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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요조는 분명 착한 사람이었다 본문
비록 번역된 글이지만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다. 마치 읽는 내가 그가 묘사하는 상황과 느끼는 감정들을 체험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장들로 막힘없이 나를 빠르게 이해시킨다. 오래 전 그의 유작 단편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벼운 문체와 재미있는 시선들이 기억이 난다.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유독 <인간 실격>이 여러 추천도서 리스트에 있고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은 이 작품이 그의 문학에 있어 정점이라고 다수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보는 것일 수 있으나, 다자이 오사무가 죽기 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간결한 문장들로 절과 장을 채운 것이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밥상 위의 접시에서 정어리 새끼 포를 집어 들고 그 잔챙이들의 은빛 눈깔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술기운이 훈훈하게 돌기 시작해서, 마음대로 놀러 다니던 시절이 그립고, 호리키조차도 그립고, 정말이지 '자유'가 그리워서 문득 심약하게 울 뻔했습니다.
저는 이 집에 오고 나서는 익살을 연기할 의욕조차 잃어버려서 그저 오로지 넙치와 점원 아이의 멸시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습니다. 넙치 역시 저하고 속을 터놓고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피하는 것 같아 저 또한 그런 넙치를 쫓아다니면서 무언가를 호소할 생각 같은 것은 없어서, 거의 완전히 멍청이 식객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77p>
읽는 동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가 생각이 났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오오바 요조. 어릴 때부터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집안 분위기 속에 지내고 하인들의 성적 희롱을 당한 요조는, 그것에 반항하는 듯 자신의 본 모습은 숨긴 채 "익살"과 "어리숙함"으로 살아 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상경 후 호리키를 만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한 삶의 자유스러움과 슬픔, 고통, 희락을 알게 된다.
몇몇 독자들에게는 이 소설이 왕가위 감독의 영화 <타락천사>같은 색채가 강한 소설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 당시 고민이 많던 젊은이들이 전후 일본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과, 허례허식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세상을 괴로워 하면서 또한 그 세상에 순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느낄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이들이 가장 흔히 듣는 질문이자 머뭇거리며 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이제부터 도대체 어떻게 할 거니?", "앞으로 무엇을 할 거야?", "너는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냐?"
저는 일어나서, 급한 대로 우선 적당한 약을, 하고 생각하며 가까운 약방으로 들어갔다가 그곳 부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부인은 플래시 세례를 한꺼번에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쳐들고 눈을 크게 뜨더니 굳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크게 뜬 눈에는 경악의 빛도, 혐오의 빛도 없었고 거의 구원을 바라는 듯한, 그리운 듯한 빛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라고 생각했을 때 언뜻 그 부인이 목다리를 짚고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달려가서 부축해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여전히 그 부인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사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큰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넘쳐흘렀습니다. <124p>
소설의 후반부를 알리는 약방 부인과 요조의 만남. 불행한 사람들은 서로의 불행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처음 만났지만 서로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치 어떤 "장례식"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후 요조는 급속도로 아편 중독자가 되어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미치광이 폐인이 된 듯 살아간다. 그런 그의 삶을 가족들과 친구들마저도 "인간실격(人間失格)"이라고 생각하여 정신병원에 그를 감금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듯 하면서 조롱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134p>
소설의 결말은 "열린 결말"이지만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했듯이 주인공 요조도 자살 내지 고통스럽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생"(生)이 그를 지나간 것일까? 나는 그가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이제라도 평온하길 바란다.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요조는 분명 착한 사람이었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늙고 젊음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체험하고 그것에 따른 사색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상대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다. 어떻게 요조의 고민들과 그가 가진 삶의 통찰들을 "가볍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사는 나도 요조와 비슷한 고민들과 통찰들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어떤 통함이 있다.
개인적으로 민음사에서 번역된 책을 읽기를 권장한다. 흔히 "유다의 고백"이라는 다자이의 또 다른 단편 소설 <직소(直訴)>가 함께 실려 있는데 다자이 특유의 문체가 살아 있는 매우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 표지 그림으로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다자이와 에곤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짧은 동 시대를 살았지만 모두 젊은 날 단명했다. 애석하다.
나는 이 책을 10월 초 서울과 경남 사천 삼천포를 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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