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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궤도를 수정할때]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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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궤도를 수정할때]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EAST-TIGER 2020. 6. 10. 08:24

 

부대 도서관에 있던 책이다.

 

휴일 날 부대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한 고든 맥도널드의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는 군대 내에서 여러 가지 일로 고심하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긴 파견을 마치고 자대에 돌아왔고 이제는 전역을 앞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도 중요했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내게 이 책은 내게 상당한 영감을 주었다. 여담이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주인은 동갑내기 1년 선임(아버지 군번)의 책이었다. 이등병 시절. 주일이면 같이 교회를 나갔고 그 선임병은 성가대로 봉사도 했었다. 2005년 12월. 선임병이 전역할 때 나는 이미 장기간 파견을 나가 있어서 보지를 못해 아쉽다. 벌써 전역한 지 1년이 넘어가는데.. 그 선임병과의 추억이 책을 보는 도중 떠올랐다. 


고든 맥도널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인생에 궤도를 수정한다는 것에 대한 3가지 척도를 세운다. 바로 ‘떠나라, 따르라, 뻗어나가라’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 ‘떠나라’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나 목적 없는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고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 속에서도 ‘따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자손의 조상이 되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알 같은 자손들이 생겨나 ‘뻗어나가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룩된 것이다. 고든 맥도널드는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신앙을 통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과 믿음을 논하고 있다.   


믿음의 각성, 영혼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는 성경적인 사람들은 이런 개념 - 때로 중생이라고 불리는 - 이 사실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아브람에게서 시작한다는 점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아브람이 만일 자기를 초월한 음성(“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곧 이전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강권한 그 음성을 듣지 않았다면 결코 우르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합리성과 제정신 상태를 나름대로 규정해 놓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는 초월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놀림감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개념에 식상해하는 이유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과 의견을 초월적인 음성으로 합리화하는 사람들을(“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이 내 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름 받은 사람이므로 내 의견은 옳고 여러분의 의견은 모두 틀렸소”, “이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멋진 요트가 아닙니까?”) 우리는 의심하곤 한다.   <96p> 


고든 맥도널드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의 그 시작에서 신비한 체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현재 우리 시대에서 신비한 체험(특히 종교적)이나 이상(異象)을 봤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대는 성경적으로 아무리 기적과 예언이 난무하더라도 대중들의 큰 변화를 보기에는 어렵게 보인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이런 신비감과 초월성에 익숙하며 공공연하게 점술문화와 역술이 만연하다. 안타까운 실정이지만 기독교의 믿음과 신앙은 이런 세태에 악용되거나, 분별없이 사용되어 기독교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만약 이 시대에 아브라함이 태어난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광신도나 정신병자로 규정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삶에서 선천적인 고상함이란 거의 없어 보인다. 그 말은 어느 날이든 그들만 홀로 남겨지면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 더 어두운 쪽을 택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더 높은 지경으로 올라간 적은 드물다. 불평하기, 다른 신들 좇기, 절망감에 빠지기, 가능하면 남에게 책임 전가하기 등. 이런 것들이 광야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보여 준 성격인 것 같다. 이것이 그들의 결핍된 성품이다. 곧 더 월등한 수준으로 부름 받지 않는 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 부름이 종종 있었는데, 그것이 그들은 큰 재난에서 구해주었다. 거듭해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일으키셨고 그들은 잠시 동안 이스라엘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기만 하면 임박한 재난이 역전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인물을 일으키지 않으신 때가 왔고, 이스라엘은 연료가 바닥났다. 이어서 치욕과 징벌로 얼룩진 끔찍한 시대가 뒤따랐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단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그들이 계속 살아남을 것을 약속하셨다.   <191p~192p>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사상과 실제로 현재도 그런 주장이 있다는 것에 공감하는 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무 많은 축복을 하셨고 지금도 흔히 ‘유태인’이라는 인종은 세계 어디에서나 인재로 통한다. 더구나 멸망과 회생을 반복하는 민족이 지금까지 유지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거대 제국이었던 이집트와 로마를 위협한 민족이라면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자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신 의지였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많은 부러움과 관심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비추어 우리를 볼 때 별반 다른 게 없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우리를 아들을 통해 구원을 하셨고 지금도,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돌보시며 회복시키신다.


이제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주장을 하겠다. 이는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놓치는 부분이다. 물론 고의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다른 데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회심시키기도 전에 세상을 회심시키려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전자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후자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회심에 먼저 주의를 기울인다면 남을 회심시키는 사역을 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좀 더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빌 2:12)   <194p>


고든 맥도날드의 이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어떻게 보면 그 중심에 내가 있지 않나 싶다. 종교라는 게 이상한 것이, 나 자신도 구원을 못하면서 남들을 전도하고 종교에 끌어들이기에 바쁘다. 이성 있는 설득이 아닌 본능과 인정에 의한 설득은 결국 둘 다 구덩이로 인도하는 꼴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믿음과 신앙 속에서 구원이 되어있는가? 이 문제에 자문하여 자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형식적인 대답이 아닌 확신과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한 사람에게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현시대에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름대로 여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성경적으로 대책을 내고 강구하지만 이는 현재 기독교에 해결이 쉽지 않은 강력한 문제이다. 


악이 인간세계에 칩입했을 때 사람 상호 간뿐 아니라 개개인 속에서도 굉장한 분열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우리의 ‘나’는 조화를 이루지 않고 서로 반대하는 많은 자아가 된 것이다. 그 시점 이래 우리 각자는 좀처럼 서로 맞지 않는 태도와 동기와 목적을 지닌 여럿 -하나가 아니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문제점이다. 우리는 많은 자아를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나와 가까운 세계에서 통합되고 완전히 정돈된 인격체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견하는 것은, 엄마로부터 항상 도망치는 아이처럼 나의 일부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다.   <197p>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죄에서 자유 할까? 나는 죄를 질 위기나 상황이 닥치면 내 귀속에서 요셉의 말이 맴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지만 나는 죄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다. 우리 안에는 많은 자아가 있다. 다중인격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내 안에는 또 다른 ‘나’가 너무 많다. 나는 가끔 심심풀이로나 과학적으로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규명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규정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안의 여러 자아들과 대화를 하게 될 것이고 천사와 악마는 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나는 오늘도 소망한다.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날을.


고든 맥도날드의 믿음에 대한 설득력이 깊은 이 책은 혼란했던 나에게 청량감을 주는 역할을 했다. 그가 말하는 하나하나가 실로 원론적이면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결심하여, 아브라함이 자신의 안정과 위안을 버리고 믿음을 택해 결국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우리의 인생 여정에 비추어 봄이 요구된다. 과연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나 사람들은 어떤 여정을 가고 있을까? 해답은 성경 속에 있다.

 

2007.02.0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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