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世紀 Enlightener

[도망친 여자] "제가 상관할 것도 아니지만." 본문

內 世 上 /Cinemacus

[도망친 여자] "제가 상관할 것도 아니지만."

EAST-TIGER 2021. 1. 4. 10:40

2021년 새해 본 첫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019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과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영화상 등 여러 영화제에서 상들을 받고 있을 때,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24번째 영화 <도망친 여자>로 2020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3년 전 같은 영화제에서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배우 김민희가 여자 연기자상을 받았으니, 별난 심사 기준을 가진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근래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반갑다.

"만나면 안 해도 되는 말 해야 되고, 하기 싫은 짓도 해야 되고. 지겨워."

 

감희는 세 명의 친구들을 한 사람씩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만난다. 그녀는 집에서 번역을 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 강의를 하러 나가는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이후 5년 동안 남편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고 그것이 남편이 원하던 것이라며, 며칠 동안 남편이 출장을 떠나서 처음으로 떨어져 있게 됐다고, 만나는 친구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감희의 이 말은 만나는 친구들 간의 친밀도와, 전달되는 공간과 그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들려지고, 친구들의 반응들도 각기 다르다.  

 

감희가 처음 만난 친구는 영순. 영순이 이사한 뒤 오래 만나지 못한 듯 감희는 그녀의 새 집 앞에서 헤매고, 집에서 CCTV로 감희가 온 것을 본 영순은, 집에서 나와 감희를 맞이한다. 감희는 영순을 위해 막걸리와 고기를 사들고 찾아왔다. 그러나 영순은 술과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감희에게 말한다. 영순의 집에 머무는 동안 영순과 그녀의 친구 영지(이은미)가 하는 말들에 관심을 보이며 맞장구를 쳐주고, 본심인듯 본심이 아닌 듯한 말들을 하며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감희. 자기의 영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려는 그런 감희를, 친절하고 차분한 차가움으로 밀어내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영순. 이와 대조적으로 한밤에 자신의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26살 이웃 여자를 CCTV로 보면서, 영순은 감희에게 그녀를 짧게 소개하고 그런 그녀가 안쓰러운 듯 자신이 나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물끄러미 CCTV를 보던 감희는, 함께 담배를 피우며 이웃 여자를 안아주고 위로하는 영순을 보게 된다. 감희도 영순이 그렇게 자신을 안아주길 원했던 것 같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깬 감희와 막 화장실에서 나온 영순과의 대화.

 

감희: "언니, 나 못 믿죠?"

영순: "믿~지이이.. 왜 그런 소리를 해?"

감희: "그런데 왜 3층에 못 올라가게 해?"

영순: "미안, 너무 더러워서 그래. 잘못 생각하지 마아하.."

 

결국 "3층의 비밀"을 알지 못한 감희. 더 친해지려는 노력의 성과를 얻지 못한 감희의 허탈함과, 자신의 영역에 더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아직 허락할 수 없는 영순의 단호함이, 친절하고 따뜻한 그들의 마지막 대화에 배어 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감희의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한 영순의 말. "우리가 친했나?" 그 말을 들은 감희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동안 서로 술도 한 번 같이 마셔보지 못했고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었다던 영순에게, 감희가 사 온 술과 고기는 너무 전형적인 사교(社交)의 도구들이자 영순을 모른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왜 영순은 친하지도 않은 감희와 이틀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이 이상한 뒷맛이 불쾌한 인간관계를, 감희가 단호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나보다 언니한테 더 잘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이 색깔이 언니한테 얼굴에 잘 어울려." 

 

영순과 헤어지고 수영을 만나러 가는 감희. 수영이 이사한 새 집을 헤매지 않고 찾았다. 감희는 구입한 옷이 자신에게 맞지 않아서 가져왔다며 입어보라고 한다. 수영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이었고 입어보니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감희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은 수영. 둘은 거부감 없는 친근한 반말로 근황을 서로 물으며 점점 깊은 대화를 한다. 친하더라도 혼자 있던 집에 다른 사람이 오면, 그가 심심하지 않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하고 평소 잘 안 하던 행동들도 해야 한다. 귀찮고 신경 쓰이지만 그가 "괜찮아?"라고 물으면 "어, 괜찮아!"라고 말하며 참아야 한다. 감희는 그런 수영을 잘 알고 있는 듯 따뜻하게 위로하고 수영도 그런 감희가 좋다. 그때 26살 이름 모를 시인이 수영을 찾아온다.

 

시인: "도와줄 마음이 없나요? 네? 아니, 당신 정말 그렇게 잔인하세요?"

수영: "미쳤구나, 너? 너랑 나랑 무슨 상관있는데? 너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데에에? 정신 못 차려? 아, 정말 정신 못 차려? 이 병신 같은 새끼! 아후우.."

시인: "하아.. 한번 더 해보세요. 저번처럼 제가 좀 당할게요."

 

평소 가던 Bar에서 만난 시인과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게 된 수영. "흑역사"가 될 것 같아 수영은 그 시인과의 만남을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지만, 시인은 수영과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 둘의 대화를 Doorcam로 보고 들은 감희. 대화를 마치고 들어온 수영은, 감희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시인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이어지는 감희의 질문들도 막힘없이 답해준다. "아휴.. 세수라도 좀 해야겠다."라며 일어서는 수영을 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어, 나도 세수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감희.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창문을 너머로 보이는 시인의 뒷모습.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는 그의 걸음은 화가 난 듯 빠르고 힘차다. 아마 몇 번 더 찾아오다가 어느 순간 그만두겠지. 그나저나 위층에 사는 그 유부남을 언젠가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감희가 수영에게 자주 연락할 이유가 생겼다. 분명 그 남자와 잘 되면 수영은 감희에게 정식으로 그를 소개할 것이다. 그래서 감희는 그 남자를 지금 보지 않아도 괜찮다. 수영의 신중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혹시 잘 안 되면 수영은 언젠가 그 이유를 감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     

 

충동적 섹스는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귀결될 때가 있다.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보낸 즐거운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럼 친하지도 않은데 왜 나를 계속 만나주는 걸까? 왜 살다가 나는 그를 가끔 생각하고 찾게 되는 걸까? 언젠가 정리될 관계라면 서로 아프지 않고 좋게 끝내고 싶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친해질 기회가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언제일까, 그 기회? 내가 먼저 다가갔으니 이제는 네가 왔으면 좋겠다며, 괜히 막연하게 또 신경 쓰며 기다릴 때도 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말이라도 적게 할 걸. 언제부터 버릇처럼 말하게 된 말, "사람들 만나는 거 좀 피곤하긴 하지." 그러나 피곤해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본다. 도망칠 수 없다.    

 

창 밖에 산이 보이는 그림 같은 공간들에 사는 영순과 수영. 헤어질 때 감희는 수영에게만 "또 올게요!"라고 말했다.

 

"여기 있는지 몰랐네." 

 

우연히 영화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우진을 만난 감희. 오래전에는 친구였지만 전 연인과 결혼한 사람이다.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살다 보면 친구였던 사람을 가끔 이렇게 만난다. 만나게 됐다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냥 느껴지는 대로 말하게 된다. 누군가 그게 거슬리든 말든 어쩔 수 없다. 일단 1차원적인 문장들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그동안 못 만났던 이유들을 애써 합리화시키는 감희와 우진. 대화는 건조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혹시 너 나한테 할 말 있어?"라고 묻는 감희에게, "그냥 미안해."라고 말하는 우진. 그 말이 감희의 어딘가 강하게 박힌다. "정말 미안해." 카메라는 빠르게 우진의 옆모습을 줌인한다. 이제 둘의 대화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다. 울듯한 눈으로 감희를 바라보는 우진. 서로 오랫동안 닫혀있던 어떤 문이 지금 조금 열렸다. 가늘어진 눈으로 "괜찮아아.. 잊어버려."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또 우진에게 거짓말을 하는 감희. 그런 그녀의 손등에 우진의 손이 놓이고 어루만진다. "정말 미안해"라는 말과 함께. 이제 감희는 우진의 진심을 온몸으로 느낀다. "알았.. 어."라고 말하는 감희. 우진은 한번 더 "그래, 그럼 됐다."라고 말하며 얼른 손을 뺀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기에 여기서 서로 허물어져 울 수는 없다. "여기 정말 좋다."며 웃는 감희. 영화에서 감희가 있던 공간들이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고, 감희는 반복해서 그 좋음을 표현했다. 오래전에 친구였던 우진은, "지금" 감희의 친구가 되었다. 살다 보면 드물게 이런 일이 있다.

 

유유히 물결치는 바다에 단조 기타음들이 배경음악으로 들린다. 영화의 한 장면인지, 그게 영화 전체인지 모르겠는 영화 속의 영화. 흑백과 컬러 화면들이 대조를 이루며 익숙한 홍상수 감독의 언어가 보인다. 과거의 기억들이 갱신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면, 그 기억들을 공유하는 나와 사람,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그렇게 남겠지만, 바닷물이 같은 자리에서 늘 그대로가 아니듯이, 어딘가에서 다시 합쳐지고 다시 나눠지고를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바닷물은 계속 갱신된다. 사는 동안 계속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행복과 위로, 불행과 상처가 만남 속에 교차되고, 같거나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된다. 바다에는 우연이 없고 영원히 머무르는 것 없듯이, 이 세계도 그렇다. 태어났으면 언젠가 죽는다. 일터에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지만 기한이 되면 다시 일터 돌아와야 한다. 서로 다시 안 볼 것처럼 헤어졌지만, 서로 살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기도 한다. 출장 간 사이에 서로 잠시 떨어졌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늘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하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살아있다면 계속 경험하게 될 반복들 속에 차이들. 하아.. 피곤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감희는 우진의 사무실을 찾아간다. 기다렸다는 듯 과일들을 깎아 주는 우진. 영화를 보는 동안 빵을 먹었다며 감희는 한 입도 안 먹으려 한다. 그 말을 들은 우진은 굳은 표정으로 "원래 극장에서 뭐 먹으면 안 돼."라고 말하고, 감희는 살짝 웃으며 "어.. 미안."하고 대답한다. 그 순간 우진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우진의 남편이자 감희의 전 연인 성구가 같은 건물 지하에서 지금 북 콘서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남자들이 만나면 여자 얘기, 여자들이 만나면 남자 얘기. 이것은 홍상수 영화들에서 상수(常數)다. 우진과 감희로부터 신나게 까이는 성구. 그러다가 우진은 감희의 남편에 대해 물어보고, 감희는 영순과 수영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남편에 대해 말해준다. 이 순간만큼은 동기 우진과 감희 사이에 경계가 없다.  

 

우진: "그런 사람이구나. 성구 씨는 완전 반대인데. 근데 그것도 난 좋은 것 같다."          

감희: "너 그렇게 생각해?"

우진: "응, 부러워. 정말로."

감희: "아마 사람들은 너를 부러워할 거다."

우진: "하아.. 부러워하지 말라 그래.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희: "그래, 맞아."

 

감희는 손을 뻗어 과일 한쪽을 집어 먹는다. "맛있다."라고 말하는 감희. 영순의 집에서 영지가 깎아준 과일을 먹으며 말할 때와 다른 느낌이다. 빵으로 인한 배부름도 소화시킬 만큼 즐거운 대화였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받고 싶었던 모든 욕구가 해소되었다. 둘은 오늘 우연히 만났다. 

 

우진과 헤어지고 나가는 길에 성구를 만난 감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한다. "저도 이제 나이가 많이 먹었는데, 이렇게 뵈니까, 조금 어색하네요." 감희의 이 말에 성구는 "그래? 난 편한데. 아, 불편하구나."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는 감희. 계속 성구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을 감희가 한다. "옛날에 한 번 저한테 전화하셨죠?"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 야.. 정말 오래됐다."라고 말하며 담배를 태우는 성구. 이후 감희는 짓궂은 말들로 성구의 심기를 건드린다. 아.. 너무 익숙한 30대 중반 이후의 우리네 이야기. 오랜만에 감희를 보며 반갑게 말했던 성구의 말, "근데.. 너 왜 이런데 오고 그랬어?"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해변에 누워 자고 있던 영희가 들었던 비슷한 질문이다. 이 말에서 "왜"는 영어의 "How"처럼 들린다. "너 어떻게 여기 오게 됐어?"로 혹시 감희가 자기를 보러 온 게 아닌가 떠보는 듯한 질문이다. 하지만 대화 말미에 성구는 저 질문을 다시 감희한테 한다. 같은 말이지만 뉘앙스가 처음과 정말 달라진다. 여기서 "왜"는 영어의 "Why"처럼 들린다. "너 여기 왜 왔어?"로 질문이 아닌 화가 난 말이다. 전 연인을 오랜만에 만나 애틋한 느낌보다 불쾌감만 드는 성구. "뭐요?" 그 낌새를 바로 눈치챈 감희. 그제야 그 자리를 떠난다. 술 취한듯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한다. "저는 이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안녕히 계세요." 감희와 성구가 대화하는 동안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고, 차 지나가는 소리, 새소리가 들린다. 서로에게 서로의 말들이 무슨 소리로 들렸을까? 가끔 어설프게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가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은 그런 소리들 중 하나다. 정말 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들. 쿨하지 못한 사람의 유치한 복수. 이것을 위해 누군가는 관심 없는 듯 지대한 관심으로, 헤어진 상대를 그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냥 나타나지 않았으면 시린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 

  

건물 밖으로 나온 감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스마트폰을 보더니,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극장에 들어가 아까 봤던 영화를 다시 본다. 처음 영화를 보던 표정과 다른 심란한 표정. 처음 볼 때 느꼈던 바다의 평화로움은 없다. 지금 감희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있던 영희와 같다.

"사람" 또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어야 할까? 사람들을 만나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여(fall in Fall) 림보(Limbo)에 머물고 있는 감희 또는 영희 같은 사람들과 이 질문을 주제로 대화하고 싶다, 나는.

롱테이크와 투박한 줌인, 아웃 장면들의 반복 속에서 어떤 차이들을 느껴야,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 흥미를 가질 수 있다. 이전 영화들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중복되고, 그 내용들이 서로 겹치거나 이어져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대는 홍상수 감독의 팬이 맞다. 이 글을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