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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가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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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가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EAST-TIGER 2020. 6. 11. 07:21

 

내가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 중 세 번째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를 읽으면서 그녀에 대한 문학적 시선을 느꼈지만 그녀의 초기작에 가까운 이 책을 읽으니 조금 흥미롭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녀의 문학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마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녀의 문학적 분위기는 친근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녀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 소외된 것들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 물론 그녀의 유별남이 크지만 일본문학은 굵직하고 복선이 강한 영미문학과 달리 삶의 작은 것들에 대한 의미 찾기가 주를 이룬다. 어떻게 보면 일본문학의 분위기는 밍밍하고 그로 인해 감정적이고 우울하다.

 


이 책의 내용은 절친한 두 여자의 삶을 통해 사랑과 삶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식 비상식적인 인간관계가 설정(유부남과 불륜, 동성애 등) 되어 있지만 이상한 것은 현실에서 보기에는 거북하고 이질감이 드는 것들이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는 편하고 낯설지 않다. 너무나 자연스럽다고나 할까. 그녀의 책에는 약간 억지스러운 위로와 배려가 있다.


맞지도 틀리지도 않는 말이다. 가호는 시즈에의 밥공기에 두 공기째 밥을 푸면서 생각한다. 자신이 불행할 때 상대도 불행하면 기운이 나는 것은 왜일까. 상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자신의 행복보다 훨씬 더 많이 바라는데. <120p>

 

주인공인 가호나 시즈에는 서로 너무 사랑하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콤플렉스가 있다. 때로는 서로에게 위로와 배려의 대상이 되지만, 때로는 조그마한 일까지도 질투와 부담되는 대상이다. 서로 질투하듯 행복해지길 원하고 있고, 동정받기를 거부한다. 각자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서로에게 크고 작게 영향을 주지만 두 여자는 전체적으로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저 상황에 따른 반응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바깥 인물들은 둘의 관계를 이상하지만 흥미롭게 지켜본다. 가끔은 질투를 느낄 정도로.


시즈에는 기억 속의 가호를 쳐다보았다. 교복의 옷깃, 검은 책가방, 땋아 내린 보드라운 갈색 머리. 기억 속에서 가호는 입을 고집스럽게 딱 다물고 시즈에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언제부터 금기가 생겼을까. 피해야 할 얘깃거리가 하나 둘 늘어난다. 지금은 가호나 시즈에나 서로의 남자에 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묻지도 않고,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과민하다 싶을 정도로. <226p>

 

서로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가호와 시즈에지만 각자의 삶과 상황 속에 적응하는 과정 중에 서로에 대한 생각과 느낌도 많이 달라진다. 마치 초등학교 친했던 친구와 한동안 떨어져 있다가 고등학교 때 다시 만나니까 낯설게 느껴지고 다가가기 힘든 것처럼 가호와 시즈에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서로가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후반부에 가면 그제야 느껴지는 것은 서로에게 벗어나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는 두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시즈에가 조금 더 빨랐고 가호는 늦게서야 새로운 삶을 맞이하려 했다.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가오리는 이런 과정들을 부드러운 필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여담이 있다면 나가노와 가호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나가노의 가호를 향한 순수한 사랑 행각은 책을 보는 내내 즐거웠다.

 

2009.02.0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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