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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뚜렷한 "미완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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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뚜렷한 "미완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들

EAST-TIGER 2018. 8. 11. 09:32


  뮌스터 한인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작년에 한국에 있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은 기회가 있었지만, 친한 친구에게 이 신작을 선물로서 줌으로써 그 기회를 양보했다. 그리고 올해 초 뮌스터 한인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이 책들을 신청했고 한달 반 동안 읽었다.1, 2권으로 구성도었고 3권이 나올 수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읽고 난 후 3권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완성"된 느낌이 드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언젠가부터 나는 멘시키라는 사람에 대해 지금껏 다른 이에게 느껴본 적없는 친밀함을 품게 되었다. 친근감, 아니, 연대감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찌 보면 닮은꼴인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내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동기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1권 현현하는 이데아, 26. 이 이상의 구도는 있을 수 없다, 483-484쪽> 


  이번 신작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인공은 하루키의 전작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 오카다 도루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 그리고 아내 유즈와의 관계가 틀어진 후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 역시 <태엽 감는 새>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번 신작의 주인공은 소수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화가로서의 직업적 활동을 계속 한다는 점에서 <해변의 카프카>의 다무라 카프카처럼 좀 더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아간다. 


  와타루 멘시키와 주인공 간의 관계는 비슷함에서 출발해서 점점 대립적으로 변한다. 멘시키가 의도적으로 주인공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보를 보이고, 주인공 역시 그 행보들을 보고 느낄수록 경계심을 갖는다. 하루키는 이 두 캐릭터의 대립을 뚜렷하게 함으로써 이번 신작의 주제도 뚜렷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고 다시 회복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간절함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소중한 것들을 상실한 두 남자의 만남과 대화가 1권의 주 내용이다.  



  곧이어 기사단장이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진실은 곧 표상이고, 표상은 곧 진실이지. 그러니까 눈앞의 표상을 통째로 꿀꺽 삼겨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이야. 거기에는 억지 논리도, 사실도, 돼지 배꼽도, 개미 불알도, 아무것도 없다네. 사람이 그외의 방법을 써서 이해의 길을 나아가려는 건 흡사 물에 소쿠리를 띄우려는 짓이나 마찬가지야. 내 말 듣게나. 그런건 그만두는 게 좋네. 안됐지만 멘시키 군이 하고 있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아."


  "다시 말해 뭘 하든 어차피 헛된 시도라는 겁니까?"


  "구멍 숭숭 뚫린 물건을 물에 띄우는 건 누구에게나 의미 없는 짓이지."


  "멘시키 씨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요?"


  기사단장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말런 브랜도가 떠오를 만큼 매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단장이 엘리아 카잔의 영화 <위터프론트>를 봤을 가능성은 희박할테지만 양미간의 그 주름은 말런 브랜도를 꼭 닮았다. 기사단장이 외관이나 용모를 인용한 영역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나는 짐작해볼 길이 없었다. 


  그는 말했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 내가 제군한테 설명해줄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적네. 왜냐하면 그 그림의 본질이 우위에 있고, 비유에 있기 때문이지. 우의나 비유는 말로 설명할 것이 아니네. 그냥 이해해야지."


  그리고 기사단장은 새끼손가락으로 귀 뒤를 긁적거렸다. 비 오기 전에 귀 뒤를 긁는 고양이처럼.  <1권 현현하는 이데아, 28. 프란츠 카프카는 비탈길을 좋아했지, 503-504쪽>  


  전작 <해변의 카프카>에서부터 하루키는 "메타포"와 "이데아"라는 개념들을 소설에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캐릭터와 상황들을 설정한다. 이미 초기작 <양을 쫓는 모험>에서부터 그러한 개념들을 활용했지만, <해변의 카프카>에서 오시마와 다무라 간의 대화에서 하루키 자신이 생각하는 "메타포"에 대한 개념을 독자들에게 설명했고, 단순한 은유가 아닌 어떤 간절함을 담은 유체이탈적 행위로써 주인공의 욕망을 해소하는 장치로 표현된다.


  여기에 주인공의 조력자이면서 실재하지 않는 존재 "이데아"들도 <해변의 카프카> 이후의 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이데아"들은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 주인공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거나, 주인공의 불안 심리에서 비롯된 공포의 대상들로 나타나 주인공의 뒤를 추적하고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언제나 주인공을 지켜보는 존재인 "이데아"와 주인공의 간절한 소망 그 자체로서 실현되는 "메타포"는 하루키 소설에 빠질 수 없는 장치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소설에서 현실성을 찾는 독자들에게 이해와 읽기의 어려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들이 결국은 '나' 자신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 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분명 소설을 읽는 도중 어느 순간 억지스러움이 느껴져 이질감을 갖게 한다. 특히 이번 신작에서는 그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침실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를 가져와 다시 작업실 벽에 걸었다. 그리고 스툴에 앉아 새삼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은 여전히 가슴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긴 얼굴'은 왼쪽 아래 구석에서 그 광경을 매서운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다. 바뀐 부분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날 아침 <기사단장 죽이기>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도저히 유즈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꿈 따위가 아니었다고 새삼 느꼈다. 나는 그날 밤 정말로 그 집에 간 것이다. 아마도 도모히코가 며칠 전 한밤중에 이 작업실을 찾아왔듯이, 현실의 물리적인 제약을 초월한 어떤 방법으로 그 히로오의 아파트를 찾아가서, 실제로 그녀 안에 들어가 진짜 정액을 방출한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나는 생각했다. 어떠한 특수한 채널을 통해 현실이 비현실이 될 수 있다. 혹은 비현실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만약 간절히 염원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증명하는 건 오히려 그 반대의 사실인지도 모른다. <2권 전이하는 메타포, 43. 그것이 그저 꿈으로 끝날 리 없다, 217-218쪽>


  이 부분에서 하루키가 이번 신작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과 의지가 비현실적인 것들을 현실화 할 수 있고 현실이 비현실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그것과도 같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미완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것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그 간절함을 실현시킬만한 힘과 능력 또는 용기가 부족하고 어떤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막연한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바라는 것들이 실현되는 것을 상상한다.     



  나는 끝내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완성하지 않았다. 거의 완성 직전이고 마무리만 남은 상태였지만, 그 그림을 완성했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염려되었다. 그림이 완성되면 멘시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손에 넣으려 할 것이 틀림없다. 뭐라고 돌려 말하건 뻔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멘시키의 손에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 그림을 그의 '신전'에 들여보낼 수는 없다. 그곳에는 위험한 것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리에는 그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이 그림에는 지금의 내 생각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고 했다), 괜찮다면 자기가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를 기꺼이 그녀에게 주었다(약속했던 석 장의 데생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오히려 더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림이 미완성이면 나 자신도 언제까지나 미완성 상태인 것 같으니까 멋지잖아요." 마리에는 말했다.   


  "완성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모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이야." 


  "멘시키 씨도 그래요?" 마리에가 물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데."


  "멘시키 씨도 아마 미완성일 거야." 내가 말했다.


  멘시키는 결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밤마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모습을 찾고 고성능 망원경으로 골짜기 맞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비밀을 지님으로써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의 균형을 교묘히 컨트롤한다. 그에게 비밀은 서커스의 외줄타기 곡예사가 들고 있는 장대 같은 것이다.  <2권 전이하는 메타포, 63.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567-568쪽>


  멘시키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옛 애인과의 완벽한 정사로 아키가와 마리에가 태어났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일 수도 있는 마리에를 보기 위해 그녀의 방과 집이 보이는 맞은 편 집을 구입하여 군용 망원경으로 거의 매일 그녀의 방과 집을 지켜본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하여 그것을 빌미로 마리에와 그녀의 고모인 아키가와 쇼코를 만나면서 관계를 형성한다. 결국 쇼코와 연인관계가 되면서 마리에에게 좀 더 근접했지만 마리에는 그런 멘시키를 경계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한다. 멘시키는 마리에가 자신의 딸일 수 있다는 확신을 근거로 계획적이고 의도된 상황 설정들과 행동들을 했지만 마리에가 아닌 쇼코와 연인이 됨으로써 현실에 순응하는 면을 보인다. 물론 그러한 관계 역시 마리에를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한 의도된 것으로 어떤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멘시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충분히 있다. 그래서 어딘가 "미완성"일 것 같은 추측만 들 뿐 멘시키의 삶은 "완성"에 근접한 삶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마리에에 대한 멘시키의 간절함은 "메타포"나 "이데아"의 도움과 간섭이 필요없는 냉철하고 차가운 합리성의 결정체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와 반대로 주인공의 간절함은 "메타포"가 되어 제약없이 주인공의 소망을 실현시킨다.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위대한 화백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의 작업실에 나타나 주인공과 조우했고, 꿈에서 아내 유즈와 살았던 아파트로 주인공 자신이 가서 성관계를 갖고 딸 무로를 태어나게 한다. 때로는 주인공의 불안심리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로 실현되어 내재적 불안감으로 상주한다. 이것들은 단지 개인의 상상이나 관념에만 머문 것이 아닌, 현실로 나타나 주인공과 대면한다. 그리고 "이데아"들은 이런 주인공을 위해 홀연히 나타나서 그를 위로하고 그가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게 기회들을 제공한다. 즉 "메타포"와 "이데아"의 현실성은 뚜렷한 "미완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들이다.    



  나는 도호쿠의 도시를 혼자 돌아다니던 때, 꿈을 통해 잠든 유즈와 몸을 섞었다. 나는 그녀의 꿈속에 숨어들었고 그 결과 그녀는 수태해 아홉 달 하고도 며칠이 지나 아이를 낳았다- 나는(어디까지나 남몰래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를 즐겼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이데아로서의 나, 혹은 메타포로서의 나다. 기사단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돈나 안나가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준 것처럼, 나는 또다른 세계에서 유즈를 수태시켰다. 


  그래도 나는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 그는 아키가와 마리에가 자기 아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밸런스 위에 자신의 인생을 구축하고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에 달고, 끝나지 않는 미묘한 진동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귀찮은(적어도 자연스럽다고는 하기 힘든) 작업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좁고 어두운 장소에 갇힌다 해도, 황량한 황야에 버려진다 해도, 어딘가에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순순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오다와라 근교의 산머리 집에 살면서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체험을 통해 배운 점이었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새벽의 화재로 영원히 소실되어버렸지만, 그 훌륭한 예술작품은 내 마음속에 지금도 실재한다. 나는 기사단장과 돈나 안나와 긴 얼굴의 모습을 눈앞에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그들을 생각하면 드넓은 저수지 수면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때처럼 기분이 지극히 고요해진다. 내 마음속에서 그 비가 그치는 일은 없다. 


  나는 아마 그들과 함께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리라. 그리고 무로는, 내 어린 딸은,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은총의 한 형태로.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무로를 향해 말했다.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  <2권 전이하는 메타포, 64. 은총의 한 형태로, 596-598쪽>


  마지막 부분은 주인공의 성찰이자 하루키의 생각이다. 인간은 기억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환경을 인정함과 동시에 또다른 존재들의 조력으로 아름다워진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합리적 판단과 계획 속에서만 머물게 한다면 비현실성의 현실화와 타인의 간섭은 차단되고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 그리고 정열만이 회복과 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된다. 인간 스스로가 미완성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인지할 때, 초월적 존재들 또는 타인의 존재가 뚜렷해지고 그들과 공존하는 삶이 가능하다. 


  예술작품들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현실이 현실로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인간이 가진 상상력과 간절함들이 비현실적인 존재들과 만나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나 상황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작품과 인간의 사유 구조는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는 그 자체로만의 것이 아닌 내가 봄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대상들이라면, 그 대상들을 바꿀 힘도 내 안에 있고, 그러한 힘을 인간에게 준 초현실적 존재 역시 원초적으로 그러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메타포"와 "이데아"는 인간의 믿음과 간절함을 먹이로 삼아 존재한다.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고독한 존재가 된다. 

   


  하루키의 이번 신작은 이전 작들과 비교했을때 신선하거나 특별하진 않지만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메타포"와 "이데아"의 의미와 역할을 더욱 분명히 했다. 신작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들은 많았다. 하루키의 문체와 내용설정에 익숙한 나에게는 더이상 하루키의 생각들과 묘사들이 이전보다 인상적이지 않았고 아마 점점 더 그럴 것이다. 그는 이미 많은 책들을 이 세상에 내놓았고, 그것들을 통해 충분히 자신의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여기서 더 새롭고 특별한 무언가를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그를 학대하는 기분까지 든다. 


  지금의 나와 작품 속 주인공의 나이가 같아서 약간의 흥미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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