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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 세계와 이스라엘 종교] 종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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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 세계와 이스라엘 종교] 종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EAST-TIGER 2020. 6. 6. 00:34

 

 

최초의 인간이 본 세상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나고 생겨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미륵 불교에서는 벌레에서 나왔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여 창조론을 믿으며, 진화론자는 동물로부터의 진화를 이론으로 제시한다.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최초의 인간이 이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바라보는 눈에 세상처럼, 신기하고 경이로웠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섭리에 심적 불안감과 공포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종교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강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강의 범람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강에는 정령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고, 제사를 드리며 강의 정령이 자신들의 생명과 기업을 해하지 않도록 바랐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은 한 해 농사가 잘되고, 풍년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적당한 비가 오지 않거나, 땅이 가물게 되면 그들의 생명과 기업이 위태롭게 된다. 이는 하늘과 땅에 정령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며 신에게 자신들의 생명과 기업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와 상황들은 그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근거였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위협하고, 기업의 재앙이 되는 근거이기도 하였다. 이는 고대 인간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몇몇 철학자들과 과학자들 주장하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말과 정신적 불안감으로 인해 신을 만들었다는 말이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종교와 문화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복잡한 사회가 되고, 첨단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들이 자연과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궁금증은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와 문화는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있으며, 비논리적인 구조 속에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생각하고 이 책을 본다면 고대 근동의 세계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관심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 세계의 이해의 중요성


고대 근동 세계를 대략 주전 3000년경으로 이해할 때, 이스라엘의 지리적 위치인 팔레스타인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있다. 고대 근동 세계를 지배했던 두 문명 사이에 있던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이 두 문명의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성서를 보면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성서의 무대가 되는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와 사회가 가지는 특징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서를 무작정 현시대에 비추어 보거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 있다. 특히 지정학적인 위치는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주변 나라와 환경의 사상과 문화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 문화 등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배경이 된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인해 많은 주변 국가와 왕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근거로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할 때까지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의 나라들이 언어, 종교, 제도적인 측면에서 관계성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와 아시리아, 바벨론과 이스라엘은 체계적인 종교의식들과 제사 제도와 성직자 제도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신전들은 왕들에 의해서 아름답게 건축되고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쓰는 히브리어는 고대 셈어인 아카 드어 그리고 아람어와 같은 언어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언어적인 유사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이스라엘의 다양한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가 된다.

 


고대 신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대 근동에 살았던 인간들은 지금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계의 질서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언제나 조절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대상이었고,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이기에, 고대인들은 자연을 우려와 근심, 불안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물들 뒤편에 숨어있는 신들을 자신들과 소통 가능한 현장으로 끌어내 오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자연물 배후에 있을 것이라 여긴 존재들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들을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안전한 ‘세계’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방식 내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의례를 행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대인들은 가급적 자신들이 사고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고, 설사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능력으로 이해되길 원했다. 그 외에도 고대 근동을 통치했던 영웅과 왕들의 무용담을 신격화하고, 일반인들과 다른 특별함을 부여하여 신적 권위를 줌으로써 신과 인간 간의 소통을 꿈꾸었다.


이러한 도구로 사용된 신화는 인간이 가지는 고도의 상상력이 집약된 문학이다. 그래서 신화에는 당시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인간 이해와 살았던 전통양식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신화를 통해 당시 고대인들이 가졌던 생각과 고민들을 이해할 수 있고, 신화가 상징하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우선 우리가 고대 신화들을 이해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대 신화들은 지금이 아니라, 무척 ‘오랜 전’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신화는 세상의 처음에 대하여, 하늘과 땅은, 산과 바다는, 구름과 강물은, 그리고 수많은 짐승들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길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양새를 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신화는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원’(그것의 어떤 것의 기원이든지 간에)의 문제에 대한 그 시대의 정직한 ‘대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오래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금 우리에게 자세하게 전해주는 살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하늘을 어찌 생각했는지, 산과 바다는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또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어찌 해석하고 있는지 등등. 살아있는 화석으로서 신화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충실하게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일종의 철학서요 역사서가 된다. 그러므로 신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극적 상상력(theatrical imagination)이 필요하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야웨 신앙은 왜 위기를 맞았는가?


이 책의 저자가 은연중에 말하는 것 중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는 신앙고백이 고대 사회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대 종교들은 고대인들에 있어서 종교와 생활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혼재되어 있었다. 즉 종교의 세계 혹은 종교생활이라는 것과 일반적인 생활양식이 독립하여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종교적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부족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특정한 가치관과 신념체계 아래 하나로 묶여있었고, 또한 이러한 부족의 지속적인 정체성 유지를 위하여 종교는 적절히 기능을 했다. 그래서 한 부족의 아이로 태어났으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자동적으로 그 부족이 신앙하는 종교의 신자가 되었다. 아이는 당연히 부족의 신앙을 가져야만 했고, 부족의 의례에 참여해야 했으며, 부족의 신화를 공부했고, 그들이 배우고 익힌 것을 후손에게도 그대로 이어줘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종교 역시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나간다기보다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종교적 의식과 의례를 후대에 전해주는 기능적 요소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해당하는 종교와 그 종교에서 전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또 그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할지 매우 구체적인 방법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정보들은 여러 모양의 신화들로 채색되어갔고, 그렇게 구성된 화려한 수사의 신화들은 단순히 호사가들의 입담에만 멈추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보의 전달자로 그 쓰임새를 넓혀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의 대상인 야웨가 농업을 위한 비, 구름, 바람뿐만 아니라, 저 해와 달과 별도, 그리고 이 세계 전부를, 더 나아가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며 그분은 이름도 모양도 없고, 역사를 통해 언제나 그들에게 구원의 빛을 주신다는 고백들은 고대인들의 종교 관념에서 볼 때 상식적이지 않다. 그들의 고백은 고대 근동의 종교와 문화를 단절하는 것과 동시에 일상의 연속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 너무도 다르고 서로 맞지 않는 세계관의 충돌이 바로 고대 근동의 나라들과 이스라엘의 다툼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구약성서를 보면서, 그동안 가졌던 “왜 이스라엘 민족들은 야웨 신앙을 저버리고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겼을까?”라는 의문이 풀렸다. 결국,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던 이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바알의 종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아니 선택이 아니라 당연히 바알의 세계관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적어도 바알 신화를 접하면서 농경과 목축에 종사했던 이스라엘인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와 왜 사시사철 모두가 풍요로운 결실을 줄 수 없으며, 왜 땅을 파며 땀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소득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가를 배웠을 것이다. 때로 이 신화와 연계된 의식들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또 농사 기일에 맞추어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노동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씨 뿌리기 위해서, 밭을 매기 위해서, 병충해로부터 낱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확의 시기를 제 때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매번 이 신화로부터 따온 의식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방식으로 펼쳤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기일을 잊지 않고 제때 농사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종교가 가지는 신앙의 본질적 차이를 엿볼 수 있게 된다. 한쪽에서 보는 신앙이란 절대자와의 주체적이고도 실존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자신의 온몸과 맘으로 느끼는 것이 곧 신앙이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실제 생활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매우 편리한 생활양식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 현대에서도, 나에게도 고민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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