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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전 단지 선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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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전 단지 선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EAST-TIGER 2020. 12. 31. 09:24

 

 

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오래전에 보고 이번에 다시 보았다. 오랜만에 보니 영화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고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원작은 영국 소설가 Anthony Burgess의 <A Clockwork Orange>이고, Stanley Kubrick 감독이 각색을 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영화의 주제와 연출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첫 개봉된 1971년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컬트 영화였다. The Beatles와 Hippie 문화가 관통했던 60, 70년대를 사는 전후세대, 특히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일진" 영국 남자가 할 수 있을 법한 생각과 행동들은 무엇이었을까? 뭔가 좌충우돌식 코미디 영화가 생각날 수 있겠지만, 그 영화의 감독이 Stanley Kubrick이라면 그 생각과 행동들은 묵직한 사회 문제들과 결합되어 있고, 그 문제들에 대한 감독의 생각들과 태도를 영화에서 볼 수 있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 알렉스와 내 세 친구들."

 

이 영화는 2시간이 넘는 분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로 뒤덮여 있다. 그 범죄는 말 그대로 불법이지만 불법처럼 보이는 합법도 포함된다. 초반은 알렉스와 그의 친구들이 저지르는 불법이다. 마약, 노숙자 폭행, 패싸움, 무단침입, 성폭력, 살인이 차례대로 등장하고, 함께한 친구들의 배신으로 알렉스 혼자 경찰에 잡혀 구속되고 재판에서 14년형을 받았다. 교도소에 입소한 알렉스에게, Stanley Kubrick 감독의 다른 영화 <풀 메탈 재킷>에 나왔던 Hartman 중사 같은 교도관이 나타나서 합법적인 통제와 훈육을 했고, 개신교를 믿게 된 알렉스는 불량학생에서 국가가 바라는 사회 구성원으로 점점 교화되는 듯 보였다. 2년을 복역하던 중 어느 날, 알렉스는 정부 주도로 개발 중인 약물치료 교화 프로그램 "루드비코"를 알게 되고, 2주 동안 그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출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지원한다. 알렉스는 2주 동안 "파블로프의 개" (Pavlov’s Dog)처럼 외부 자극에 따른 조건반사를 하도록 약물치료와 세뇌 기법을 받는다. 

 

 

 

"폭력은 아주 끔찍한 거야. 그걸 배우는 거지. 몸이 배우는 거야."

 

인간의 자유가 제한 없는 인간의 모든 행위라고 정의된다면, 법과 제도는 그 자유를 제한한다. Thomas Hobbes의 주장대로라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반응들을 보인다는데, 극단적인 면이 있지만 인간들이 자유를 남용할 때 또는 한 사람이 자유를 독점할 때 벌어지는 일들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에, 아주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법과 제도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그 자유의 남용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매일 사회 어디선가 범죄가 벌어지기 때문에, 교도소에 범죄자들이 아예 없는 날은 아마 없을 것이다.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범죄의 원인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Thomas Hobbes가 가정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심이, 법과 제도가 있는 상태에서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서와 사설 보안업체에게 휴일은 없다.

 

영화에서 알렉스의 범죄는 명백하고 그가 14년 형을 살고 출소하더라도 재범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만기 출소를 할 바에, "루드비코" 교화 프로그램에 2주간 참여하여 출소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 것도 맞다. 그래서 수감자 알렉스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자유는 합법적으로 제한되었다.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도덕적 판단의 자유가 약물과 심리 치료, 또는 법과 제도로 제한될 수 있는가에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문가 집단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은 그들의 지식과 권위가 만들어 낸 맹신에 빠진다. 나는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들에서 예상과 다른 결과들이 나타날 때, 그 원인이 이러한 맹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출소한 알렉스는 자신의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수감 전 자신의 졸개들로 부렸던 친구들은 경찰관이 되어 알렉스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알렉스의 성폭행 때문에 자신의 부인이 자살했다고 믿는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 알렉산더도, 알렉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치밀하게 복수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중 처벌이 발생했지만 알렉스는 저항할 수 없었고, 저항했다면 "루드비코" 교화 프로그램은 그 순간 폐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알렉스를 이전의 알렉스로 되돌린 것은, "루드비코" 교화 프로그램의 실상이 언론을 통해 밝혀져 여론의 압박을 받은 정부였다. 그 정부도 알렉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알렉스에게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결국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폭력성과 이기심을 가졌다는 것과, 그것들이 법과 제도 또는 어떤 심리치료 프로그램들로도 제거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다. 출발점에서부터 크게 원을 그리며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득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루드비코" 교화 프로그램을 받았다면, 폭력 없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강제로 폭력성을 잃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래, 난 치료된 것이 맞아."

 

인간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기에 어리석고, 그 잘못을 극복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인간은 잘못과 극복이 교차하며 성장한다. 치료된 알렉스는 수감 전의 알렉스가 된 것이 아니다. 경찰관이 된 친구들과 자신의 범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에, 알렉스는 예전처럼 망나니 마냥 살 수가 없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이 "교화"라고 생각한다.

 

알렉스의 새로운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내무부 장관이 제시한 일자리는 알렉스를 이용해 정치적 선동을 하기 좋은 자리였을 것 같고, 최종적으로 알렉스는 정치인이 되었을 것 같다. 정치인 된 알렉스를, 경찰관이 된 친구들과 작가 알렉산더가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런 황당한 상황이 인류 역사와 개인의 삶에서 꽤 자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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