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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옛날 사람들도 우리랑 별 다를 게 없더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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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옛날 사람들도 우리랑 별 다를 게 없더라."

EAST-TIGER 2021. 2. 20. 06:07

 

Edward Yang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91년도에 제작되어서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영화는 청소년 샤오쓰와 그의 가족, 친구들을 통해 1960년대 초반 대만 사회를 묘사한다. 촬영에 있어서 주로 Long shot과 Long take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과 상황들을 멀리서 관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경음악 없이 현장음으로 극 분위기를 조성하고, 서사적이지만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설정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동안 집중해야 한다. 이런 연출에 익숙하지 않다면 4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 있거나, 한 번에 보기가 어렵다. 

 

 

 

"일본과 8년 싸웠는데, 일본식 집에서 일본 노래를 듣네." 

 

1960년 대만 사회는 사라져야 할 것들, 남겨진 것들, 새로 생기는 것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불안정한 양상들이 연령별로, 계층별로 나타났다. 패전국 일본이 대만에 남기고 간 것들은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들이었지만, 한번 정착된 사회 문화들은 익숙함과 그 유용성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 확산의 결과들은 사회 구성원들이 하는 생각과 행동의 변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눠지는 학교교육. 부모님이 가진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학생들을 대하는 선생님들과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다. 대학 입학 시 합격자 명단은 라디오에서 발표된다. 좋은 대학을 가야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다. 학생들은 체육시간에 서양 구기종목인 농구를 배우고 야구에 관심을 갖는다. 기성세대는 일본 노래를, 청소년들은 미국 노래를 듣는다. 기성복보다는 교복을 더 자주 입는 학생들. 어디선가 국가가 나오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가부장제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들과 남성 중심의 사회 문화들은 적폐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경멸하지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다. 아쿠자들처럼 청소년들이 서로 조직을 만들어 대립한다. 그들은 일본도를 들고 서로를 베고 찌른다. 일본 수사관들이 했던 취조 기술들을 거의 똑같이 따라 하는 대만 수사관들. 어쨌든 피는 물보다 진하다. 

 

여러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질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들이 "불안"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이나 연령,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려 한다. 이것들과 함께 힘의 과시는 언제라도 그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감시와 통제, 힘의 유지가 쉽지 않을 때가 언제일까? 빛이 희미한 밤이다. 빛이 있는 곳에서는 낮과 같은 흥겨움과 대화가 있지만, 빛이 희미한 곳에서는 살인과 폭력, 금기의 일들이 벌어진다. 밤에 벌어졌던 일들의 결과들이 다음날 낮에 있을 일들을 결정한다. Edward Yang 감독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보이는 것들과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게. 내가 언제나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 내가 널 지켜줄게."

 

특히 샤오쓰가 영화사에서 훔친 손전등은 움직이는 빛으로써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좀 더 자세히 비춘다. 이 손전등이 비추는 풍경들을 통해 샤오쓰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을 배우고 세상살이를 깨닫는다. 빛이 아무리 강해도 밤의 어둠 속은 모두 드러날 수 없다. 빛에 비친 풍경들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풍경 속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성찰, 그에 따른 반응들에 집중해야 한다. Edward Yang 감독도 실화의 극적인 사실성보다는 각색에서 비롯된 효과들을 영화에 담는다. 이 영화는 누아르, 청춘 영화의 문법을 잘 따른다.

 

샤오쓰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때부터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함께 공직자로서 일하면서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학생주임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들은 샤오쓰가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불이 들어온 전구 하나를 깨버린다. 영화 초반에 학생주임에게 빼앗긴 야구방망이를 다시 손에 쥐었을 때, 샤오쓰는 그 방망이를 여러 전구들의 불빛으로 대낮같이 밝은 교무실에서 휘두를 수 있는 반항아가 되어 있었다. 체계 내에서 개인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수가 직접 보거나 알 수 있지만, 체계의 책임자들은 안정을 위해 그것들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 감시와 통제가 필요한 이유다. 샤오쓰는 불빛 아래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감시와 통제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순간 교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들이 샤오쓰에게로 고정된다. 한 번쯤 생각해봤을지도 모르겠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들이다.

 

샤오쓰 스스로 불이 들어온 전구를 깨버림으로써, 그가 느끼는 빛과 어둠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이제 샤오쓰는 어디서든 신뢰할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고, 누구에게서도 만족스러운 말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친한 친구들은 위선자들이 되었고 가족은 화목하지 않다. 처해진 상황들과 사람들의 생각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샤오쓰. 스스로 만든 모순 속에서 괴롭고 외롭다. 이런 점에서 샤오쓰와 그의 아버지는 같은 선상에 있다.

 

 

 

"오직 나만이 너를 도울 수 있어. 나만이 너의 희망이야."

 

빛과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샤오쓰에게 손전등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관찰자가 아니라 행위자가 되려 한다. 산동, 슬라이, 허니 중에 누구라도 되려 했던 것일까? 평소 그의 모습이 아니라서 어딘가 어색하다.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샤오쓰는 샹동, 슬라이, 허니 중에서 누구도 될 수 없었다. 샤오쓰는 샤오쓰다. 누구도 샤오쓰의 외로움과 우울, 불안을 진지하게 알아주지 않고 달래주지 않는다. 연인이자 구원 같은 존재인 샤오밍도 절친한 친구 샤오마와 사귄다는 소문을 들었다. 불안한 상황에 처한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샤오쓰는 캣의 집에 있던 단도를 찾아 샤오마를 죽이려고 마음먹는다. 학교 앞에서 기다렸는데 샤오마가 나타나지 않고 샤오밍이 나타났다. "네가 나를 바꾸겠다고? 난 내 세상이 좋아. 누구도 바꿀 수 없어. 네가 뭔데!" 샤오마를 죽이려던 칼은 샤오밍으로 향했다. "넌 구제불능이야! 부끄럼도 모르는 구제불능이라고!" 자신에게 난도질을 하는 샤오쓰를 안아주는 샤오밍. 샤오밍도 샤오쓰의 불안을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불행한 삶을 끝내게 해 줘서 고마웠던 것일까? 고령가 소년의 살인은 여운이 깊다. 

 

영화 후반부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샤오쓰는 영화사에 들러 훔친 손전등을 탁자에 놓는다. 나가려던 찰나에 영화사에서 일하는 감독을 만난다. "자연스럽다고요? 가짜도 구별 못하면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요? 아저씨가 지금 무슨 영화를 찍는지는 알아요?" 샤오쓰가 감독에게 하는 말을 통해 Edward Yang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듯하다. 제작자 또는 투자자들의 감시와 통제, 감독 개인의 취향에 따라 영화가 만들어지더라도, 영화는 시대의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 모든 영화들이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런 영화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영화가 자본주의의 산물이나 오락 또는 예술처럼 보일 수 있지만, Edward Yang 감독에게 영화는 진실에 다가가는 "손전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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