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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해라] "그냥 막 살아요, 우리. 네?"

EAST-TIGER 2020. 9. 2. 03:05

2002년 대한민국은 월드컵으로 떠들썩했었지만 스무 살의 나는 "주변인"으로 살았었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살았었다. 수능을 본 것과 월드컵 경기들 외에 별다른 기억이 없었던 2002년에, MBC에서 수목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방영했었다. 월드컵이 끝난 2002년 7월 초였으니 18년 전이다. 방영 당시에 본방으로 본 적은 없었고 가끔 재방으로 보다가 말다가를 했었다. 방영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명작"으로 평가되었지만, 내가 볼 때는 크게 공감할 수 없었던 드라마였다. 죽을병에 걸린 남자와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두 여자. 그 남자는 이 여자들을 당기고 밀어내기를 반복한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상한 순애보였다. KBS 드라마 <가을동화>와 비슷한 설정에 송혜교가 양동근으로 바뀐 느낌도 들었다. 

 

드라마 내용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남운수 129번 버스. 이 버스의 종점 근처가 우리 집 근처였다. 신정 7동을 시작으로 강서구, 홍대, 신촌, 이대, 아현, 광화문, 시청, 서울역을 지나가던 버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MBC가 드라마를 제작할 때 한남운수와 계약을 맺어서 다른 드라마나 시트콤에서도 나왔다고 하던데.. <네 멋대로 해라> 말고는 기억에 없다. 

 

2020년 독일에서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유희열의 <All That Music> 때문이었다. 2002년 9월 초에 드라마가 종영한 후 10월 1일 자정에 첫 방송을 시작한 MBC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이자, <음악도시> 이후 유희열의 심야 DJ 복귀로 화제가 되었다. 자주 듣지는 못했지만 들을 때마다 평소 음악 프로그램에서 들을 수 없었던 음악들을 소개해줘서 유익했다. 8월부터 Youtube에서 찾아 간간이 듣고 있다. 여기서 유희열이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한 짧은 감상평들을 했었고, 듣다 보니 "그랬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보게 되었다.   

 

DVD 감독판으로 보았다. TV판과 DVD 판이 조금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TV판에서 볼 수 없었던 추가 장면들이 있는 DVD 판이 좋다. TV판은 어쩔 수 없이 여러 배경음악들이 자주 흘러나오고 가끔은 배우들의 대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DVD판은 배경음악이 아닌 현장음으로 수정된 장면들이 많았다.    

  

다시 보니 여러 가지가 보이고 느껴진다. 18년 동안 몇 번의 연애들과 삶의 경험들이 누적되어 보는 것 이상으로 드라마의 내면들이 보였다.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시한부 삶, 사회적 계층 차이, 가정불화, 물질 만능주의 등, 한국 드라마에서 나올만한 거의 모든 소재들이 등장한다. 언급된 소재들이 세련되게 표현되었지만, 설정상 "막장 드라마"라고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 

 

드라마 초중반은 돈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1회부터 복수의 아버지는 3년만 참으라고 하며 복수를 보육원에 맡기고 지폐 중간에 노란 테이프가 붙은 만원을 주고 떠난다. 이후 복수는 소매치기범으로 2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고 다시 소매치기범으로 살아간다. 미완성 밴드의 키보디스트 경이도 밴드 보컬의 수술비를 위해 앨범 제작비로 모은 돈을 인출하고 그 돈을 복수에게 털린다. 복수는 그 돈을 이혼한 어머니에게 주고, 복수 어머니는 그 돈을 계모임에서 떼인다. 이 사이사이에서 경이는 복수를 미워하다가 이해하고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중반 이후부터는 복수와 경이의 로맨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 중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은 복수의 아버지가 복수의 병을 알자마자 자살하는 부분에 있다. "이해는 되지만 꼭 그래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드라마는 에피소드 전체보다 중요 장면 (Scene) 들만 따로 볼 때 더 감동적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명대사, 명장면들이 있고 내용을 요약하기 때문에, 그것들만 봐도 드라마 전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1회부터 복수와 경은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만나지만, 6회에서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된다. 작가는 복수와 경이를 한 인물이 다른 두 장소에 있는 듯 묘사한다. 말, 행동, 생각, 주변 환경, 심지어 다쳐도 비슷한 신체 부위  등등.. 그것들이 우연한 같음이 아니라, 복수와 경이만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어준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세계관이 같다."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들로 생각들이 교환되고 그 차이들이 극복되는 것을 보면서, 성장형 연애 드라마 같은 느낌도 든다.

 

2002년 1월에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와 7월에 방영된 <네 멋대로 해라>는 묘한 대구를 이룬다. 나쁜 남자계의 양 극단에 한기와 복수가 있는 것 같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두 남자의 표현방식들은 완전히 다르다. 이 다름에서 한기는 이해할 수 없고 파렴치한 나쁜 남자로, 복수는 마냥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남자로 묘사된다. 이 나쁜 남자들은 공통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삶들을 돌이킬 수 없게 망쳤다.   

 

 

경이가 복수의 뇌종양을 3회 때부터 알았다면, 경이가 자신의 친구를 간접적으로 죽인 복수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미래는 그런 복수를 위해 무엇이든 했었을 것 같다. 경이와 복수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된 것이 6회이고 경이가 복수의 병을 알게 된 것이 16회인데, 이때는 경이도 미래만큼 복수에 미쳐있었다. 사랑이 가진 강력한 힘은, 함께라면 그 사랑을 방해하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거나 저항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초월적인 힘 같은 것이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에서부터 "다가올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결단까지 이어지는 이 과정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이상하고 신비한, 하지만 귀찮고 통속적인 과정이 인간의 괴로움이자 즐거움, 불행과 행복이다.  

 

개인적으로 배우 이나영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작년에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오랜만에 이나영의 연기를 볼 수 있었지만, <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전경"은, 배우 이나영이 가진 거의 모든 가능성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캐릭터였다. 풍부한 감수성이 사랑스러운, 확실한 취향으로 당돌하지만 순수한 여자. 많은 작가들과 영화감독들이 그런 캐릭터를 생각하며 각본을 집필했고, 이 드라마 이후 이나영이 출연한 작품들도 "전경" 캐릭터의 확장 내지 주석 같았다. 이 캐릭터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2005년 이후에 출연한 작품들에서는 "전경"스러움이 점점 사라졌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다시 보고 있다.   

 

배우 공효진의 배역과 연기도 너무 좋았다. 4회 이후부터 우는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 당차고 진취적 "미래"가 이상하게 비련의 여자처럼 보였다. 복수 스스로 경이보다 미래와 결혼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래는 남자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여자이다. 공효진이 이 드라마에 출연한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보다 이후의 행보가 대단할 수 있었던 것은,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에서 혼자서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 스스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와 배역을 알고 있다는 것이 죄대 장점이다. 이제는 익숙하고 가끔은 식상하게 보여도 관객들은 그런 공효진을 기대한다. 그래서 단순히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배우로서 공효진의 커리어와 현재 그녀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흥미롭게도 장진 감독은 돋보이는 "눈"으로 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공효진을, <아는 여자>에서는 이나영을 캐스팅했었다. 

   

극 중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레지던트 의사이자 스턴트맨 "우찬석". 이런 친구 한 명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이 배역을 맡은 배우를 인터넷에서 찾았고, 권형준 또는 권재환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인들 간의 진한 키스보다 서로 손잡고 걷는 모습들이 많은 드라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모습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는다. 보고 싶은 마음과 기다림의 즐거움. 둘 중에 누군가 "그럼.. 졸릴 때까지만 기다릴게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시간 약속으로 싸울 일도 없었을까? 서로가 가진 최고의 모습부터 밑바닥의 모습까지 사랑했다면, 못 본 지 3주가 지났을 때 누군가는 마음이 아프고 목이 따깝고 머리가 없어졌을까? 둘 중에 누군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정말 싫어질 때, "우리 지금부터 진짜로 여자, 남자로 같이 살아요."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그러려니 함께 살아야겠다. 서로가 가진 사랑의 조건들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쓰는 사랑 표현들 간의 소통과 그 해석이다.    

 

드라마 전체를 감도는 여름 느낌이 좋다. 

 

언젠가 누군가와 다시 보게 될 드라마다. 그때는 또 다른 느낌이 들겠지. 가끔 개인적인 생각들을 이 드라마의 Clip들과 연관해서 Blog에 남길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한 감상은 이 글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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