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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들] 꿈 속에 또 다른 꿈이 필요하다

EAST-TIGER 2019. 7. 20. 06:06

 

작년 10월 전후로 Bernardo Bertolucci의 2003년작인 <몽상가들>을 보기 시작했다.

한 번에 다 보지 않았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보았다.

얼마 후 11월 말에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고,

개인의 일들이 더 피곤스러워서 추모의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영화도 해를 넘겨서야 다 볼 수 있었고 이제야 생각나서 몇 자 적어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살 수는 없어."  

 

Bernardo Bertolucci의 영화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장센들이 있다. 

별다른 대사가 없어도 공간과 그 안에 배치된 것들이 가진 의미들의 조화는, 

짧은 순간이지만 섬뜩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특히 역사적 순간들에 사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그의 해석은 흥미롭고 영화를 본 후 고민하게 만든다.

왕가위 감독처럼 Bernardo Bertolucci의 영화도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듣는 재미가 있다.

 

그의 영화들에서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어떤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한 반응들을 볼 수 있다. 

1972년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는 무기력한 중년 남자 폴의 분노와 광기를 볼 수 있고, 

1998년작 <마지막 황제>에서는 황제이지만 점점 그 지위가 추락해가는 선통제 푸이의 삶을 볼 수 있다.

2003년작 <몽상가들>에서도 기성세대의 이념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려는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자벨,

둘이지만 하나이고 싶은 그들의 모순적 관계에 상식적인 매튜가 대립하면서 액자적 구성으로 표현된다.      

시대와 나이를 막론하고 이런 캐릭터들은 어디서든 자주 볼 수 있기에 낯설지는 않다.  

 

"왜냐하면.. 네가 주장하는 것을 네가 정말 믿는다면, 너는 밖에 있어야 해." 

"어디?"

"저 밖에, 거리 위에."

 

이자벨 (Eva Green)의 백치미와 육체미는 젊은 세대의 특징들을 표현하는 것 같다.  

무엇인가 아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천하지 않고,  

타인과의 소통과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보다는,

순간의 감성과 느낌에 더 이끌려 판단하고 행동한다.

따뜻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불안한 지금과 미래를 잠시 잊을 수 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외로움도 덜하다. 

반항하지만 쉽게 이겨낼 수 없고, 

바꾸고 싶지만 남이 바꿔주길 원한다. 

자신감은 있지만 대책과 책임은 부실하다. 

장렬하게든 조용히든 죽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없다. 

정말 "젊다"는 것만이 확실한 밑천이다. 

 

이러한 묘사들이 꼭 젊은 세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시대와 나이에 상관없이 비슷한 면들을 보여왔다. 

테오 (Louis Garrel)와 매튜 (Michael Pitt)의 극 중 대립에서도, 

이성과 감정, 합리와 불합리, 정의와 불의 등에 대한 견해 차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차이들이 있어도 서로 멀어지기 싫은 그들.

그것이 혁명이나 시위보다 더 원하고 바라는 그들만의 "함께 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테오와 매튜가 논쟁 후 재빨리 서로 화해를 하는 것도, 

이자벨이 원하던 동반자살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된다.

 

"테오, 이건 아니야, 이건 안돼!"

"아니야, 이건 굉장한 일이야!."

 

1968년 5월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68 운동"에 대해 

Bernardo Bertolucci 감독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영화에서 매튜는 미국인이자 제삼자 입장에서 "68 운동"을 관찰하고, 

그의 말과 행동들이 감독이 해석하는 "68 운동"으로 보인다. 

불의에 대항하는 또 다른 불의.

폭력에 대항하는 또 다른 폭력.

비논리에 대항하는 또 다른 비논리.

파시즘에 대항하는 또 다른 파시즘.

국가 속의 파시즘과 "병 속에 든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같다.

 

불안과 용기는 서로 맞닿아 있다. 

불안은 불현듯 발생한 용기로 인하여 상쇄되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연소시킨다. 

테오는 자신이 가진 이상을 비로소 현실에서 실천했고, 

이자벨은 테오가 없이 살 수 없다. 

매튜가 보기에는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행동이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혁명은 없다.

혁명의 시대에 창 안쪽에 살며 현실의 고민을 시로 표현하는 사람들과,

영화와 책 속에서 발견한 이상들만을 추구하며 창 밖에서 잠드는 사람들은,

각자 개인의 방식들로 세상에 저항한다.   

이 "몽상가들"이 무장된 국가권력 앞에서 "순한 양"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Bernardo Bertolucci은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마오이즘과 중국 공산당의 실체가,

또 다른 파시즘이자 자국민을 통제하는 강력한 국가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왕을 몰아낸 자리에 또 다른 왕이 그 자리에 다시 앉을 뿐이다.

마치 젊은 세대가 몇십 년 후에는 기성세대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 서두에 에펠탑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인류는 피라미드식 계급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언제 국가 내의 시민들이 "민주(民主)"로서 평등하고 그 의미에 정당한 개체들이 될 것인가? 

혁명으로 주어진 꿈속에는 또 다른 꿈이 필요하다.  

 

Bernardo Bertolucci 감독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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