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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KER] "상상한 그대로네요."

EAST-TIGER 2020. 1. 29. 09:26

 

오랜만에 신작 영화를 보고 글을 남긴다. 원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난 후 긴 글을 써 놓았지만, 다듬지 못하고 몇 달을 보내다 보니 어디다 두었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바로 쓸 것이다.   

 

셀 수 없는 YouTuber들이 Todd Phillips 감독의 영화 <JOKER>를 리뷰헀고 그중 한 편의 리뷰만 보더라도 영화를 다 본 것과 같다. 이 영화는 내용이 특별할 수 없는 전형적인 안티 히어로물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에서는 한 남자가 왜 "Joker"가 되었는지보다, "Joker"가 가진 이미지들과 그 의미들을 이해하면서 영화를 본다. 

 

몇 번씩 끊어서 2-3일 동안 영화를 보려고 했지만 한 번에 다 보았다. 몰입도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Joaquin Phoenix의 연기와 동선이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는 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Taxi Driver>의 "트래비스" Robert De Niro와 "아서" Joaquin Phoenix를 동일선상에 있는 인물들로 보았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트래비스와 아서가 가진 외로움과 분노의 원인들에 의한 결과가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은 자고 일어나 보니 병원이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정신병원이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화려한 조명, 토크쇼, 그리고 관객들, 만약 당신이 내 아들이라면 전부 버릴 수 있어." 

 

누군가 내게 "이 영화, 재밌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재미는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장면들과 결과들로 채워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 영화는 영화 <기생충>보다 작품성에서 뛰어날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이 영화, 볼만해?"라고 묻는다면, 나는 "심심하면 볼만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기생충>의 다양한 소재들과 그 논리적 치밀함 들을 찾을 수 없지만, 사회 내 소외, 소수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볼 수 있다. 그들은 분노와 치욕을 마음속 어딘가에 쌓아놓고 있으며, 한계점을 돌파하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이다. 그들이 자폭을 할지, 아니면 타인들 또는 사회 내에서 폭발할지는 모른다. 이것이 인류가 계급과 사회를 형성한 이후부터 지금, 또 앞으로도 있을 내적 불안 요소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기생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부정적인 생각뿐인데, 당신은 전혀 듣지를 않아요. 내가 이렇게 말했죠. 난 평생을 존재감 없이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모두가 제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선택할 수 없는 출생의 조건과 성장 환경은 "족쇄"이다.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조커" 아서 플랙은 서로 다른 부모와 집에서 태어났고, 전혀 다른 교육과 문화를 체험하며 성장했다. "배트맨"이 사회 정의와 질서를 지키는 캐릭터로 보이지만, 그는 "조커" 외에도 많은 사회악들을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 그런 그는 왜 항상 이길까? 왜 그에게 사회악들은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늘 당연했던 것들에 의심을 갖거나, 그것들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때, "조커" 역시 그곳에서 함께 태어난다. 왜냐하면 "배트맨"은 "조커"를 태어나게 하고 성장시키며 그 존재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와 규칙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한 달 급여 이상의 돈을 갖고 있거나, 하루 세끼를 아낌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의 갈비뼈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커"는 언제라도 나타나 흉기를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다. "배트맨"은 그런 "조커"를 잠시 제압할 뿐, 또 다른 "조커"들의 출현을 막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비롯하여 <택시 드라이버>, <기생충> 같은 영화들은 그 원인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들을 보았지만, 그 원인들이 제거되거나 개선될만한 여지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커"는 말한다. "상상한 그대로네요."          

 

 

"내가 죽었다면 내 시체를 밟고 갔겠지. 이런 나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데, 토마스 웨인이 TV에 나와 추모했으니까, 내가 죽인 그놈들의 죽음은 슬프다고? "

 

사회 문제들은 어느 계층에 그 출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 전체의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그 문제들은 계층이 사라지지 않은 이상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과 생명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과 TV, 영화 등을 보면서 어느 순간에 그 말이 귓가에 울린다.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인간의 분노와 치욕이 해소되고, 사회 질서와 규칙들이 변하게 될 것인가? 지키려는 자들과 바꾸려는 자들 간의 싸움들 속에서 "조커"들이 태어나고 활약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광대"는 스스로 분장과 변장을 하면서 타인의 생각과 태도들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설정은 익명성이다. 그 익명성이 "광대"의 말과 행동들을 보장했고 보는 사람들은 맨 얼굴을 드러내며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토크쇼 같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생긴 이후 그런 "광대"는 사라져 갔다. 그 프로그램들은 익명성 없이 "유머"와 "농담"이라며 여러 사람들의 삶을 비웃고 조롱했다. 그런 그들에게 "광대"는 맨 얼굴로 나타날 수 없다. 수많은 방범 카메라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켜져 있지만, "광대"는 여전히 그의 방식대로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대변한다. 그런 광대로서 한 명이 "조커"라 생각한다.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은 게 정상인지, "정상이야."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미쳤다."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들은 코미디처럼 주관적이다. 이 주관적 판단들 속에 아주 객관적인 사실과 명제들이 덮여있다. 인간이 자신의 솔직한 감정들을 드러낼 때는, 주관적 판단들을 믿으며 살았다가, 객관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가 아닐까 싶다. 아서가 자신이 "해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아서가 아닌 "조커"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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