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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우리가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 어찌하겠는가?" 본문
작년 11월 초부터 뮌스터 대학 국제관 "Die Brücke" 내에 있는 한국 도서관에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읽기 시작했고 일주일에 한 권씩 읽었다. 중간에 도서관의 내부 사정으로 2주 정도 읽기를 멈춰서 12권을 네달 만에 다 읽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서 조정래 작가의 책들을 직접 읽어보고 싶었고, 그의 세 편의 대하소설들 중 <아리랑>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읽게 되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일본, 중국 만주 일대, 러시아의 연해주와 미국 하와이 등 국내외에서 겪었던 조선인들의 삶들이 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마다 성격이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이 겪는 상황들도 다르다. 물론 인물들 간의 관계도가 설정될 수 있을정도로 내용 전개에 큰 문제가 없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삶들을 다 다루다 보니 후반으로 갈수록 내용이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는다. 분명 작가의 의도는 독립군, 강제 이주민, 국내외 사회주의 운동, 친일파, 조선에 정착한 일본 관료들과 지주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들의 삶들을 최대한 고발하고 묘사하는 것에 있다. 그렇지만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들의 삶들을 전부 표현하려고 한 것은 작가의 과욕처럼 보인다. 그래서 소설을 다 보고 난 후에 아쉬운 질문들이 내게 남았다. 하와이로 강제 이주된 방영근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동생인 보름이와 대근이를 다시 만났을까? 악덕 지주이자 읍장인 하시모토와 친일파 장칠문, 양치성, 서무룡은 해방 직후 무슨 짓을 했을까?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한 송중원, 가원 형제와 동학당이었던 지삼출, 의병이었던 손판석, 사회주의 운동가 정도규, 전동걸 일파들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소설의 중심 소재 중 하나인 잃어버린 땅들은 해방 직후 다시 원래 주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작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거나 미약하게 암시할 뿐이다.
「아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다요. 나넌 시방도 젊은 가시네덜보담 곱쟁이로 빨르게 산 타는 기운이 펄펄허고, 총 쏘는 기술도 있는 것이야 아재덜도 다 알덜 않소. 글고, 나도 대근이헌티 귀동냥얼 히서 알 만치는 아는디, 공산주의자가 어디 따로 있다요? 거그서 갤치는 대로 믿고 따르먼 공산주의자제. 못사는 사람덜 편들고, 못된 지주놈덜 쳐없애고, 여자라고 하시 안허고, 독립투쟁에 나스는 공산주의가 나넌 좋소. 긍게 나도 공산주의자 아니란 법 없덜 않은게라? 」 <10권: 달빛 속의 진혼곡 편, 163p>
<아리랑>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를 남성의 시각으로 묘사한 대하소설이다. 그래서 이후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을 생각인데, 이 책은 여성의 시각에서 묘사한 대하소설이기에 읽고나면 좀 더 자세한 당시 상황들과 사람들의 삶들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리랑>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현실에 순응하는 성격과 태도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항간에 이 책이 여성에 대해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성적 대상으로만 묘사되었다는 말들이 있는데, 그 말들은 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면 손필녀가 소설 후반에 중국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모습들은, 의병이었고 일찍 만주에서 일본군들에 의해 죽은 남편 배두성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녀와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방수국, 공산당의 열성당원이었던 윤선숙, 최현옥, 조선의 명창이자 친오빠 차득보를 위해 집과 땅을 구입해 주고 후에 송가원을 연모하여 만주까지 찾아가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차옥비 등 작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또한 "신여성"으로서 일본 유학 중 알게 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허탁과 송중원을 돕다가 후에 친일로 돌아선 박정애, 일본인이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간 지요코, 전형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지만 자기 자식들을 독립군으로 내어줄 정도로 강단한 면이 있는 감골댁, 방보름, 홍씨 등은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느낄 수 있었던 등장인물들이었다. 작가는 그 시대에 있을법한 여성들의 삶들을 최대한 묘사했고 그 삶들은 개인의 선택들에서 비롯된 주체적인 삶이었다.
송가원은 그 달빛 속에서 가슴을 온통 서러움으로 적시고 있었다. 벌판에 가득한 달빛을 쓸어낼 수가 없듯이 가슴을 가득 채운 서러움도 몰아낼 길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것이 이다지도 깊고 진한 서러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향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만주벌판에 뿌린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버지와 정을 나눈 세월이 너무나도 짧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송가원의 옆에는 옥녀가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옥녀는 흐드러지면서도 한스럽게 밝은 달빛을 바라보며 애간장 녹아내리는 서럽디서러운 가락으로 속소리를 뽑아대고 있었다. 이 막막하고 허허로운 타국땅에 뿌려진 혼백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었다. 그분이 송가원의 부친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가슴 찢어지는 서러움과 아픔이 못 견디게 괴로운 것은 다름이 없으리라 싶었다. 평생을 나라 찾는 데 바치다가 끝내는 옥사하고 뼈만 억울하고 분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뼈마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송가원의 부친은 더 기막히고 한스러운 죽음이었다. 이런 세상을 알게 되었으니 만주에는 백번 잘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권: 달빛 속의 진혼곡 편, 165p>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로 인하여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설정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겨진다. 크게는 감골댁의 자제들인 방영근, 대근과 송수익 일가로 압축될 수 있는데, 나는 송수익 일가의 삶을 통해 이 소설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양반가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했던 송수익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시작으로 민족주의 입장에서 공화주의를 기치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에 입교하고 독립단체들에 참여하지만,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신경 감옥에서 옥사한다. 어렸을 때 이후 아버지의 생사를 알지 못한 송중원, 가원 형제는 고보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평생 독립을 위해 투쟁한다. 이 세 남자의 독립운동들은 있던 장소만 다를 뿐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다. 사회주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한 송중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징역을 살고 난 후 불령선인으로 일본의 감시를 받았고 이후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소극적 독립운동을 재개했지만 그마저도 일본 경찰에 제재를 받고 다시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의사였던 동생 가원은 교도소에서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지만 몇 달도 안되서 화장된 아버지의 유골을 만주땅에 뿌려야 했다. 이후 가원은 독립군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하면서 해방 때까지 살아남은 듯 하고, 죽을지언정 일제에 전향하지 않는 강단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아들 가원이 아버지 송수익을 만주 땅에서 장사한 후 했던 독백이 당시의 독립운동을 했던 일가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름과 무덤 없이 전사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호사로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들은 비슷했다. 한 전투에서 100명이 넘는 일본군들을 죽였더라도 다시 밀려온 일본군들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독립군들이었고, 전염병이나 밀정에 의해 객사하거나 고문사와 옥사는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가족과 친구들의 생사도 알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감골댁 자제들이 평민들의 독립운동이었다면 송수익 일가의 독립운동은 유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던 진보적 양반들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외에도 <아리랑>은 두 계층이 어떻게 일제에 맞서 자신들의 삶들을 지키고 개척했는지 비교하듯 묘사하고, 당시 두 계층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즉 독립운동은 신분평등을 가능하게 했다.
조선족에게 쏘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쏘련은 왜 조선족을 이렇게 핍박하는가. 전인류적 해방을 외치고 있는 공산주의 모국 쏘련이 왜 이 모양인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쏘련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다 거짓이고 위장인가? 아니, 강제이주를 시키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자. 우리에게 알릴 수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정당하게 사람 대접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왜 할 일은 제대로 안하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가. 제놈들에게 사람을 개 잡듯 죽일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죄인이고 노예라 해도 이렇게 가혹하게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짐승도 이렇게 취급할 수가 없다. 흉악무도한 놈들! 인민해방, 인민혁명, 인민의 천국, 전인류적 해방, 약소민족의 독립 자원, 새빨간 거짓말! 도둑놈들! 사기꾼 집단!
윤선숙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 속에 눈물을 쏟았다. 소련의 혁명 완수를 위해 백군과 일본군을 물리치려고 싸우다가 불구가 된 남편이 총구 앞에서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만 미칠 것만 같았다. <11권: 쌀밥 편, 29p>
작가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과 방식들을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묘사한다. 민족주의 운동보다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 강점기 때 돋보였던 것은, 중국과 러시아로 대변되는 국제 공산당 세력이 상대적으로 막강했고, 그들을 도움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조선민족끼리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 공산당은 자기들 땅에 이주해온 조선인들과 어느 정도 협력하였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시기에 따라 일본군에 대항하여 조선 독립군들과 연합작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두 나라의 공산당들은 조선 독립군들과 독립운동가들을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했고,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그들의 희생을 자국민들보다 우선했다. 특히 민생단 사건을 빌미로 많은 조선인들을 일본의 첩자로 오해하여 죽였다. 한편 국내 사회주의 운동은 일본의 집요한 수사와 검거로 지하조직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이론적 논리들은 힘없는 구호나 관념적인 이상이었고 그 충격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활동했던 당원들에게 클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분노했던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소련 공산당 총서기장인 스탈린의 명령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던 조선인들 20여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그들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처우는 잔인했다. 이주 중 기차 안에서 그리고 도착지인 타슈켄트에서 남녀노소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병과 고역으로 죽었고, 분노한 조선인 열성당원들은 당에 항의 표시를 했지만 러시아 공산당 비밀경찰들에게 잡혀가 죽었다. 같은 편이라 믿고 열심을 다해 충성하여 공산주의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국제 공산당원들은 그 차가운 당의 배신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공산당들이 표방하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일국 일당 원칙으로 „독재자“를 앞세운 전체주의일 뿐이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정치 이념을 이용한 것이다. 진정 막스와 레닌이 바라던 세상이 그런 것이었을까? 수많은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의 이상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죽음을 당했고, 지금도 "빨깽이" 취급을 당하며 역사적으로 왜곡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고 독립운동가로서 동등한 대우와 정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삼월이가 바다에 빠져 죽은 후로는 죽는 것이 허망하고 무섭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삼월이는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얻어맞기도 많이 얻어맞았다. 마루야마는 성질이 거칠은 만큼 매질도 무지막지했다. 아가씨들이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매질을 하는 마루야마가 돈벌이인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삼월이는 온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도록 두들겨맞으면서도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이었다. 맞는 것이 너무 딱해 아가씨들이 나서서 여러 말로 삼월이를 달래고 타이르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삼월이는 그 짓을 하는 게 죽기보다 싫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맞으면서까지 군인을 받지 않으려는 삼월이의 마음을 아가씨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맞는 것으로 군인을 안 받는 게 아니라 맞고 나서 그 짓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가씨들을 삼월이는 결국 맞아서 죽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삼월이는 마루야마에게 붙들려 군병원으로 끌려갔다. 삼월이는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삼월이는 거기를 수술받은 것이었다. 거기가 너무 작아서 거기를 찢어 키우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었다. 삼월이는 열흘 만에 돌아왔다. 마루야마는 그날로 삼월이의 방에 군인을 밀어넣었다. 그런데 군인을 물어뜯고 떠밀고 하는 소동은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그날 밤 삼월이는 기절을 할 만큼 심하게 맞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삼월이가 보이지 않았다. 해질녘에 찾아낸 삼월이는 바닷가에 둥둥 떠 있었다. 뒤늦게 찾아낸 삼월이의 신발은 작고 판판한 바위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 긑이 서북쪽을 향해 있었다. <12권: 패전의 길 편, 234p>
12권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과 함께 복실이와 순임이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묘사한다. 소설의 전개 말미에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과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읽어보니 조정래 작가가 이 내용을 반드시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 싶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단편소설 같았고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구체적이었고 안타까움이 느껴질 정도로 감성적인 면이 있었다. 그리고 어릴 때 보았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윤여옥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지금의 일본 정부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부정하며 강제 징집된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왜 일본과 친일파들은 그녀들에게 사죄하지 않는 것일까?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질문들은 여전히 대답을 해야할 사람들을 앞에 놓여 있으며, 할머니가 된 위안부 소녀들은 죽기 전까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체질화되어 있는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은 돈이 절대권능을 발휘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천민자본주의가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횡행한 이 사회의 40년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들이 누구인가?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파렴치한의 표본이 아닌가. 그들이 저 대통령에서부터 사회 구석구석의 기득권을 장악한 채 40년을 지배한 이 땅에 어찌 정의가 있고 양심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천민자본주의도 바로 그자들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아리랑>을 통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도 소상히 쓰려고 노력했고, 그들이 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12권: <아리랑>을 마치며, 325p>
조정래 작가는 7권과 10권 "작가의 말"에서 그리고 12권 "<아리랑>을 마치며"에서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적었다. 특히 작가는 1994년 소설 집필 당시, 어느 여론조사 기관의 20대와 대학생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23%가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나면 참전하지 않겠다"고 답한 것과,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21%가 "과거사를 놓고 일본에 반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답한 것에 놀라움과 근심을 표했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때 10%도 안되는 친일파들이 90%이상의 조선인들의 삶을 망쳤기 때문이다. 지금을 기준으로 24년 전에도 20대라면 대다수가 최소 고등교육을 공부한 소위 "지식인"들이었고, 작가의 말처럼 만약 "우리가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 어찌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들 중 10%정도가 "일본과 협력하겠다"고 한다면, 한국은 언제라도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수십년간 여전히 독도 영유권 주장과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려는 움직을 보여 그 결실을 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유사시 한반도에 있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위대를 파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일본은 여전히 "적"으로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사에 대한 공부와 성찰은 지금과 다음 세대들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해방과 남북분단 모두 100년을 향하고 있으니 다음 세대와 지금의 일부 20대들에게는 "지나간 일들"로 생각될 수 있다. 더욱이 지난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소홀이 여기며 일본과 위안부 보상 협상을 "불가역적"으로 체결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행히도 지금의 정부는 과거사 문제들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고, 많은 20대 젊은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나마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자주 대한민국과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한 적극적 의식들과 시민운동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실행되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보상없이는 과거사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작가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까지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삶들을 소설에 옮긴 것은, 최대한 그 시대상을 고발하여 독자들에게 역사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과 동시에, 그 같은 상황에서 독자들은 그 삶들 중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 묻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소설 <아리랑>에서 보여준 작가의 문제의식들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일제는 160여만 명을 강제징용했고, 30여만 명의 여자들을 위안부와 정신대로 끌어갔고, 4천5백여 명의 학도병을 포함해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40여만 명이었다. <12권: 아이누족의 온정 편,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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