적 굶주림을 메우지 못하며 현실 생활에 별다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교인들을 위한 ‘구경거리’ 와 예배의 형식적 역할을 하고 있으나 교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영적성장에 불가결한 것 같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설교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의 생활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한다. ‘설교는 정말 중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설교는 왜 빈곤할까?’ 이 두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탄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설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이에 설교는 그것을 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설교가 이러하다는 것은 비극이다.
2. 위대한 설교자들은 어떻게 설교했는가?
여기서 잠깐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토록 큰 무리를 모이게 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강력한 설교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고, 그 가르침에 있어 역동적이고, 명확하고, 적절하고,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설교를 하셨다. 이전에 사람들은 이 같은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마 7:29). 여러분의 생각을 과거로 돌려 그리스도의 산상설교, 비유들, 논쟁들, 회당 설교를 생각해보자.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말씀하시러 오셨고, 이에 듣는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런 점에서 비슷했다. 초대 교회의 설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나온 확신으로 확신에 찬 것이었다(행 4:13). 그 설교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더욱 굳세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단을 불러일으켰다. 때로는 초대 교회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의 위협을 당했지만, 어디서든 그들의 설교는 강력하게 청중들의 마음을 고동치게 했고, 예수님과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기도와 성령의 깨달음이 설교의 원동력이 되었다. 초대 교회의 설교에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었으니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여러 다른 장소들에서 설교를 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체험 이후 거리에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스데반과 같이 처형 전에 설교를 할 수도 있었다. 바울 같이 법정에서도 설교를 했다. 그들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후에도 성전에서 설교를 했고, 두란노 서원이 비었을 때 그곳에서 설교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회당에서 설교를 했고, 때로 다음 주일에도 설교를 하라는 초정을 받기도 했다(행 13:42).
사도들이 행정 관리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하고 기도와 말씀 연구, 그리고 복음 전파에 전념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말씀이 자라나고(행 15:35), 왕성하게 되며(행 6:7), 흥왕했다(행 12:24, 19:20).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공통적으로 이것을 복음이 전파됐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즉 설교는 믿음이 퍼져나가는 방법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방법이 설교라고 보았다(고후 4:4-6, 행 26: 16-18). 그리고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의 결말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로 끝맺는다(막 16:20). 우리가 보는 바울의 마지막 모습은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속박을 받지 않는다. 이 두려움을 모르는 설교자는 간수들과 방문자들에게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행 28:31).
초대 교회공동체가 들었던 설교는 사도 시대의 종말로 끝났지 않았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나는 설교를 믿는다.」(I Believe in Preaching)에서 설교의 영광이 여러 세기를 통해 계속 비추어온 길을 간단히 스케치한다. 곧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위클리프(John Wycliffe), 루터(Martin Luther), 로마 가톨릭 수사들, 웨슬레(John Wesley),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이다. 그리고 오늘의 기독교계에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로저 포스터(Roger T.Forster) 등 얼마나 위대한 설교자들이 있는가. 위대한 설교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저 없이 전파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내, 외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들처럼 설교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해버린 우리들의 혼탁한 정체성에 근거가 있다.
Ⅳ. 분리될 수 없는 것들
우리는 앞서 설교의 본질과 현대 설교의 문제점을 살펴보았고 이제는 그것에 대한 대안을 찾을 때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스스로에게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을 물어보는 질문들을 해보려고 한다. 이 질문들은 우리가 그동안 설교뿐만 아니라, 목회에서도 간과해왔던 것들과 알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긴 고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필요하고, 이 논문이 전하려고 하는 설교와 신학과의 관계, 그리고 설교에 있어서 신학적 사유의 필요성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성직자인가? 교인인가?
성직의 길을 걷는 우리는 직접적이든, 은연중이든 지나치게 ‘성직자’를 강조한다. 우리가 교회공동체의 앞에서 예배를 집전(執典)하며 교회사역을 주도하지만, 사실 우리는 교회공동체에 속한 교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루터는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누구이고, 작은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은 앞에서 성직자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더불어 부여받았을 뿐, 교회공동체 속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설교는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설교에 대한 실천의 모범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직자와 교인은 분리될 수 없고, 성직을 수행하는 설교자는 설교가 끝난 후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하는 교회공동체의 일부이다.
2. 목회자인가? 신학자인가?
우리는 이 질문 대한 답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갈등한다. 우리들이 가진 이미지는, 목회자는 교회사역을 담당하고, 신학자는 성서주석과 교리연구를 하는 것으로 자리 잡혀 있다. 그래서 목회와 신학은 별개이고, 서로를 분리된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루터는 훌륭한 목회자이고 신학자이다. 존 웨슬리도 마찬가지였고,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러했다. 즉, 목회자가 곧 신학자이고 신학자 곧 목회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질문에 갈등할 필요가 없다. 만약 앞으로도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했다면, 우리는 말 잘하는 달변가가 될 수는 있어도, 위대한 설교자는 될 수 없다.
3. 설교에서 신학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는가?
설교의 기초인 성서는 그 양식에 있어서 시와 서간문, 묵시문학, 역사적 자료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성서는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보편적인 진리와 윤리적 기준이나 명령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설교의 기초인 성서가 갖는 이런 특징들은 설교자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과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잘못된 해석과 이해를 동반한다. 설교는 일차적으로 성서의 본문을 주석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고백이 투철하더라도 성서를 주석할 때, 본문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문화적,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을 떼어놓고 그 자체로만 본다면, 본문의 의미는 설교를 통해 제대로 전해질 수 없다. 이는 성서의 역동성과 역사성을 제한하는 것이고, 설교자 스스로가 성서적 설교에서 벗어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설교는 일차적으로 본문주석이기 때문에 본문의 해석은 다양하게 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이런 차원 이상이다. 왜냐하면 설교가 이야기 하는 보편적인 진리는 인간의 이성에 부합하고 인간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계시로부터 주어지고 또 이런 사실이 수용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설교가 신적 차원의 단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시는 단지 과거에 발생한 과거 사건으로서의 역사적인 지식이나 문화적, 사상적 지식의 일부가 아니라, 설교가 선포 되는 그 현장에서 ‘지금 발생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문 기사를 볼 때, 기자가 사건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신문기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자의 경험적, 지식적 해석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독자들은 사건에 대한 기자의 해석에, 동의와 반대 내지 중립을 표할 수 있다. 만약 설교가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서 그쳐서 맹목적인 믿음에 머물렀다면, 교회공동체는 성서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설교자들은 성서를 해석하면서, 지금의 시대상황에 적합한 말을 교회공동체에게 전했고, 교회공동체는 설교자가 전한 설교에 대해 이성적, 경험적 행동을 취하였다. 이렇듯, 성서가 지금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설교의 기초와, 교회공동체에 읽혀지는 이유는, 성서가 단순히 문자적 해석에 머무르고, 교회공동체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믿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상에 따라 설교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교회공동체의 복합적 지식활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각 시대마다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일이 늘 새롭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신학은 탄생되었고, 다양한 신학들은 설교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설교와 신학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Ⅴ. 설교와 신학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제 이 질문을 해결할 때이다. 우리가 앞서 했던 질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면, 여기서 논하는 질문들 그 자체가 신학적인 활동이고, 이미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신학적인 마인드를 형성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분리적인 일에 집착했다. 그러기에 앞서 열거된 질문들은 앞으로 우리의 신학적 사유에 있어서 새로운 장(場)을 열어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정통주의(orthodoxy)와 자유주의(liberalism)에 대한 신학적 논쟁도 냉철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서를 해석 할 때, 관점의 한 부분만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혼합하며 성서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분리하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성과 지성의 활동 속에서 판단되어져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작업이, 설교와 신학의 이상적인 관계를 찾는 실마리가 된다.
1. 설교는 신학적 작업이다.
하나님을 믿고, 종으로서 부름 받은 삶을 살려는 우리에게 있어서 마음의 올바른 기능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며, 믿음 안에서 그 계시를 향해 확신 있게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잠언에서 언급한 것 같이 매우 중요하다(잠 4:23).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 하나이고, 마음의 기능을 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을 팽개쳐 버리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이고, 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리 역시 중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올바른 기능이 신학적 작업의 원동력이다. 오늘날 우리의 세대에 있어서 회의 주의와 윤리적 혼란, 오해와 편견 등 사상적 안개가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안개를 헤치고 복음의 빛을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앞서 예로 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위대한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입장을 검토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정신적, 사상적, 사회적 입장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가를 보여주며, 어떤 지적 장애물이 다가와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음을 증명해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를 위한 신학적 작업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어떻게 보면 성서의 대부분은 이런 신학적 작업 속에서 이루어진 설교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현대 설교와 교회공동체를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대안은 이러한 신학적 작업이 구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설교와 신학의 관계성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다. 성서 저자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신학적인 담론보다는 그 자체로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신학적인 담론은 교회공동체 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지나치게 논쟁에 빠져버린다면 우리는 믿음과 성서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논쟁에 빠진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적절한 논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적절한 논쟁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논쟁할 수 있을 만큼의 성서적, 신학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의 예를 통해 신학이 설교에 미치는 영향력을 찾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7-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존의 율법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전통적이라는 것을 유대인들과 논쟁을 통해 설교하신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그 당시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복음의 본질과 능력을 적절한 논쟁으로 설교한다. 어떻게 보면, 신약의 서신서들은 대부분은 교회공동체 내, 외적으로 일어나는 논쟁에 대한 설교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 해석되어지고, 그 의미가 약해지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신학적인 사유와 영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했고, 그리스도론과 성서의 진정성을 위협하는 교회공동체와 이방인들에게 적절한 논쟁으로 맞섰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교리와 성서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한 예리한 이해를 지닌 동시에 그들 속에 있는 잘못된 것을 파괴하고. 그 속에 올바른 교리와 성서의 이해를 새로이 세우는 해결책을 제시하여 열정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논증을 시도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쟁은 복음에서 적절히 필요하고, 설교에서 신학적 작업은 앞서 지적한 교회공동체와 비 기독교인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논쟁을 일으키는 대상보다 더 많은 성서적 지식과 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2. 빈곤한 설교는 빈곤한 청중을 만든다.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에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의 설교는 빈곤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상황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지만, 청중들에게 문제의식을 갖게 하지 않았고,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청중들이 원하는 설교가 있는데도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관심과는 다른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의 청중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고민을 해결 줄 설교에 목마르고, 그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교회공동체에서 이탈하거나 무감각한 교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열거하는 문제들은 기독교계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천국의 확장 대신에 성서적이 않은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볼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사업을 세상의 직업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명’(召命)은 교회공동체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모든 직업에 적용되기 보다는 오히려 목회 사역에 적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 예술적인 분야에서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분하는 작업과 창조와 구원의 위험스러운 분리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에이즈(AIDS) 환자들에게 숙박시설을 만들어 주는 일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세세한 점에 대하여 뭇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발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민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된 세상의 일과 관심은 복음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 사역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그와 동시에 천국을 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리스도가 재림하게 되면, 질병과 시대에 고통 받는 자들과 교회공동체의 수많은 신앙적 고민들을 우리가 돌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까지 이 일은 필요한 일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오늘 여기에 계셨다면 그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적인 것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특별한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믿는 자들과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설교였고, 신학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신학을 설교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지식 있는 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긴다면, 매우 큰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의 말씀을 따르고 그리스도처럼 설교해야 한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Ⅵ. 결론 : 신학적 설교는 기독교의 새로운 변증이다.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유대인과 같이 된(became like a Jews) 것은,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려고 한 이유였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더라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고전 9:20).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설교가 허공에 흩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으며, 눈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자신이 있어 하는 청중들이 아니라면 활기차게 설교할 수 없다. 유년부에서 설교 했던 설교자는 청년부에서 설교할 수 없고, 청년부에서 설교했던 설교자는 장년부에서 설교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은, 우리에게 있어서 큰 과제이다. 바울은 그가 누구를 대상으로 설교하든지, 막힘없이 가능했다. 바울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자들은 그들이 어디서 설교를 하든지, 심지어 그냥 자신이 써온 설교 원고를 읽기만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다가가는 길로 어느 도로를 사용할 것인가의 대한 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우리의 설교가 불특정한 대상을 향한 외침이면 허공에서 떨어질 것이 분명하고, 어느 한 대상만을 위주로 설교한다면 우리의 설교의 능력은 그 대상에게만 능력이 있다. 생각해보라. 전쟁 중에 총을 들고, 적을 향해 조준하지 않고 난사한다면, 아까운 총알을 낭비일 뿐이다. 또한 총은 적의 졸병을 죽이든, 대장을 죽이든 총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이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적 설교가 지향하는 변증이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인간의 실존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삶의 문제, 그 문제에 발생되는 수없는 질문과 요청에 관심을 기울이고 성서에 기반을 둔 신학적 설교를 해야 한다. 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왔고,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겪은 답들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이것들을 면밀히 살피면서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처해 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들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우리에게 목마름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물로 주어야 한다.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기도 하신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분별 하는 눈이 없다면(롬 12:2), 신학적 사유는 고리타분한 탁상공론이고 오늘을 사는 청중들의 언어와 감성에 걸 맞는 설교를 할 수 없다.
성서적 설교는 기본이다. 여기에 신학적 설교가 가미된다면, 우리는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고, 교회공동체와 사람들의 관심은 곧 설교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우리는 그들보다 많은 지적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열망하는 영성생활 역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로 세움 받은 우리들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신학적인 작업을 통해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로 인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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