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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보통사람들의 꿈과 이상은 보편적이다

EAST-TIGER 2020. 6. 10. 02:18

 

대학교 1학년 때 방송국 선배로부터 생일선물로 파트리크 쥐스킨트 (Patrick Süskind)가 지은 <향수>를 받았었다. 독일문학의 색다름을 느꼈다는 선배의 말에 집에 돌아와 거의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기발한 발상과 향수라는 의미 본질 이상의 역할이 나를 굉장히 흥분하게 했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팬이 될 수밖에 없는 훌륭한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우연히 부대 도서관에서 발견한 <콘트라베이스(Der KontrabaB)>는 그의 문학세계와 역량을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드보르작의 5중주 곡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야나체크의 것도 괜찮지요. 아니면 베토벤의 8중주 곡도 썩 좋습니다. 더 나아가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곡「숭어」라는 것도 좋지요 슈베르트의 곡은 콘트라베이스 주자라면 누구나 연주하기를 꿈꾸는 곡이지요......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은 제게는 한결같이 너무 고상하고 먼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저는 큰 관현악단의 일개 단원일 뿐이니까요.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앞에서 셋째 줄에 앉는 연주자입니다. 맨 첫 줄에는 독주자가 앉고, 그 옆에는 독주자의 대리인이 앉습니다. 그런 다음에 일반 단원들이 앉지요. 실력 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도표에 의한 서열상 그렇게 앉아야만 되는 겁니다. 오케스트라 하면 상상이 되시겠지만,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주기 위해서 엄격한 수직적 조직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사회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집단이 그렇게 하는 거지요.   <61p~62p>

 

첫 페이지를 넘기고 초반부 정도 보았을 때 상당히 지루함이 있었다. 극본 형식의 구성은 개인적으로 취향에 잘 맞지 않는다. <파우스트>나 <햄릿> 등 셰익스피어의 책들도 책으로 볼까 하다가 공연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주인공의 음악적 지식과 취향에 대해 논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면에 담긴 독백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유명 오케스트라에 연주자라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라 생각하는데 주인공은 오케스트라는 사회의 수직적인 체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어디서나 규칙과 사항들이 있듯이 뛰어난 연주자가 있든, 성악가가 있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네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조금 더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동급이든 상급이든 자신 밑으로 두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지켜 성실히 수행하기는 열정 많고 근성 있는 사람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영웅이 되고 귀족이 된다면 그만큼 불평등한 세상이 없을 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곳에서 역할과 수행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제가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저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질투라는 것은 제게 아주 낯선 감정이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공정한 것이 무엇인가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악 분야에서는 몇 가지가 정말로 불공정합니다. 독주 연주자에게는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지는 것이 상례고, 관중들은 박수를 칠 수 없게 되면 마치 무슨 벌이라도 받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박수갈채는 지휘자에게도 쏟아집니다. 지휘자는 악장의 손을 적어도 두 번은 쥐고 흔듭니다. 대개의 경우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런데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미처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 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시각으로 살펴보아도 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케스트라의 구성을 인간 사회의 모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계에서나 그 세계에서 쓰레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기 마련이지요.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세계는 인간 사회보다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에서는 -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 언젠가는 나도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가서 꼭대기에서 내 밑의 벌레 같은 것들을 내려다볼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63p~64p>

 

오케스트라로 보는 주인공의 시각이 흥미롭다. 오케스트라의 수직적인 구조 속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부조리는 사회에서도 예사는 아니다. 무대 앞에 관중들을 위해 무대 뒤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이 있고 한 기업을 대표하는 자 뒤에는 엄청난 종업원들이 버티고 있다. 모두가 축하받을 수 없고, 모두가 기쁠 수 없는 현실에, 나 역시 주인공과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여러 번 다짐하고 기대하지만 그 언젠가는 무척 힘든 노력과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것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마찬가지라 본다. 그 노력과 기다림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 저는 제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범주에서 최대한도로 남들 보기에도 정말 멋들어진 연주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죠. 하나의 시험이 되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제가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것이 그 여자의 귀에 느껴져서, 단지 저 때문에 뒤를 돌아본다면, 세라는 영원히 제 인생을 함께할 여자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럼 모든 것을 끝장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른바 애정행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미신적인 면이 있는 겁니다. 그 여자가 뒤를 돌아보지 않더군요. 제가 멋진 연주를 하기 막 시작했을 뿐인데, 그 여자는 감독의 손짓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런데 사실 어차피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그 누구도 받지는 못했습니다. 지휘자에게도 그랬고, 바로 제 옆에서 연주하던 베이스 제1 주자인 하프 핑거에게도 그랬습니다. 그 연주자에게조차도 제가 얼마나 멋들어지게 연주하는지가 느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85p~86p>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주인공과 동화되어 가는 것 같은 나를 발견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하는 역할이나 일에 대해 최고의 컨디션으로 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왠지 하던 일이 잘 풀려 뚜렷한 성과를 얻어 상관이나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고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은 그런 어떤 날. 나는 얼마나 그런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꿈꿔왔던가.. 하지만 이런 나를 몰라주거나 그저 평범하게 생각해줄 때는 상처 입거나 시험, 우울증에 빠진다. ‘왜 나를 몰라주는 것일까?’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 타인으로부터 ‘나’라는 존재감이 없거나 약하다고 느꼈을 때의 기분은 그것을 느낀 사람만이 안다.

 

...... 제가 오늘 밤 공연을 망쳐놓고, <세라>라고 소리 지른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죠. 그것은 그야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이 될 테니까요. 수상이 배석한 자리 앞에서 그런다면 말입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만천하에 알려질 테고, 저는 파면당하겠죠. 공수래의 입장으로 되돌아갈 겁니다.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괴성 때문에 말입니다. 어쩌면 큰 사건이 터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잘못 오인하는 바람에요. 순간적인 반응이 그렇게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그 사람이 실수로 객원 지휘자를 쏠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무슨 일이든지 분명히 일어날 겁니다. 제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겠죠. 제 일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될 겁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을 했음에도 불고하고 세라가 저한테 오지 않은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는 저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의 경력이나 인생길에서 저는 언제나 에피소드로 남게 될 테니까요. 그것이 말하자면 괴성을 지름으로써 얻게 된 효과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저는 감독과 마찬가지로 잘리겠죠...... 파면당하는 겁니다......   <101p>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도 약 8년 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 지금도 그녀의 이름을 듣거나 소식을 접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된다. 그녀와 가까이 있던 시절. 그녀 앞에서 온갖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유치한 짓을 마지않았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살신성인’(?)하여 돕고, 돕고 싶었다. 미덥지 않은 주술을 걸어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결국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내 마음의 사람으로 남았다. 용기는 진정 사용되고 실천될 때 용기라 했던가. 나는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부끄러움이 용기보다 컸던 시절, 말 한마디보다 사랑의 눈빛을 더 신뢰했던 시절, 지금처럼 쿨하고 털털했던 사랑이 아닌, 순수하고 고결했던 사랑으로 알았던 시절.. 늘 내 일기장에 한번 이상 이름을 적었던 그 이름.. 그녀는 내 인생의 큰 에피소드가 되었고 지금의 내 감성을 만드는 초석이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많이 달라져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것에 부정할 수 없다. 가끔.. 그녀가 생각나면 나는 메일을 보낸다.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모노드라마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콘트라베이스>. 쥐스킨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자부심과 애환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의 바람과 이상을 유쾌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나 희망사항들은 대개 서로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것이라 본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회.. 비록 현실에 충실하여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우선적이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힘이 현실의 냉혹함과 고달픔을 이길 수 있는 위로가 된다. 처음 읽기 전부터 기대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문학적인 재능과 세계를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기뻤고, 특히 극본가로 활동했던 그의 역량이 드러나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콘트라베이스> 연극을 보고 싶어 졌다. 

 

2007.02.1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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