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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카트슨 사람들] 유효한 '변화'의 동기이자 도구

EAST-TIGER 2015. 5. 16. 02:17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이름은 들었던 영화들이 있다.

그 중에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있고,

소수나 몇몇 개인들로부터 숨겨진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도 있다. 

이런 점에서 두 영화들 모두 언젠가 시간을 내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듣다 보면 여러 장르의 영화들을 알게 된다. 

이미 대다수의 '명작'들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2000년대 이전에 개봉했고,

별다른 계기나 강한 의지가 없다면 그 영화들을 다 찾아서 보기에도 쉽지 않다.

그러나 영화 평론가 정성일이 매주 소개하는 영화들 중, 

지금까지 내가 보지 않았던 영화들을 소개할 때면, 

꼭 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 

그 의지는 정성일만의 독특한 소개 방식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왜 그 영화를 아직까지 못 봤을까?"라는 

스스로 묻는 질문과 함께 느껴지는 아쉬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사는 것은 쉬운게 아니야, 일단 먹는게 해결되어야 하거든!"


모래바람이 부는 거리에 서 있는 허름한 건물.

건물 주인 클라페는 딸 줄리와 애인 플뤼세와 함께 살면서 푸줏간을 운영하고, 

그 곳에서 그는 가축이 아닌 사람을 죽여 팔 고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건물 세입자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 고기를 사서 먹는다. 

어느 날 사람을 죽이기 위한 위장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전직 광대인 뤼종.

클라페는 그를 건물 잡부로 일하게 하면서 죽일 기회를 노리지만, 

계단에서 처음 뤼종을 본 줄리는 알 수 없는 호감을 갖게 된다. 

이후 줄리는 뤼종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 클라페와 대립한다.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어, 단지 처한 상황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지!"


장-피에르 주네(Jean-Pierre Jeunet)와 마르크 카로(Marc Caro)는, 

이 영화와<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을 연이어 공동 감독으로 함께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미 본<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와, 

장-피에르 주네 감독의<아멜리에>를 함께 떠올리면서 보았는데, 

이 영화는 그 두 작품의 '모태'로 평가될 수 있다. 

SF 판타지와 코미디 그리고 로맨스를 적절히 섞으면서 

각 장르의 색깔은 확실히 나타나는 두 감독의 연출력은 이 영화에서 시작했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아멜리에>는 줄리와 뤼종의 현대판 로맨스이다. 


뤼종 역을 맡은 도미니크 피뇽(Dominique Pinon)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어리언4>,<아멜리에>등등..

마치 팀 버튼과 조니 뎁처럼 그 역시 장-피에르 주네 감독과 여러 영화들에서 함께 했다.

이 영화가 1991년 작이기에 30대 중반이었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작은 체구이지만 특유의 표정과 움직임 그리고 개성 있는 연기는, 

이미 이때부터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서의 모습이었다.



"못 살아 돌아올지도 몰라, 그러니 베풀어야지"


내가 보았던 프랑스 영화들은, 

단순히 눈이 즐거운 오락성이나 영화의 장르적 특성에 머물기 보다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장치나 효과들을 보여주고,

다양한 방식과 비유로 현실 세계를 풍자하면서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들을 끄집어 내어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점들이 빠른 전개와 인상적인 스케일, 

그리고 인기 배우들의 출연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한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종종 프랑스 영화가 낯설고 내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고 느끼게 할 수 있고, 

심한 경우 극장을 나올 때 "영화표 값이 아깝다"는 말이 나오거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영화의 기술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정성일이 말한대로 다양한 렌즈들로 촬영하여 화면 비율을 불규칙하게 설정했고, 

이를 통해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컷 양식으로 영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엔딩 부분을 제외하면 세트 조명은 어둡고 색감은 전체적으로 세피아 색이다.

무엇보다 배경 음악과 효과음이 돋보이는데, 

하나의 소리에 맞추어 등장 인물들이 리듬을 타며 개개인의 일에 집중하는 것과, 

첼로와 톱을 가지고 줄리와 뤼종이 협연하고,

오로르 부인이 자살하도록 유도하는 목소리와 

계획적으로 자살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중에 들리는 효과음들은, 

정교하면서도 귀로부터 몸 전체까지 긴장과 리듬감을 갖게 한다. 

이 외에도 내적으로는 부실하지만 외적으로는 형태를 유지하는 건물과,

그 속에서 함께 사는 세입자들의 삶의 형태와 

그들 개개인이 가진 고민들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 

또한 건물 지하와 땅 밑에는 또 다른 삶의 형태를 가진사람들을 통해서,

건물과 지하, 땅 밑이 각각 분리되었지만

하나의 세계이자 지금의 현실 사회를 나타내고, 

각각 장소에서 등장하는 개개인들이 

사회의 여러 계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도 고기만을 고집하는 클라페와 세입자들. 

부자이지만 매번 자살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오로르 부인. 

줄리를 사랑하지만 직접 고백하지 못하는 엉뚱한 집배원.

콘돔을 풍선처럼 부는 남자와 짓궂고 훔쳐보기 좋아하는 남자 아이들. 

'인간 백정' 클라페를 "쓰레기"라고 말하지만 그의 곁에 머무르는 플뤼세. 

땅 밑 지하 세계에서 숨죽이며 사는 사람들. 

특히 줄리는 뤼종을 구하기 위해 그 사람들에게 

협상 도구로 옥수수를 보여주자 놀라면서 줄리의 제안을 수락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을 비유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또한 어디서 송출되는 지 모르는 흑백 TV의 프로그램들과,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골프채를 보며 드는 생각, 

"도대체 이 황량한 곳 어디에서 골프를 칠까?"

장면들마다 자세히 보면 풍자나 비유라고 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

한번 보고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설정과 행동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가 확실히 갈릴 수 있고, 

어떤 시점에서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극장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보는 것보다 

DVD나 다운로드를 통해 천천히 보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이 부메랑이 해결할 거예요"


단지 줄리와 뤼종의 로맨스만으로 

이 영화가 해석되기에는 조금 아깝다고 생각이 든다. 

인육이 소재 중에 하나이지만 잔인하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없고, 

오히려 인간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 

그리고 관계를 맺는 과정들이 흥미롭다. 


푸줏간 주인이자 건물 주인 클라페에게도 

그를 "쓰레기"라고 부르지만 애인 플뤼세가 있었고, 

애인과 딸 줄리만큼은 자신의 잔인한 성향과 행동들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는 그의 말처럼, 

자기 합리화는 어디서든 빠르기 이루어지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이것이 동의되어지면 다수에게로 확산되고, 

확산되지 않더라도 이제까지의 동의들이 행동을 강제적으로 정당화시킨다. 

이와 반대로 뤼종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대인 관계 방식으로 

클라페의 딸 줄리와 그의 애인 플뤼세의 마음을 얻는다.

그녀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따뜻함'과 '배려'였다.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장소에서도 그것들이 가진 힘이 뤼종을 구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땅 밑에 사는 인간들의 말과 행동들이 짧지만 강렬하게 다가왔다. 

계약은 계약 즉 약속은 약속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의 성취를 위해 행동해야 하고, 

총을 맞아 죽는 순간에도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그들.

그들은 똑똑하지 않고 별다른 재산도 없지만 

뤼종처럼 '따뜻함'과 '배려'를 가진 우리 사회의 일반 시민들처럼 보였다. 


자기가 늘 쓰던 '무기'를 던져 버리는 순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진다. 

이기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무기'를 사용하면, 

그 익숙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다. 


독점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과 집단을 이기는 방법은, 

결국 그들 내부의 의로운 반란과 

사람과 사람이 서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하고 지키려는 모두의 용기이다. 

이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한 '변화'의 동기이자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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