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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론] 광마의 죽음은 그래서 슬프다

EAST-TIGER 2018. 9. 2. 07:39


  뮌스터 한인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작년에 한국에 있었을 때 마광수 교수가 별세했다. 그의 글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그에 대한 추모는 막연한 안타까움이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의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물로 법적 고발되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고 뉴스에서도 재판이 있을 때마다 보도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우리 사회가 마광수 교수의 덕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박사 논문인 <윤동주 연구>는 시인 윤동주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중, 고등학생들이 그의 시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인증"을 위해 몇 명의 사람들만 읽은 학위 논문들이 해마다 각 대학 도서관 논문 보관소에 쌓여만 가는 것을 볼 때, 한 편의 박사 논문이 사회 전체에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또한 마광수 교수는 생전 한국의 왜곡된 성(性) 지식과 문화를 비판하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성 의식을 갖도록 여러 문학 작품들을 썼으며 강연 활동을 했었다. 아쉽게도 시대를 잘못 만나고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의 생각들은 외면 당하고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아마 그가 지금 시대에 젊은 교수이자 지식인으로서 활동했다면,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야한 동영상들과 사진들, 글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시대에 그의 생각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고,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어 그가 좀 더 과감한 생각들과 행보들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자유를 논했고, 교수이자 시인, 그리고 화가였던 그가 항년 66세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얼마나 한국 사회와 사람들이 그를 외면했고 미워했는지 느껴지게 한다. 마광수 교수의 생각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기억하며 뒤늦은 개인적 추모를 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생각들과 나의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읽었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들과 동의 할 수 없는 부분들을 표시했다. 나는 그가 양성평등주의자 또는 최소한 페미니스트였다고 생각한다. 이후의 글에서부터 나는 그의 별명인 "광마"로 그를 지칭하겠다.    


  책 표지의 그림은 광마가 1993년 10월에 직접 그린 그림이다. 



  '야하다'는 말은 아직도 천박하다는 뜻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야하다는 말의 의미를 '野하다'로 생각하여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을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가꿔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온몸에 울긋불긋 채색을 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벌거벗고 살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허위와 가식이 없이 자연스런 본성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야한 정신'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인위적인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무한하고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융통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야하다는 것은 그런 다양성을 일정한 틀에 가둬 버리려는 수구적 보수성에 대립하는 진보적 의미를 갖는다.  <제1장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18쪽> 


  나는 얼굴 자체가 예쁜 여자보다는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르는 여자, 항상 송곳같이 뾰족한 굽의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여자를 좋아한다. 손톱은 항상 변화있게 자라나고, 또한 갖가지 색깔의 매니큐어를 바꿔가며 칠할 수 있으며, 뾰족구두 역시 여러 가지 색이나 모양으로 바꿔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긴 손톱과 뾰족구두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복합적으로 연상시켜 나에게 다양한 관능적 상상을 불러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정신적 성감대가 발달했다고 하는 의미는, 말하자면 나처럼 그로테스크한 공상이나 퇴폐적인 환상에 빠져들기 좋아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자든 남자든 성적 상상에 기초한 변칙적 성희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성애를 즐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사람은 에로틱한 기쁨을 누릴 자격도 없고, 또 누릴 수도 없다. 그런 꽉 막힌 '변태'들(성적 결벽증이야말로 진짜 변태다. 주로 잘났다고 으스대는 제도권 지식인 중에 많다)은 여자가 손톱을 정성껏 길러봤자 '불결하고 흉칙하다'고만 생각한다. 또 남자가 한껏 화사하게 멋을 내봤자 '남자답지 못하다'고만 생각한다. 정신적 성감대가 전혀 발달해 있지 못한  탓이다. 


  나는 지금도 계속 '진짜로 야한 여자'를 찾아 미칠 듯 헤매다니고 있다. 내가 찾고 있는 여성은 한다미로 말해서 '나의 관능적 상상력에 쿵짝을 맞춰줄 수 있는 여자'라고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사랑은 남자의 '관능적 상상'과 여자의 '관능적 상상'이 합쳐질 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두 사람에겐 어느 정도의 '합리적 지성'이 필요하다. 성에 터무니없는 신성화(神聖化)나 이중적 위선, 그리고 성적 상상력을 기초로 한 문학작품에 대한 모럴 테러리즘 등은 모두 다 '무지'에서 비롯된 '합리적 지성의 부재(不在) 상태'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필요한 지성이란 결국 '야한 정신'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제8장 성감대로서의 '정신'에 대하여, 88-89쪽>


  광마의 "야하다"는 표현은 본능적이고 거짓 없는 인간의 자유 의지 발현이 밑바탕이다. 그리고 여기에 성적인 상상력과 감각의 예민함이 추가되면 이 표현은 완성된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개성과 매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개인의 개성과 매력을 스스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모르는 경우 남들이 그것을 먼저 발견하고 알려 주어서 아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故 신해철은 엄정화 1집 타이틀 <눈동자>를 작곡하고 청순가련으로 컨셉을 잡았던 그녀를 섹시하고 에로틱한 컨셉으로 바꿀 것을 주문했고, 결과적으로 "섹시 디바" 엄정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신해철은 엄정화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발견했고 그 매력이 대중들을 자극할 수 있는 상상력이 될 수 있도록 이끈 것이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도 엄정화는 확실한 컨셉을 가진 뮤지션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광마는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만으로도 "진짜로 야한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2000년대 이후부터 다수의 여자 아이돌 가수들과 여자 연예인들이 섹시 컨셉으로 활동하고 있고, 다양한 패션으로 자신들의 섹시함을 드러내는 여자들도 사회에 많아졌다. 예전에는 배꼽티만 입어도 사람들로부터 "문란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요즘은 여름에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여자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것이 단순히 유행에 따른 패션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자들이 자신들의 패션을 스스로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야함"을 알아야 한다. 이 "야함"은 옷이나 화장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생각의 참신성과 정열적인 삶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외모와 삶이 "야하다"는 것을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한 자의식이다. 그 의식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는 활기이자 인간과 동물이 모두 가진 보편적 능력이다. 인간 개개인의 취향은 다르기에 그 "야함"의 정도는 다르고 그 "야함"에 이끌리는 사람들도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의 "야함"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이 어떤 취향의 사람을 선호하는지 알 수 있다. 물건을 구입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자신의 취향이 있듯이 여자와 남자를 선택할 때도 취향이 있다. 그리고 그 취향이 서로 맞아야 재미있는 연애와 교제를 할 수 있다. 단지 외롭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를 만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만남도 없다.     



  야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1992년 10월에 내가 형사범으로 전격 구속되기까지 한(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세계 최초의 사건이다)「즐거운 사라」사건에 대한 대한민국 대법원의 최종 판결문은, "공연히 성욕을 자극시켜 보통 사람들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치며,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어긋나는 내용이기 때문에 유죄다"로 되어 있다. 이런 식의 어이없는 법적·도덕적 폭력은 에로티시즘 예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 측면과 생산적 효용성을 놓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성의 개방화 시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성욕의 자유로운 대리배설은 아직은 머나먼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는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집단적 기만으로 얽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솔직한 대중들은 점점 더 보다 떳떳한 성욕의 대리배설을 원할 것이고, 거기에 발맞춰 에로티시즘 예술은 기존의 수구적 봉건윤리를 항상 앞서갈 것이 틀림없다. 합리적 지성이 부재하는 정치적·문화적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에로티시즘 예술을 시급히 양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제12장 '에로틱 아트'의 활용에 대하여, 126쪽>


  광마는 자신의 소설 <즐거운 사라>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소설에서 논란이 된 부분들을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별로 선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1992년에는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이 될 정도였고 현재는 그보다 더한 성애 묘사가 여러 소설들에 등장하고 있다. 정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 이 사건의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일본의 대문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러 소설들에서 마조히즘적인 성애 묘사들을 했고 페티시즘을 비롯한 탐미주의적 묘사들을 즐겨 했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린 문학상이 있을 정도로 그의 소설들에 대한 문학적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소설의 내용과 상관없이 성애 묘사가 등장하면 외설이냐 아니냐의 논쟁을 일어나고 이 논쟁은 예술계 전반에 만연하다. 특히 연극계와 영화계에서 이 논쟁은 최근까지 활발했다. 

  한국에서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언제나 비주류로 평가되었고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 활발한 "#metoo" 운동은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더욱 위축시켰고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경향은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한다. 성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합법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사회 내 없다면, 성범죄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예술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지금의 예술은 단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체 하는 사람들을 위한 허영의 수단으로 보여진다. 그러니 새롭고 창의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보기 힘들다. 독일에서는 해마다 카니발 기간에는 대통령과 수상들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을 성적으로 묘사하여 조롱하는 퍼포먼스가 길거리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한국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예술 작품으로 조롱했다고 그 예술가를 검찰에 고발 조치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이 개방된 것이 아닌 개방된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 중인 것 같다.


  현재 상황으로는, 남자들이 평생 동안 찾아헤매는 여성은 결국 '제2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자 없이 혼자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면 또 몰라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원하는 경우라면 '순한 여자'나 '편한 여자'의 이미지를 사랑의 '무기'로 삼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에 섹스 문제에 대한 '개방적 사고방식'이 뒤따라야 하는 건 물론이다. 

  '야한 여자'는 결국 '순한 여자'이다. 야한 여자는 기가 센 여자고 순한 여자는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대학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번번이 느끼게 된 것은, 기가 센 여학생의 경우 남자 없이 홀로 서서 직업인으로 성공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녀가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대부분 행복한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대학생들 중에는 애인을 구할 때 자기보다 좀 낮은 학벌(고등학교 졸업이나 전문대학 재학 등)을 찾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학벌로라도 여자 위에 군림해 보겠다는 서글픈 몸부림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순한 여자와 '편한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의도 자체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
 
  성애에는 용감하면서도 기질적으로는 순한 여자, 그런 여자가 차츰 늘어나게 될 때, 그제서야 한국 남성들은 '봉건적 촌티'에서 벗어나 세련된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제16장 '순한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167쪽>

  남자들이 "제2의 어머니" 같은 여자를 평생 동안 찾는다는 것과 성애에 용감하면서도 기질적으로는 순한 여자를 원하는 광마의 생각에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광마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일반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광마의 말대로 남자와 여자가 "야한 정신"을 통해 자신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들이 바라는 여성상과 남성상은 개인의 취향에 있는 것이지, 일반화된 어떤 대상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편안함과 섹시함을 갖춘 남자와 여자를 다수가 선호할 수 있지만, 개인의 취향이 세분화 되고 있는 지금은, 남자와 여자가 생각하는 이상형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경제적 능력을 결혼의 최우선 조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고, 그에 따른 직업과 재력 또는 사회적 위치들을 다양하게 고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특이한 성격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성애에 용감하면서도 기질적으로 순한 여자"가 "야한 여자"라면 광마가 바라는 "야한 여자"는 단지 남자들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존재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광마의 생각은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자신의 "야함"을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사람들과 사회 내의 활기를 일으켰으면 하는 것이 광마의 바람이 아니었던가? 성격이 순한 여자로만 "야한 여자"의 개념이 국한된다면, 광마의 "야한 정신"은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원칙적으로 모든 여성들은 다 '부드러운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 정해준 법칙상 딱딱한 쪽이 남자요, 부드러운 쪽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딱한 여성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은, 역시 사회 환경이나 교육의 영향 탓이라고 본다. 덜돼먹은 남자들이 '순결한 여자'만 찾아대는 것도 한 원인이고, 여권신장운동으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두드러진 것도 한 원인이다. 말하자면 정숙한 여인 티를 내어 남자들에게 책잡히지 않겠다는 생각과 남자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여성들을 딱딱한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드러운 여성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성에 헤픈 여자나 남성에게 복종하는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여성은, 유연성을 여성 특유의 무기로 삼아 더욱 당당하게 남성들과 겨룰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무조건 남성적 매너만 곁들이면 그것이 곧 주체성 있고 자존심 있는 여성의 상징이 된다고 착각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게 문제이다. 

  그러므로 조금만 마음을 고쳐먹고 훈련을 쌓아나간다면, 모든 여자들은 다 부드러운 여성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가 있다. 

  '부드러운 여성'은 사실상 '관능적인 여성'과 통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제껏 '관능적 여성'의 이미지를 짙게 화장하고 섹시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로만 생각해 왔다. 물론 부드러운 여성이 외양까지 관능적으로 꾸미고 다닐 수 있다면, 그건 더 말할 나위 없이 금상첨화이다. 하지만 '딱딱한 여성'이 오직 외양만 관능적으로 차리고 다닌다면, 일시적으로 남자들을 유혹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름다운 사랑을 영속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기술부족으로 화장을 짙게 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이 한없이 부드러울 수 있을 때, 그런 여성은 결국 사랑에 당당할 수 있고 성애가 주는 행복감을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제17장 부드러운 여성'에 대하여, 172-173쪽>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야한 여자"에 대한 광마의 부연이다. 그래서 광마가 바라는 여성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언급되는 광마의 여성상이 편협하다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광마의 개인적인 생각들로 채워진 에세이다. 동의할 것들은 동의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넘어가자.  

  광마는 부드러운 여성의 다섯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예민한 감수성. 2. '받고 싶은 애욕'에 대한 솔직성, 3. '주고 싶은 애욕'에 대한 솔직성, 4. 겸손한 매너, 5. 페팅의 기교. 나는 이 특징들을 다 가진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여자나 남자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한 마음과 행동을 보인다면, 이 다섯 가지의 특징들 중 일부가 포함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사실 인간이란 고귀하지도, 순결하지도, 존엄하지도 않은 존재다. 부모라고 해서 완벽한 인격을 갖출 수 없고, 완벽하게 자식을 만족시켜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된다. 부모 역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자신의 감정을 '화풀이'하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고, 그 대상이 엉뚱하게 자기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부모의 일방적 성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말하자면 부모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요, 자식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은 그저 '우연히' 맺어졌을 뿐이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낄 필요도 없고, 부모를 너무 미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인간의 정체를 판단하고자 할 때,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본능적 욕구를 기준삼아 판단하는 것이 좀더 현명한 방법이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이해할 수 있으면 우리는 누구나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악(惡)한 심성도, 이미 나 자신의 본능적 욕구 안에 포함돼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보도록 노력하자. 모든 사람의 본성 속에 남아 있는 '어린아이의 속성', 즉 사랑과 동정과 이해를 받으려는 욕구를 이해하도록 애쓰고, 또한 나 자신이 갖고 있는 그런 속성도 될 수 있는 한 솔직히 드러내도록 애쓰자. 비틀리고 꼬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단순·솔직한 사고방식을 체질화시킬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진다.  <제19장 사랑에 눈 머는 까닭에 대하여, 194-195쪽>  

  이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광마가 이해하는 인간과 그의 삶이다. 이 부분에서 언급한 광마의 생각은 내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 비슷하다. 

  나는 흔히 말하는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과 욕망을 받으며 자랐다. 가끔은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커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도 보냈었다. 그러나 내가 성인되어 생각과 이해의 폭이 점점 넓어졌을 때, 언제나 강하고 능력 있던 부모님에게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은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때로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치게 한다. 이런 극단적인 태도는 그 대상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국한된다. 일반 사람들에게 이런 감정과 태도를 가질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나를 미치게 한다. 부모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기에 지금도 나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고, 나 역시 언젠가는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부모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광마와 달리 부모님께 감사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어쨌든 여러 이유들 중에서 부모님의 사랑과 광기 역시 지금의 내가 있게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간다. 그 방식들이 유사해 보일 수 있고, 특이할 수 있지만 욕망이 근저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들에 관심이 많았다. 광마의 말대로 선악과 시비를 기준으로 인간을 판단한다면, 인간이 가진 본능과 욕망의 가치가 부정될 수 있다. 선악과 시비는 법과 제도 또는 다수의 동의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고,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것들이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들을 이해하고 통찰할 때, 인간과 나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된다. 인간의 말과 행동은 일단 "-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실현되어야 기쁨을 느끼고 실현되지 않으면 슬퍼진다. 
 

  자식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함으로써, 자식으로 하여금 모친고착(母親固着)이나 부친고착의 콤플렉스를 갖지 않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식이 부모에게 무작정 의존하지 않게 되고, 또 아들의 경우라면 그가 결혼한 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지 않고 원만한 부부생활을 해나갈 수가 있다.

  이렇게 자식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격체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설사 이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자식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동시에 '사랑에 솔직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자식에게 가르치고, 또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생관을 길러나가도록 북돋워준다면, 자식은 이혼에 이르게 된 부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든, 모든 사랑문제의 해결책은 요컨대 다음 세 가지로 귀결된다.

  첫째는 과거도 필요없고 미래도 필요없고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나 친척도 필요없고 친구나 동료도 필요없고 오직 '나'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만나고 헤어짐에 있어 어느 쪽에서 먼저 꼬드겼느냐 어느 쪽에서 먼저 차버렸느냐 하는 투의 '원인규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23장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에 대하여, 230-231쪽>


  개를 기르는 사람은 특별히 정이 많고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정이 많은 사람이 혼자 살 경우 개를 기르며 따스한 체온을 접하면 심신의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한다. 정도 없고 외로움을 타지도 않는 사람은 개를 꼭 기를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이 개를 기르게 되면 밥조차 굶기기 쉽다.
 
  아이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아이를 기를 수는 없다. 모성애나 부성애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라고 해서 다 애완용(이 말에 오해 없기 바란다) 아이를 기를 필요는 없고, 또 길러서도 안 된다. 아이는 역시 아이를 잘 기를 수 있는 사람이 길러야 한다. 독신자라고 해서 아이를 못 낳을 것도 없고 못 기를 것도 없다. 남편은 싫고 아이만 좋다고 하는 당당한 미혼모도 있을 수 있고, 아내는 싫고 아이만 좋다고 하는 당당한 독신남도 있을 수 있다.
 
  아이를 기를 때 명심해야 할 사항은 기대감이나 보상욕구 같은 것을 갖지 말고 그저 귀엽게 '내리사랑'으로만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는가는 아이의 체질과 노력에 달렸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무리 치밀한 가정교육을 실시한다고 해도 아이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아이는 인간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가정교육'이란 자칫하면 '엄한 가정교육'이 되기 쉽다. 엄한 가정교육은 마치 물에다 소독약을 치는 것과 같아서 물고기를 결국 죽게 만든다.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긴 하되, 아이가 노는 물은 개천처럼 약간 흐린 상태로 그냥 놔두는 게 좋다. 그래야만 아이가 야하고 자유롭게 놀 수 있고, 잘하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자식이 없는 집안에서도 아이를 입양(入養)하기를 꺼려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이를 '애완용'으로 기르기보다 '노후 대책용'으로 기르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의 고아를 양자로 데러가는 이유는, 아이를 오로지 '애완용'으로 기르겠다는 의도가 입양의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피가 다르고 인종이 다른 양아들·양딸에게 어찌 지극한 효도 같은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물론 서양 사람들의 육아관이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것이 초 스피드로 변해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자식문제에 있어서도 구태의연한 윤리관을 탈피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생식을 위한 섹스'의 시대가 아니라 '쾌락을 위한 섹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제34장 성애의 결과로서의 '자식'에 대하여, 334-335쪽> 


  나에게 결혼은 자식을 낳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결혼은 행복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 행복은 나와 내 여자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식은 사랑의 결과로서 태어나는 것이지,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결혼을 일찍 하고 싶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 일찍 했다면 좀 더 무거운 책임감과 가정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아마 유학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들과의 사랑과 연대감으로 어떤 위로와 감사를 느꼈을 수도 있다. 어느새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결혼에 대한 생각들은 계속 하고 있다. 그 생각들은 자세하거나 추상적이지만 밑바탕은 "행복"이다. 나와 내 여자는 서로 행복하기 위해서 연애를 하는 것이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행복과 그녀의 행복이 서로의 행복이 될 수 있도록 이기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것이다. 

  만약 자식이 나와 내 여자의 행복을 파괴하려 든다면 나는 그것을 허용할 수 없다.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지만, 자식이 그 이상을 요구하면 나는 거부할 것이다. 나는 내 여자가 자식으로 인하여 힘들어하는 것이 싫고 나 역시 그렇다. 그리고 언젠가 내 여자가 내가 아닌 자식을 키우는 재미로 결혼 생활을 한다면, 그것 역시 내게 큰 슬픔이 될 것이다. 나와 내 여자는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 자식이 결혼 생활 유지의 의미가 되거나 어떤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자식을 어떤 보상심리로 키우고 싶지 않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 나와 내 여자에게 돈과 명예를 줄 수 있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자식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식을 내 여자 다음으로 사랑하고 아낄 것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식의 삶은 자식의 것이고 나와 내 여자는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주면 된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나는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매일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이 지금의 결혼관을 갖게 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꿈과 욕망에 부모님은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로 보살피고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부모님의 그 사랑에 감사하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정성을 다해 돌봐야 한다.


  인생살이는 이래도 외롭고 저래도 외롭다. 그때 그때 실컷 슬피울어 고독을 달래도 좋고, 이열치열(以熱治熱) 식으로 더 고독해지려고 외딴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좋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또는 완전한 우정)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에 대해 '희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택하라는 말이다. 희망은 절망보다 더 무섭다. 과도한 희망은 과도한 절망을 불러들이기 쉽다. 

  이성적으로 계산하거나 체면을 따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죽어라고 쫓아다녀 보고, 설사 사랑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너무 억울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리고 꼭 결혼을 하고 싶으면 선을 백번을 봐서라도 결혼하되, 자식을 낳기 싫으면 낳지 말라. 살다가 싫어지면 아무리 늦은 나이라도 악을 써 이혼하고, 이혼 후의 고독과 후회를 두려워 말라. 요컨대 모든 것을 야(野)한 본능에 따른 순간의 진솔한 욕구에 맡기라는 얘기다.

  사회 명사들이 잘난 체 으스대며 써갈기는 '행복론' 따위는 읽기도 전에 찢어버려라. 대개는 자기변명이요 위선적 설교일 뿐, 믿을만한 '고독의 근치(根治) 처방'은 없다. 종교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의 말도 믿지 말아라. 종교는 자칫하면 성에 대한 죄의식을 심어주어 우리를 삐뚤어진 '성의 소외자'로 만들어놓기 쉽고, 정신의학은 우리를 노이로제 공포증 환자로 만들어 놓기 쉽다. 정 외롭거든 미친 듯 운동을 해보거나 퇴폐적으로 치장을 해보면서(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시간을 달래 나가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제26장 고독을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260-261쪽>

  광마의 생각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의 생각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외롭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한다. 이 외로움이 크게는 인류 문명을 이끌고 작게는 개인의 삶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 외로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다. 즉 인간이 가진 외로움은 "있다"는 것만 분명할 뿐 그 의미는 각자의 것이다. 

  나는 내 옆에 누군가 있었을 때도 외로웠고 혼자 있을 때도 외로웠다. 나는 지금도 외롭다. 외로움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외로움을 알기에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외로움이 만들어 내는 삶의 변화들은 흥미롭다.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고, 화초를 키우며 생명의 신비로움과 강인함을 느낀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소중함과 따뜻함을 알게 되고, 딱딱하지 않은 부드러운 자기애도 알게 된다. 외로움에 잠식되면 삶은 피폐해지고 파괴에 이를 수 있다. 반면에 외로움을 이해하고 하나의 감정으로서 대한다면 외로움이 가져다 주는 것들이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든 지속적으로 몰입되어 있으면 나는 "나"를 잃고 감정의 노예가 된다. 외로움에 잠식되었던 나의 행동들은 어리석다. 자기애가 사라지고 허무와 결핍들로 채워진 내면은 원치 않은 행동들로 표출된다. 그 행동들이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서늘한 자기 반성과 후회. 그것들은 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스스로 근신한다.

  나 역시 사회 명사들이 쓴 처세나 행복, 성공론들에 관련된 책들을 읽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내용들이 비슷하고 한 개인의 성공과 행복의 방법론이 다수에게도 통하는 방법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삶에 대한 태도와 방식, 그 방향을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과 경험하여 설정하고 계속 수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 명사들의 말들은 참고만 할 뿐이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주체성을 확립시키지 않고서는 '남'도 없고 '우리'도 없다. '이타주의'란 '이기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와 상통하는 말일 뿐이다. 이타주의자들은 대개 세속적 명예로든 내세의 보상으로든, 어떤 식으로도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기주의자가 아닌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을 때, 우리의 비로소 위선적 이타주의가 아닌 진실된 이타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  <제29장 결혼 후 행복하지 못한 까닭에 대하여, 289쪽>  

  인간은 이기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애를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나의 주체성과 행복이 확실할 때,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나의 말과 행동들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책 제목처럼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된다. 


  나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결정짓는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과 결혼이 일치되는 것에는 절대 반대한다. 결혼에 의해서 성욕을 해소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자위행위로 성욕을 푸는 편이 낫다. 결혼은 그만큼이나 무서운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성적 충동에서만이 아니라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나 자신이 처한 암담한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 때문에 결혼하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결혼한다고 해서 모든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는다.
 
  결혼한 사람이 독신자보다 오래 산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데, 그것은 원만한 결혼생활을 했을 경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히 많다. 거꾸로 평생 독신생활을 한 예술가나 성직자들이 훨씬 더 건강하게 장수르 누린 사례도 얼마든지 많은 것이다. 중년 나이의 동연한 급사(急死)는 체면상 억지로 결혼생활을 유지해 온 도덕주의자들에게서 많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결혼이냐 아니냐보다 성욕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직·간접적으로 배출시키느냐에 있다.  <제30장 성에 집착한 결혼의 무모함에 대하여, 296쪽>

  섹스를 규칙적으로 하고 섹스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이성과 섹스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결혼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사건이고 인생 전체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안하고는 개인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결혼 전의 연애는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고 어떤 상황들과 순간들 속에서 겪는 서로의 판단들과 말, 행동들이 어떤 "힌트"들이 된다. 둘이 되어 행복할 수 있다면 결혼은 좋은 것이지만, 무조건 둘이 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호감이 없는 사람과 섹스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자위행위나 다름없고 단지 감정 없는 "작업"이다. 이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는 느낌이 든다.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교류가 있고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서로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서로의 성적 취향들에 대해 의견들을 교환하고 서로 충족해 줄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통계는 늘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한다. 


  남자가 자기의 화장이나 머리모양을 자꾸 새롭게 꾸미라고 보채댄다고 해서, 발끈 화를 내고 이혼을 선언한 촌스러운 여자가 있다. 또 여자가 너무 요란하게 차려입고 다닌다는 이유로, 아내의 바람끼를 의심해 이혼을 선언한 병신 같은 남자도 있다. 다 불쌍하고 한심한 사람들이다. 결혼은 완성된 그림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종이와 물감을 구입하는 것이다. 결혼은 단지 보다 편안하고 지속적으로 '관능적 연상놀이'를 하기 위한 계약일 뿐이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도 싶은 모든 남녀들은 이제부터라도 다양하게 '상상'하고 다양하게 '변신'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야한 '연상작용'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평생 동안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이성은 없다. '동지적(同志的) 결합'이나 '우애적(友愛的) 결합'이라는 것도, 각자 상대방의 '자유로운 상상'과 그 상상에 따른 '자유로운 실천'을 도와주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제31장 '관능적 연상'과 '변신에의 노력'에 대하여, 307쪽>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전반부에서 말한 광마의 "야한 정신"이 납득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느껴진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꾸미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그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만의 멋과 매력을 잘 아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인위적인 멋과 매력이 있지만 자연스러운 멋과 매력이 있다. 그러나 이 멋과 매력이 단지 성적인 판타지와 수단으로써만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호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것과, 특정한 순간에 느껴지는 사람의 매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늘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좋아한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멋진 모습들을 늘 보이고 싶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이를 먹으며 늙어갈수록, 그리고 뼈저린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게 될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지적 성숙'이 급속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知)'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나 정신우월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두루 꿰뚫는 사려깊은 통찰력에 가깝다. 노탐(老貪)에 따른 속물적 출세주의나 성적(性的) 허기증에 따른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지적 성숙'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나 자신의 경우를 두고 말하자면, 실제적 사랑 또는 성애를 마음껏 즐기지는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문학을 통해 '사랑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럭저럭 대리충족감을 맛보면서 외로운 나날들을 지탱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성적 허기증은 탐미적 관음(觀淫)이나 자위행위 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무마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적당한 무마'나 대리충족이 그런대로 나의 추한 변신이나 '심통사나운 정신주의자(또는 도덕주의자)로의 이행(移行)'을 근근이 막아주고 있다고 본다. 

  나만 외로운게 아니라 남도 외롭다. 나만 억울하게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남도 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런 고달픈 삶의 와중에서 내가 계속 성숙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제33장 서른다섯 살의 '위기'에 대하여, 325-326쪽>

  나는 이 부분이 좀 슬프게 읽혀졌다. 광마는 결국 외롭고 쓸쓸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광마는 폐경기가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언제나 또 다른 사람을 잉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성"으로 인간을 해석하고 "성애"를 추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늙은 그에게 더 이상의 그런 "낭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이제는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부르지도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성적으로 매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았을까? 절박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지적 성숙"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성욕을 다른 방식들로 해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삶에 어떤 영향들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무엇을 알아가는 것이 고통일 때가 있고, 신체의 무기력과 노쇠함을 느낄 때 더욱 외롭고 쓸쓸해 질 수 있다. 인간은 복잡하고 예민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로 만족되거나 정체될 수 없다. 늘 신선한 느낌으로 자신의 욕망들이 충족되는 것을 바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이 인간의 절망이자 한계이다.

  광마의 죽음은 그래서 슬프다.  


  지금까지 나는 '야한 여자'를 위주로 얘기했지만, 남자에게도 역시 '야한 정신'은 똑같이 요구된다. 야한 여자와 야한 남자들이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다. 창조적 상상력은 야한 정신에서 나오고, 창조적 상상력이 존중받는 사회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고른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줄곧 얘기해 온 '야한 사람'의 요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겉 다르고 속 다른 허위의식이나 위선에 빠지지 않고 안팎으로 솔직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강조해 온 '야한 정신'은, 정신보다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국수주의보다는 세계적인 보편성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관념보다는 감성에, 명분보다는 실리에, 교조주의보다는 다원주의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런 세계관으로의 변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의식의 변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야한 남자들이 더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욱더 야해질 필요가 있다. 여성은 관능적·미적 감수성이 남자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이 사회를 보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데 선도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제36장 '야한 여자'의 여러 형태에 대하여, 353-354쪽>

  한국 사회는 성에 대한 의식이 무척 보수적이고 억압된 사회이다. 최근에서야 "젠더 문제"들이 사회적 담론들을 형성하며 그에 따른 사회 운동들도 일어났고, 주로 청년층을 중심으로 논의되기에 사회 전체로의 확산은 아직 미약하다. 일본 같은 경우 사회가 구성원들의 성적 욕구들을 표출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고, 그에 따른 성인 관련 컨텐츠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 성범죄와 쾌락추구가 분명히 구분된다. 한국 사회는 아직 이러한 수준에 있지 못하고 성에 대한 담론들이 성범죄 예방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내면적으로는 성적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외면적으로는 그 스트레스를 억제하며 도덕과 예의를 지키며 살아간다. 이 스트레스들이 축적되어 폭발하면 그들은 언제라도 성범죄 또는 다른 범죄들을 저지를 수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된 공공 장소에서의 "몰카"나 "음란 행위"들은 성적 욕망과 스트레스들을 참지 못한 사람들의 범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범죄들을 저지르기 이전에 그들의 욕망과 스트레스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장소들이나 컨텐츠들이 사회 내에 없다. 그들은 누구와도 성에 대해 상담도 할 수 없는 스스로 "숨겨진 자"들이다. 이 숨겨진 자들은 자산들의 욕망과 스트레스를 개인적으로 해소할 곳을 찾지 못하면, 계속 비슷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사회가 이런 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성에 대한 담론은 낯 뜨겁거나 외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학교와 사회는 그 담론을 무척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허용하고 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성에 대해 솔직한 담론을 할 수 있는 공개된 장소가 어디에 있을까? 지금까지 그 담론들은 다수가 아닌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들이 특정한 공간에 모여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소수자들의 문제들이 공공연하게 대두되었을 때, 사회 내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보수 단체들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광마의 말대로 "야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섹시함과 매력들을 "커밍아웃"하여 사회 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성에 대한 담론들도 다양해지고 그에 따른 의식들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야한 정신"이 겉과 속으로 표현되어, 육체적인 매력 뿐만 아니라 섹시한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들을 자극하고 활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다. 이런 변화와 활기들이 광마가 원했던 감각과 본능이 중시되는 사회로 귀결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억눌렸던 정신들의 해방으로 인하여 다양한 삶의 태도와 사회 문화들이 형성될 수는 있을 것이다. 


  1997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성에 대한 광마의 생각들과 고민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성범죄를 처벌하고 예방을 강화할 뿐, 성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과 문화가 더디게 형성되고 있다. 왜 성에 대해 개방된 생각들을 가진 자들이 "변태" 또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걸그룹의 섹시한 춤과 의상에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왜 성범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면서, 성적 스트레스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할까? 언제까지 성인물이 "음란물"로 취급되어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만 생산되고 거래되어야 할까? 매춘과 동성결혼, 포르노물은 언제 합법이 될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듣기에는 한국 사회에서의 성에 대한 의식과 태도가 너무 경직되어 있다.  

  나는 나의 여자와 자유롭게 성에 대해 대화할 것이고, 사람들과도 토론할 것이다. 내게 자녀들이 생긴다면, 성에 대해서 대화하기 위해 함께 보고 싶은 영화들과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성에 대한 담론들을 개인과 그 주변부터 형성해 가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들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니다. 광마의 생각들은 광마의 것이지만, 그 생각들의 수용은 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달려 있다. 광마는 쓸쓸하게 죽었지만 그의 생각들과 글들은 누군가에게 계속 상기되어지고 읽혀질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벌써 그가 죽은 지 1년이 되어간다.  
  故 마광수 교수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썼다.
  그의 말처럼, 

  "쓰X 야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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