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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어쩌다"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죽는 것

EAST-TIGER 2018. 7. 1. 02:03


  뮌스터 한인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예전에 효성이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인 뫼르소의 삶과 나의 삶에 빗대어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석사과정 때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와 미셸 푸코의 <존재의 미학>, <성의 역사>, <주체의 해석학> 등을 읽고 둘의 자유론을 비교해서 논문을 쓰고 제출했었다. 그때 만났던 카뮈와 푸코의 글들은 같은 프랑스인으로서 동시대에 살았던 두 인물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과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에 대한 "부분 기억상실증"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개인 블로그에 책을 읽고 서평을 썼지만 그 이전에 읽은 책들은 그저 내 기억력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15년이 넘은 지금 그 책들을 다시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 갖지 못했던 생각들과 느낌들로 독서의 풍성함이 있다. 이것은 영화나 연극을 볼 때도 그렇고 음악을 들을 때도 그렇다. 내 안에 오래된 것들은 다시 나로 인해 생기를 얻고 그 의미들을 내게 알려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근조(謹弔).' 이것만으로는 알 도리가 없으니, 아마 어제였는지 모르겠다. 양로원은 알제에서 약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랭고에 있는데 두 시 버스를 타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밤샘을 한 뒤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장에게 이틀 휴가를 신청했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지라 거절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하고 보니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변명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가 나를 위로해 줘야 할 일이었다. 아마 이틀 뒤 내가 상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뭐라고 하겠지.  <제1부 9쪽>


  소설 <이방인>에서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첫 도입부이다. 이 소설 이후 발간된 현대 소설들에서 이와 비슷하게 응용된 도입부들이 있어서 "원조"가 과소평가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시대의 초월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어머니, 부양 능력이 없는 아들의 어쩔 수 없는 자기 합리화와 무관심. 그러던 어느날 들려온 어머니의 죽음 소식과 그로 인해 자식된 도리로 어머니가 있던 양로원에 가야 하고 장례식에 참여해야 한다. 다니는 회사의 사장과 동료들은 그가 모친상을 당한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고, 그에게 위로를 표하거나 기분을 물을테지. 누군가는 그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미묘한 감정들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어쨌든 그가 며칠 동안 길게 슬퍼할 겨를은 없다. 어차피 그는 계속 살아가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삶은 조금 더 연장된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 이 땅에 양로원이 세워졌을 때와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부모를 부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겼을 때부터 이와 유사한 상황들은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이 도입부는 오늘과 내일 이후 그 언제라도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카뮈는 인간의 삶 어느 한 부분을 완벽하게 요약했다.            



  내가 뒤를 돌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햇볕이 끓어 넘치는 해변 전체가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샘을 향해 몇 걸음 다가섰다.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랍 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 위로 드리운 그늘 탓에 웃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뺨이 타오르는 듯했고, 땀방울은 눈썹 위에 고이는 것 같았다. 엄마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같은 태양이었다. 그때처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혈관이 한꺼번에 피부 아래서 뛰어 올랐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서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게 어리석은 짓이고, 한 걸음 몸을 옮긴다고 해도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을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인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칼을 뽑아 태양빛에 반짝이며 내게 겨누었다. 강철 위에서 빛이 반짝 튀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내 이마를 쑤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서 두꺼운 막처럼 미지근하게 눈두덩을 덮었다. 눈물과 소금의 장막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로 태양이 울리는 심벌즈 소리와 칼에서 뻗어 나온 눈부신 빛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칼날이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모든 게 흔들렸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으며 하늘은 모두 활짝 열려 비 오듯 불을 쏟아 내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잡았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매끈한 권총 자루의 배가 만져졌다. 바로 그 순간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게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고 한낮의 균형, 행복을 느끼던 바닷가의 침묵을 깨드려 버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총알은 보이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  <1부 68-69쪽>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그 이유들 중 하나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와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내 친구가 싫어하니 나도 왠지 비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도 우리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그와 단둘이 한 장소에서 만났고, 그는 내 앞에서 칼을 뽑아 겨누었다. 날씨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덥고 햇빛은 강렬했고, 이 뜨거움은 내 앞에서 칼을 든 그를 향한 살의(殺意)를 불러 일으켰다. 마침 내 주머니에는 권총이 있었고 어느새 총구가 그를 향해 있다는 것을 보게 되고 방아쇠는 당겨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지만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정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을 위한 법정에서는 이러한 뒷배경들은 잘 조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 곳에서 "날씨가 참 좋아서 산책을 했습니다."와 "날씨가 참 좋아서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이 두 문장들은 그 의미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로 사람들의 귀에 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문장들은 역으로 봐도 그 의미가 통한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상하지 않지만 법과 도덕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것이 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뜨거운 태앙 아래 칼을 든 남자와 총을 든 남자가 서로 찡그린 표정으로 바라보다 어느 순간 벌어진 살인. 배경음으로는 브라스가 중심이 된 비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흐른다면 적당하다. 이후 살아남은 주인공은 의도치 않은 살인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경찰에 체포되거나 추격을 받는 그런 장면들이 이어진다. 어쨌든 불행의 시작이고 이는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전개되는 소설이나 영화, 연극에서는, 주인공이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심리와 행동 분석을 관객들의 판단에 맡기고, 주인공의 살인 행위에 대한 유죄 여부를 가리는 것과 그에 결과에 따른 삶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 변화에 시선이 옮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런 전개에서 개인적인 삶에서든 사회적 제도나 법, 현실에서든 어떤 "부조리한 것"들을 직면하는 주인공 또는 등장 인물들을 보게 된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들로 죽거나 죽임 당하지만, 그러한 죽음들로 개인의 삶은 강력하게 변화되기도 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죽음을 통해 더 성장하고 성찰한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의 삶을 다루는 소설, 영화 그리고 연극에서 빠질 수 없는 확실한 소재이다.               



  이튿날 변호사가 나를 만나러 형무소로 왔다. 키가 작고 통통한 사람으로 꽤 젊었는데 머리카락은 공을 들여 올려붙인 모습이었다. 날씨가 더워서 나는 셔츠 바람이었는데 그는 검정 양복을 입고 끝이 접힌 정장용 칼라에 희고 검은 줄무늬가 교차된 이상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서류 가방을 내 침대 위에 올려놓은 뒤에 자기소개를 하고 내 서류를 검토해 보았노라고 말했다. 어려운 사건이긴 하지만 내가 그를 믿어 준다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내 사생활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최근 양로원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고 마랭고에 가서 조사를 해 봤는데, 그 결과 내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실은 당신에게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상당히 거북합니다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내가 답변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이 검사 측에 중요한 반박 자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가 협력해 주기를 원했고 그날 마음이 아팠느냐는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받고 나는 놀랐다. 만약 내가 그런 질문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면 상당히 거북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물어보는 습관은 없어진 지 오래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건전한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얼마간 바라기도 하는 법이라고 말하자 매우 흥분한 듯 변호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예심판사의 방에 가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렇지만 나는 원래 감정은 뒷전이고 육체적 욕망이 먼저라고 설명했다. 엄마의 장례식 날도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것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변호사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내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그건 사실이 아니거든요."


  내 대답을 들은 그는 협오스럽다는 듯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아무튼 양로원 원장, 직원들이 모두 증인으로 나와 심문을 받을 텐데 그러면 그게 내게 아주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그런 얘기들이 내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지만 그는 내가 재판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는 게 확실하다는 대답만을 했다. 그는 화난 얼굴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를 좀 더 붙잡아 두고 그의 호감을 사고 싶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그것은 변호를 잘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런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내가 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귀찮기도 해서 단념하고 말았다.  <제2부 74-76쪽>


  뫼르소는 변호사를 만난 이후부터 자기가 사는 세상의 다른 면을 희미하게 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뚜렷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법정에서 자기 변호는 자기 자신이 주도적으로 할 수 없고 변호사가 주도한다. 피고인은 변호사와 상담 후 그가 지시한 대로 법정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솔직한 나의 발언들은 법정에서 유효한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불리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적절히 가공되어 변호사의 입을 통해 공개된다.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검사의 진술들과 양 측의 진술들을 판단하는 판사의 결정이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어느 쪽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진다고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진실과 판사의 결정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변호사와 검사는 피고인와 원고인이 볼 때 "내 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은 계속 자신의 생각대로 피고인과 원고인을 법정에 걸맞는 인간들로 유도하고 만들어 갈 뿐이다. 


  뫼르소가 변호사에게 "건전한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얼마간 바라기도 하는 법" 이라고 말한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을지 모르겠다. 이 말은 쉽게 생각하여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사랑하는 대상은 소중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미치게 만들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으로 인하여 기쁘고 절망하며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았으면 좋겠다. 

  


  갑자기 그가 일어서더니 사무실 구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서류함 서랍을 열어 은 십자가를 꺼내 휘두르면서 내게 다가왔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평소와 달리 거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압니다."


  그러자 그는 아주 흥분해서 빠른 말투로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만큼 죄가 큰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용서를 받으려면 뉘위치는 마음으로 어린애와 같이 정신을 맑게 비우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온몸을 책상 너머로 숙인 채 십자가를 내 머리 위에서 거의 휘두르다시피 했다. 솔직히 나는 그의 논리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너무 더운 데다 사무실에 있는 큼직한 파리들이 얼굴에 달라 붙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태도가 겁이 나는 동시에 판사가 하는 짓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결국 나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계속 말했다. 대충 알아들은 바로는 그가 생각할 때 내 자백에서는 오직 한 가지, 두번째 발사하기 전에 기다렸다는 사실이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다 납득할 수 있지만 그것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고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말할까 했는데 그가 내 말을 가로막고 다시 한 번 벌떡 일어서서 나더러 하나님을 믿느냐면서 훈계를 했다. 


  나는 안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분개하며 도로 주저않았다.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누구든지, 하나님 얼굴을 똑바로 대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신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게 그의 신념이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했다. 


  "당신은 내 인생이 무의미해지길 바랍니까?"


  그가 외쳤다. 내가 생각할 때 그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어느새 내 코압으로 다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한테 네 죄를 구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괴로움을 겪는다는 걸 못 믿나?"


  나는 그가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제 지겨워졌다.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별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벗어날 때 늘 하듯 그의 말에 수긍하는 체했다.


  "그것 보라고. 너도 믿고 있지? 하나님께 이젠 너를 바치겠지?"


  그가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동안에도 대화를 따라 계속되던 타이프가마지막 이야기를 받아 치고 있었다.


  "내 앞에 왔던 죄인들은 이 고통의 성상 앞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립니다."


  이윽고 그가 아주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려다가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 판사가 일어났는데 심문이 끝난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 


  그는 좀 지친 표정으로 내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느냐는 질문만을 던졌다. 나는 한참 생각한 뒤에 사실은 후회하는 것보다 권태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는데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일이 더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제2부 78-81쪽>



  뫼르소와 판사 간의 대화는 뫼르소가 이 세계의 "이방인" 임을 암시하는 대화였다. 판사가 보기에 뫼르소는 인간으로서 실격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판사는 뫼르소가 하나님 앞에서 참회할 것을 핑계로, 자신 앞에서 참회할 것을 유도하는 것 같고 그동안 그런 "죄인"들의 모습에 어떤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해 줄 도구로서의 "신"은 신이 아니다. 신은 누구에게나 같고 또한 누구에게나 다르기 때문에 신이다. 신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고 인간도 신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고 신의 생각을 알 수 없다. 이것은 신을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판사는 자기 자신이 신이거나 신에 근접한 아니면 신의 뜻을 대리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런 사람 앞에서 신을 믿지 않고 참회하지 않는 뫼르소는 철저히 "이방인"일 뿐이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나도 분명히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들이 별 의미가 없었다. 하루가 얼마나 길고 동시에 얼마나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내기는 물론 길었지만, 하루하루가 어찌나 길게 늘어지는지 하루가 다른 하루로 흘러넘쳐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루하루는 그렇게 이름이 사라지고 어제나 내일 같은 말만이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어느 날 간수가 내가 이곳에 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는 말을 해 주었을 때 그 말을 믿기는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언제나 같은 날이 내 감방으로 밀려오고 언제나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가 간 후에 나는 양철 밥그릇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내 모습은 여전히 정색을 한 얼굴이었다. 앞에서 흔들어도 보고 미소도 지어 보았으나 비친 얼굴은 여전히 심각하고 슬프기만 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내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형무소 모든 층 여기저기에서 저녁의 소리들이 침묵의 행렬로 올라오는 그런 시간이었다. 나는 천장에 뚫린 창문으로 다가가 마지막 밝음 속에서 다시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으나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비친 얼굴이 그렇다고 해서 놀랄 것도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여러 달 뒤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귀에 울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그동안 혼잣말을 해 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때 엄마 장례식 날 간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맞다, 정말 빠져나갈 길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누구도 형무소의 밤이 어떤지는 상상할 수 없다.  <제2부 91-92쪽>


  시간에 지배된 세계에서의 삶과 나의 생각들로 지배된 세계에서의 삶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누구도 그 생각들에 참견하지 않고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배고프면 식사를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으나 할 수 있는 것들은 정해져 있다. 하루하루가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을 가진 채 지나간다. 이것은 자유로운 삶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다른 삶들은 서로 교차되며 나선형으로서 하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 어느 한 쪽에만 오래 머무는 삶은 인간을 지치게 하고 미치게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유학생활의 한 단면을 묘사한 느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내 방에서의 밤이 어떤지를 상상할 수 없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는 것이나 예순 살에 죽는 것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경우든 당연히 그 후에는 다른 여자와 다른 남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그런 일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아무튼 지금이 됐건 이십 년 후가 됐건 언제든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라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다.  <제2부 126쪽>


  누구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카뮈의 글들에는 이러한 생각이 깊게 배여 있고, 그것이 "부조리하다"라고 생각한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인간의 삶은 늘 두려움과 고통스러운 삶일까? 그랬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았을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 "어쩌다"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삶이 죽음으로 종결되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나는 그 이유를 잘 안다. 당신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부조리한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 미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상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오지도 않은 세월을 거슬러 불어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날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내게 주어진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쓸고 지나가면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나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들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신의 하나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과 운명,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선택하거나 당신이 '나의 형제'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나? 사람들은 누구나 특권을 가진 존재다. 세상에는 모두 특권을 가진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당신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제2부 133-134쪽>


  사형 판결을 받은 뫼르소가 형무소 부속사제 앞에서 했던 절규의 일부분이다. 부속사제는 지속적으로 뫼르소를 만나기 원했고 뫼르소는 거부했다. 부속사제가 뫼르소에게 할 말들은 뻔했고 그 뻔한 말들에 대해 뫼르소는 대답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뫼르소의 생각들이 정리되고 결론에 이르렀을 때, 부속사제의 뻔한 말들과 뫼르소를 이해하는 듯한 행동은 뫼르소를 분노하게 했다. 죽음을 앞둔 뫼르소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뫼르소 자신 밖에 없다. 부속사제에게 뫼르소는 수많은 사형수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장에서는 슬픈 표정 짓고 울어야 하고, 법정과 형무소에서는 담당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다수가 그렇게 했기에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과 행동은 주체자의 의지가 없으면 누군가로 인하여 강제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상황은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박탈된 것이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고 있는 상황이다. 


  삶의 한순간이라도 내 것이 아닌 삶을 살았을 때, 어떤 사람은 치욕을 느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한순간이 아닌 매순간을 그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급기야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느낌조차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이 개인이 가진 특권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그 특권의 사용에 있어서 전제라면, 그 전제에 따라 자신의 말과 행동들을 순간마다 선택하여 특권으로써 사용하면 된다. 사실 법이 아닌 도덕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개인의 것이다. 


  뫼르소가 법정에서 불만을 느끼는 것도 그 부분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였던 태도와 평소 그의 취향과 생각들이, 아랍인 한 명을 죽인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그것이 아주 중요한 연관성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고 그 연관성은 뫼르소가 구제될 수 없는 사형수가 되게 했다. 물론 그런 과정 중에 변호사 그리고 판사와 한 면담들에서, 그들 눈에 뫼르소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고 그 "이상함"은 비호감으로 이어져 판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법정에서 그런 뫼르소를 아무도 도울 수 없었다. 그래서 뫼르소는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성찰하고 그에 따른 질문들에 스스로 대답해야 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언제라도 그 죽음을 불만없이 받아 들일 수 밖에.. 다만 그 죽음이 그럴듯한 죽음이길 바랄 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게 된 이후부터 인간의 삶에서 "실존"이 고민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자유"에 기반한 인간의 삶은 많은 이론들과 사상가들의 말들로도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같은 삶이 되었다. 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삶. 그것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실존"이 인간의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실존주의"는 20세기 사상사에 등장하는 한 사조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카뮈는 생전 자신이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사조를 대변하지도 않았다. 그는 철저히 자신이 고민하고 느낀 것들을 글과 말, 행동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 잠언 6장 5절



  이 책 123쪽에 오탈자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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