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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해야 한다

EAST-TIGER 2014. 8. 19. 18:08


해야 할 것들은 많은데 한 없이 게을러지고, 

가끔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다.

게다가 2014년 한국의 사회를 바라볼 때면, 

이렇게 한가하게 있는 내가 죄스럽고 스스로 탄식한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척도가 될 기본 텍스트가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 느껴지는 것들, 생각 나는 것들, 귀에 들리는 것들을, 

그때 그때 마다 정리하고 되새기며, 

그 중에 괜찮은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게 붙잡아야 한다.

이것은 평생의 내 '일'이다. 


오늘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도 그런 '일'에 속한다. 

남들에게는 그저 흔한, 또한 지루한 리뷰가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영화가 내게 주는 메시지와 내 생각을 적절하게 조화 시켜서,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 봤다" 라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등 뒤에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렇다고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나른한 주말 오후이지만 무더운 더위가 잠시 지나가고, 

폭풍우가 그 자리를 일시적으로 차지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세상이 짙은 회색 빛이다. 

마치 내가 이 영화에서 보았던 그 색감처럼, 

내 자리에서 이 글을 쓴다.



"자신의 위치를 아세요, 자신의 위치를 지키세요, 신발처럼!"


기후 변화로 인해 얼어붙은 세계를 달리는 열차. 

꼬리 칸에서 탑승한 승객들은 열차가 17년 동안 운행되는 동안, 

단 한번도 바깥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조밀한 공간에서, 

감시자들과 관리자들에 의해 비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커티스는 때를 잡아 열차의 엔진이 있는 앞 칸에 가려 한다. 

그리고 철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함께 할 동료들과 앞 칸으로 전진한다.



"우린 앞 칸으로 갈거야, 같이 가지"

"앞 칸으로 간다고? 그러도록 해, 그런데 내 자리는 여길세" 


오래 전부터 보고 싶은 영화였다. 

유학 오고 나서 개봉한 영화였고 

독일에서는 한국 영화를 제대로 볼 기회가 별로 없는 때문에, 

이 영화가 내 눈 앞에 상영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라 기대도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지극히 한국적인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라 평가하는 봉준호 감독이, 

어떤 소재와 방식으로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것인지도 궁금했다.


애드 해리스(Ed Harris), 존 허트(John Hurt), 틸다 스윈트(Tilda Swinton), 

제이미 벨 (Jamie Bell), 이완 브렘너(Ewen Bremner) 등. 

낯익은 배우들을 다수 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었다. 

그리고 송강호와 고아성은 지난 작품들과는 달리,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았는데 그런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괴물>과 같은 OST를 기대했지만 

감독은 현장의 순간들을 더 중요시 생각한 것 같다.

세트와 CG는 괜찮았지만 뭔가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꼬리 칸의 승객들이 주 인물들이라 그들의 일상이 부각되어야 하지만,

열차 각 칸마다 생활하는 사람들의 대화나 행동들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세트가 그저 배경에만 머문 것이 아닌 가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그리고 엔딩은 감독이 영화에서 설정한 상황과 말하고 싶은 메시지에 비해, 

그렇게 납득 가는 결말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 보다 좀 더 대중성을 갖는 영화였지만, 

반대로 작품성에 있어서는 '봉준호'스럽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 담겨 있는 그의 영화들은,

한국인이 아니라면 영화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나는 그의 다음 영화에서 그러한 소재들과 정서들이 

어떻게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설득할 수 있는 지를 보고 싶다.



"만약에 얼어 죽지 않는다면, 

기차 밖에 나가 살 수만 있다면." 


근래에 나는 토마스 홉스에 관한 짧은 논문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것에 적절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영화 말미에 커티스가 고백하는 말들과 윌포드와의 대화는

거의 홉스가 설정한 '자연상태'를 그대로 설명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것과 연관되어 이해되어졌다. 

그리고 7.30 재보선이 끝난 직후에 본 영화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그 선거 과정과 결과를 보고 들으면서 생긴 감정과 생각들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하여 글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화의 설정처럼 기후 변화이든 핵 전쟁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계급화 된 사회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이다. 

이 상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분류된 사회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단지 학자들에 의해 사회와 사회 구성 요소들, 현상들을 

지칭하는 용어만 바뀌었을 뿐, 

'자본'과 '힘' 그리고 '욕구'는 여전히 강력하게 인간과 사회에 영향력을 주고 있으며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거대한 틀이자 바위들이다.



"이 기차가 세계일세, 우리가 인류야" 


기차 안에서 살게 된 이후 

사람들은 기차 밖이 원래 자신들이 살았던 세상인 것을 모르는 듯 살아간다.

단지 눈으로 덮여있고 추위로 영원히 얼어 붙어 살 수 없는 것처럼

알고 있고 그렇게 교육 되어진다.

결국 세상은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기차 안으로 작아진다.

그러나 안과 밖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꼬리 칸부터 앞 칸까지 지정된 사람들이 그에 맞는 삶을 살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면, 

강한 힘 또는 강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지혜 같은 개인 능력보다, 

기차 내부의 방향을 정하고 엔진을 관리하는 능력,

즉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최고의 지위를 누린다.

그 다음은 원래 혈통적으로 세습된 부와 신분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지금 문명화 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들 유산으로 받은 원래 '자리'를 

다음 세대들에게 유산으로 넘겨주고 있으며, 

사회 구조와 체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단임제인 대통령이나 기관장이 

눈에 보이기에는 최고의 권력자인 것 같지만, 

진짜 권력은 독재 또는 장기 집권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 것이 진짜 권력이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그 주위 사람들과 국민들의 삶과 생각을 

본능적으로 이성적으로 잠식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대기업 삼성 또는 현대의 이미지가 다수 사람들에게 좋지 않고, 

특히 중소기업들을 이용하여 부당 행위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삼성 핸드폰, 현대 자동차를 구입하기 원한다. 

비리 공직자들과 부패한 정당, 기업이 있더라도, 

법과 제도는 그들의 잘못을 감추거나 경감하기 유리하다.

게다가 선거 때 국민들은 계속 그들을 마지못해 지지하며,

그들의 부정의한 행위들을 연장시킨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들의 이익과 권력, 세력 유지 때문에 

다수 또는 소수가 끔찍하거나 서서히 죽거나 다친다. 

그리고 참극은 계속 반복된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인가? 

이 풍경은 최소한 한국에 왕조 국가가 생긴 이래

외형적인 모습과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계속 있었다.

더구나 한국 역사에서 민중의 난이 성공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전부 진압되었고 잠시 동안 차지했던 남의 자리들은 다시 빼앗기고, 

모두 원래 그 자리 그 위치로 돌아갔다. 

그래서 다수의 민중들은 

개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었고,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또는 그의 손에 죽거나,

때로는 나라를 위해 죽었다. 

이 사실들은 지금까지도 '사실'이다. 


고도화된 문명에서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인류의 정신은 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쉽게 말하면 아직도 인류의 대부분은 일터에서 '노예'처럼 산다. 

그리고 그 어느 세기보다 

극심한 빈곤과 부의 불평등, 

가족과 대인 관계의 파탄에서 살아가고 있다. 

독일에서 아침마다 뉴스를 보면, 

세계 곳곳에서 앞 칸으로 가려는 

꼬리 칸 사람들의 분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앞 칸으로 가려는 이유는 

기차를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소한 사람답게 살고 싶고,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너무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강제로 이미 만들어 놓은 질서는, 

그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질서가 아니라 단지 억압과 폭력일 뿐이다. 

홉스식으로 말하자면, 

개인은 사회 계약을 통해 불안전한 자연 상태에서 

통치가 있는 국가로 옮겨졌지만, 

통치와 국가 구조의 불합리로 사람들은 다시 자연 상태에서처럼 

자기 보호 본능으로 전쟁 상태로 회귀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 질서에 동의하지 않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해야 한다. 


기차 밖에 세상이 있다는 믿음. 

지금 보고 겪는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믿음.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가 있다는 믿음. 

이 믿음들이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닫혀 있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회와 개인의 '문'들을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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