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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 어떤 '관념' 과의 결별

EAST-TIGER 2020. 7. 20. 04:26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여동생의 책장에 있어서 무심코 읽었는데 몰입되지 않아서 잠시 접어두었다가,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들에 관심이 많아서 읽다보니 어느 덧 그의 대표작들은 다 읽었고,
읽다보니 나는 하루키의 팬이 되어 있었다.

 


활짝 열어제친 창을 통해 날카로운 새소리가 들렸다.
들어 본적이 없는 울음 소리였다. 새 계절의 새로운 새인가 보다.
나는 창으로 비쳐 드는 오후의 햇살을 손바닥에 받아, 그것을 그녀의 볼에 살짝 얹어 놓았다.
그 자세 그대로 꽤 시간이 흘렀다.
나는 흰구름이 창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도저히 지금이 지금이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아. 내가 나라는 것도 어쩐지 딱 와 닿지를 않아.
그리고 여기가 여기라는 것도 말이야. 언제나 그래. 훨씬 뒤에 가서야 겨우 그게 연결되는 거야. 지난 10년동안 줄곧 그랬어."
"왜 하필이면 10년이죠?"
"끝이 없기 때문이지. 그뿐이야." <215p>

 

내가 하루키의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독창적이고 섬세한 인물, 상황 묘사이다.
이 묘사들은 내가 쓰는 모든 글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하루키의 문체를 따라하게 되었고, 그의 묘사를 흉내내었다.
또한 생활 속에서도 내가 만난 인물과 처한 상황을 보며 하루키의 묘사법을 작게 중얼거리거나 조용히 상상한다.

 

나는 스물 아홉 살이고, 앞으로 여섯 달만 있으면 나의 20대는 막을 내린다.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10년 간이었다. 내가 얻은 가치가 없고,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은 무의미했다.
내가 거기서 얻은 건 무료함 뿐이었다.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내 마음을 흔들고, 내 마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마저 흔드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잃어야 했기에 잃은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말고 나에게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적어도 나는 살아 남았다.
좋은 인디언은 모두 다 죽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역시 오래 살아야만 했다. <135p>

 

다른 하나는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나랑 닮아있다.
주인공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거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과 거리감을 두고 살아가며 밝은 면 보다 어두운 면을 현실에 드러낸다.
지극히 내성적이고 평범해보이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다.
가끔 나는 하루키의 문학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나를 위로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나와 닮았다.

 

이번에 읽은 책도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하루키의 문학은 그럴 것 같았다.
책 제목에서 드러났지만 '양' 에 대한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말과 행동들은 필연적이었다.
'양'은 단순한 지시적 단어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상징적 의미는 관념이었다.
여러 관념들은 '양'으로 함축되어 '양'을 접한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었다.
그러나 '양'은 한곳에만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최적의 자리로 이동했다.
결국 주인공의 친구 쥐에게 들어간 양은 거기서 쥐와 함께 죽었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가치관과 정체성 혼란 속에 살아가는 전(戰)후세대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관념' 과의 결별을 고했다.
결별을 통해 그들이 추구하던 '관념' 들은 현실세계로 동화되었고,
그들을 지탱해주던 버팀목들도 사리지자, 눈물을 흘리며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약간의 흠이 있다면 스토리 라인이 조금 치밀하지 못하다.
뒤로 갈수록 심해지는데 아무래도 하루키 자신이 이 책을 쓰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근래에 하루키의 신작<1Q84>가 나왔는데 아직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2009.10.20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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