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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허무한 것은 싫다

EAST-TIGER 2019. 1. 6. 11:01


평소에는 막연하게 보겠다고 생각한 영화들을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보게 되는 때가 있다.

주변에 몇몇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내용과 인상적인 장면들을 말해 줬지만,

직접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찾아오는 생각들은 언제나 새롭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보면서, 

시대와 상관없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들과 행동들을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그것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내용이 새로운 영화는 이제 별로 없다.  



"모르는 사람과 하는 것도 좋은데요."


폴 역의 Marlon Brando와 쟌느 역의 Maria Schneider의 연기에서 중년과 청년 간의 소통과 대립이 잘 표현되었다.  

둘의 성애 장면들은 "서로 잘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 벌어지는 젊은 날의 호기심과 현실 도피적 욕망의 충돌이었고,

결과적으로 폴의 욕망이 쟌느의 호기심을 압도하여 교감과 배려보다는 욕구 해소와 폭력으로 이어졌다.


Bernardo Bertolucci 감독은 쟌느와 폴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이유를 인과적으로 보여준다. 

폴은 스스로 자신이 쟌느에게 제안한 규칙을 어겼고,

그로 인하여 쟌느는 폴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서로가 "모른다"에서 "안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표현되는 말과 행동들이 사실적이다.  


배경 음악으로 Oliver Nelson의 색소폰 연주를 들을 수 있고,

주로 폴의 테마곡으로 등장했다. 



"진실은 말해도 돼, 하지만 이름은 안돼."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섹스를 하고 개인의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느껴지는 감정들의 신뢰와 그렇게 하고 싶은 의욕이다. 

폴과 쟌느의 첫 만남은 이름과 나이 또는 직업, 출신에서 비롯되는 선입견들로부터 벗어나 있다. 

눈에 보이는 외모와 풍경, 느껴지는 감정들이 전부였기에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불분명한 관계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쪽은 남자보다 여자인 것 같다. 

쟌느는 폴의 이름과 나이, 직업 등이 궁금했고 서로의 개인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했다.

폴은 쟌느를 연애의 대상이 아닌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 보았기에 그녀의 바람을 총족시켜줄 수 없었다.   

쟌느는 매정한 폴이 싫지만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애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남녀가 서로에 대해 알아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일까? 멀어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Bernardo Bertolucci 감독은 영화 말미에서 탱고 바에서 나누는 폴과 쟌느의 대화와, 

탱고를 추는 남녀들을 대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답을 하는 것 같다. 

탱고곡에 춤을 추는 남녀들은 사전에 약속된 동작들과 숙달된 감정 이입으로 곡을 몸으로 표현한다. 

여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냄으로써 형성된 서로 간의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폴은 오랜만에 만난 쟌느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스스로 말했고, 

쟌느를 사랑한다며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쟌느는 폴의 그런 말들과 태도에 놀라고 그가 더이상 신비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둘의 대화는 세대 간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고, 

규칙과 조화가 있는 탱고에 대비되는 "막춤"이었다.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쟌느는 폴을 좋아했지만, 

폴은 쟌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전혀 없었다.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섹스가 관계의 시작이었다면, 

언제 끝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관계일 수 있다.  

이 섹스가 관계의 깊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애는 서로 간의 이해와 배려에 의해 깊어진다. 

폴의 아내가 자살을 택한 것도, 

애인이 될 뻔한 쟌느가 폴을 미워하게 된 것도, 

독단적인 폴의 자업자득일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급하게 정리되는 것 같아서 아쉽다. 

왜 폴은 오랜만에 만난 쟌느 앞에서 자신이 말한 규칙을 어겨가며 쓸데없는 말들을 늘여 놓았을까? 

왜 뒤늦게 폴은 쟌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폴의 모습들이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의 "광기"로 이해하고 싶어졌다. 

폴이 총에 맞은 후 발코니로 걸어가는 뒷모습과 그의 표정이 그 근거이다. 



"나는 그를 몰라."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채팅이나 커뮤니티 활동은 상대가 나를 모른다는 것과, 

모르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가족과 친구들은 서로 이름을 알고 서로 길들여졌기에 하고 싶은 말과 행돌들이 제한된다. 

전혀 모르는 상대를 대화를 통해 조금씩 알게 되고 그 알게 된 것들이 호감스럽지 않다면, 

그 깊이나 양에 상관없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들은 대개 급속도로 정리된다.  

이것은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기에 온라인에서처럼 쉽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얼굴은 안다는 것은 확실히 있었던 일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사람을 만나는 곳이고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곳이다.

진심 없는 말들과 행동들은 언제라도 거절되어야 한다. 

만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허무한 것은 싫다.    

아는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애써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말하고 싶지 않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작별을 고하면 되는 것이고, 

서로 아음에 든다면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배려하면 된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말과 행동들도 거절되어야 한다.   

인간관계의 시작과 끝은 이해와 배려의 정도에서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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