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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무엇이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가?"

EAST-TIGER 2015. 9. 18. 07:12


최근 몇년간 제작되고 개봉되는 한국 영화들의 수가 많아졌고 관객수도 늘어났다. 

또한 크고 작은 국제 영화제들에 초정되고 수상되는 작품들도 적당히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영화관마다 2개 이상의 상영관을 점유한 영화들이 더러 있고,

그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보다 상대적으로 '수익'적인 면에서 우위에 있다. 

그 영화들이 그렇게 상영관을 점유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손익계산 역시 확실하겠지만, 

어쩌면 매년 관객들은 영화관에서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과 

익숙한 감독 이름들의 영화들만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관 입장에서는 그 영화들이 '흥행'할 기미가 보이고, 

진짜로 흥행하여 장기간 다수의 상영관 점유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운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개봉되어야 할 모든 영화들을 모든 영화관들이 항상 상영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매년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되지만 

관객의 눈과 귀에 한번이라도 스쳐갈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문화 산업의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결국 관객들은 스스로 영화관 밖에서 영화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주류'와 '비주류'로 사회가 나누어져 있으면, 

어디서나 그 기준에 따라 기본적으로 대부분이 나누어져 있다. 

나는 이러한 기준과 그 기준에 따라 판단되어진 것들이,

한심하고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나도 '자연스럽게' 판단하고 

누군가에게 판단되어지는 것 역시 웃기고 슬픈 일이다.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모순적으로 그 기준에 따라 한번 판단을 내리지만, 

시간을 두어 다시 판단하고 그 기준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 

이러한 노력은 가끔 무척 귀찮게 느껴지고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에 진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을 더 늘려야 해. 조금만 더 하면 돼.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 나만 하면 돼"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사회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인정되기를 바라는 수남. 

그 능력과 노력은 시간이 갈수록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허무한 결과를 이끈다.

혼자서는 그럭저럭 살 수는 있을 것 같았던 그녀에게 생긴 남편. 

그리고 그 남편과 행복한 가정과 삶을 누리고 싶었던 소망은 

수남에게 더 많은 능력과 노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능력과 노력에 비해 자신이 버는 돈이 턱없이 적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수남은 점점 단순해진다.



"저희가 어떻게 시위를 해요.. 무섭게.."


개성 있는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영화였다. 

오랜만에 영화에서 본 이정현과 명품 조연 배우들인 이대연, 명계남, 지대한, 이준혁 등,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와 인물들의 색깔이 확실해진다. 

<꽃잎>이후 '만능 엔터테이너'인 이정현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그녀의 본업이 '배우'라는 것을 알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안국진 감독에 대한 첫 인상은 '날카롭다'였다.

어떤 대상이나 통념적 인식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이 아닌, 

거의 모든 장면들이 인과적으로 전환되고 그 장면들에서 보여지는 구도와 대상들의 배치가 

그냥 보기에는 어지럽고 불편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을 찔러 머리에 이미지들을 각인시킨다.

이러한 영상들이 낯설지는 않기에 신선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한국 영화에서 느낀 인상이었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죽이는 거 이해해주세요"


박찬욱 감독의<친철한 금자씨>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영화 자체는 상대적으로 템포가 빠르면서 밝은 편인데 다루는 주제와 감독의 의도는 무겁고 어둡다. 

이 대비는 자극적인 장면들로 '컬트 영화'스러운 면들을 보일 때 선명해진다. 

또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를 끄고,

등장하는 배우들의 표정과 장면들만 보아도 이 영화의 내용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다.

어떻게 보면 확실한 소재로 인해 예상되는 장면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을 대비한 시도인 것 같다. 

즉 뻔한 장면들은 더 빠르게 보여주고 이야기가 풀어지는 장면들은 

배우들의 표정과 배치, 카메라의 구도 등을 통해 청각보다 시각적으로 빨리 전달시킨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지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독창적이거나 신선하지는 않다. 

한마디로 '깔끔함'이 가져다 주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규정에 어울리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돼요, 내 남편 곧 깨어난단 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는 인문학의 기본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대별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인문학자들이 제시한 대답들보다, 

자영업자들이나 월급쟁이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말한 대답들이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공통적이면서 개인적인 대답들을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그 행복을 위한 노력과 방법들이 생각보다 효과가 없고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것 같은 '인상'과,

실제로 불행해지고 더이상 삶을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즉, 개인의 노력과 방법들이 개인 자신이 아닌 타인 또는 사회의 간섭과 변화로 배신 당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다. 

"무엇이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가?"


'좌절'과 '탈락', '체념', '단절'이라는 단어들에 익숙해지는 순간,

개인의 삶은 순식간에 좌초를 넘어 침몰 직전의 '배'와 같다. 

그 배에 있는 사람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 있지만, 

이대로 배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는 사람이라면, 

목적의 단순성에서 오는 절박하고 치밀한 행동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살고 싶다'는 맹목적 의지는 무너진 삶과 자신을 일으키는 결과로 이어져, 

다시 다수가 사는 듯한 아니면 자신이 바라던 삶을 살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소망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 

또는 자신의 삶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기 위한 노력과 의지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폭력'과 '피해'로 반응할 수 밖에 없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삶의 의지는 발현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럴려고 하지는 않았다.."라는 말과 생각. 

삶에서 한번 이상 그리고 여러 번 떠올리고 말하게 된다면, 

눈 앞에 보이는 대부분의 대상들은 

나의 삶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삶은 늘 '전쟁'이다.


"일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은 대단한 편견이다. 

"사람이니까 먹어야 하고 계속 살아야 한다" 

일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누가 일을 하겠냐?", "종북좌파, 빨갱이들이나 그런 주장을 한다"고

답답한 듯 내게 말할 수 있겠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일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고 돈은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전제에서 더 나아가면, 

일은 '강제' 되는 것이고 그 강제는 돈의 보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한 일의 강제에도 불구하고 돈의 보상이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일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일과 돈 둘 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두가 일을 하고 경쟁에서 살아 남는 사람들만이 

'행복'하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것은 "남을 쓰러트려야 내가 산다"는 말과 같다. 

그런 생물체와 그 생물체가 사는 곳은,

인간도 식물, 동물도 아닌 '제 3의 종'이자 사실상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 세상의 어느 종도 '공멸'을 바라지 않는다. 

나 역시 '제 3의 종' 되지 않고 그 '공간'에서 살기 싫기에 '저항' 중이다.

그러나 이 '저항'은 지금 보기에 하찮고 무모할 수 있기에, 

확고함 속에서 나는 늘 스스로에게 끊임 없이 질문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나만 잘하면 된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미 사람들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고 있고.

그 '피해'없이 사회와 국가는 구성될 수 없다.

그럼 "나만 잘하면 된다"는 말은 사실일까? 

이 말은 "남은 신경 쓸 것 없다"는 말과 유의(類義)하다

그 '남'은 철저히 '나'와 '너'를 구분한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라는 'SOS' 신호에 외면하지 말자.

그것은 개인의 구조 요청이 아니라, 

'사회'라는 단어의 구조 요청일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이고,

'인간'만큼 '산다'라는 동사에 어울리는 주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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