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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죽기로 결심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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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죽기로 결심하다.

EAST-TIGER 2020. 7. 20. 04:41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오전. 컴퓨터를 켜고 네이트온에 접속한 나는 놀라운 기사를 보았다. '경찰 노무현 대통령 사망 확인' 잠에서 막 깬 나는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비볐지만 사실이었다. 경찰의 말에 의하면 오전 9시 30분에 사망하였다고 발표했고, 내용으로 오전 6시 40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이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 기사를 본 시간이 오전 10시쯤이었으니까. 약 3시간 전의 일이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멍해졌고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들이 내 안에서 피어났다.


내가 노무현을 처음 본 것은 2002년 민주당 경선이었다. 당시 경선제도는 내게 있어서 큰 낯설음이었다. 내 기억에 지난 대선 때는, 선거가 있기 전부터 삼당(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의 대선주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들의 각오를 보면 죽을 때까지 대선에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노태우 이후 김영삼, 김대중이 차례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병에 걸린 눈물겨운 애증이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은 뭔가 수상했다. 보수 야당 한나라당 대선주자는 이미 이회창으로 확정되어 지난 대선 패배의 설욕을 다짐했고, 자민련을 밀어낸 민주노동당은 '진보'를 대표하며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정했다.

 

문제는 민주당이었다. 김대중 이후 확실한 대선주자가 없던 민주당은 이인제와 한화갑의 안갯속 양강 구도 속에 있었다. 그때 노무현이라는 풍(風)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안갯속 양강 구도를 위협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게 다져나갔다. 위기에 처한 이인제와 한화갑은 국민경선제도를 추진하면서 반전을 노렸고, 그 이(異) 면에는 자신들의 건재함을 노무현과 당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경선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당의 젊은 의원들과 국민들은 노무현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대선주자 자리를 노무현에게 줘버린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인제는 그의 주특기인 탈당을 해버렸다. 한화갑은 민주당 대표로서 노무현을 돕겠다고 말했지만 탐탁지 않은 결정이었다. 실제로 한화갑은 노무현이 대선주자가 되었을 때부터 그의 당선보다는 당권유지와 정권 인계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어수선한 당 분위기는 대선 선거운동까지 이어졌다. 민주당 지도부는 노무현의 선거운동에 진심으로 도움을 주지 않았고, 정몽준과의 연대는 정몽준의 야욕으로 막판에 돌아섰다. 이 와달리 이회창은 차곡차곡 자신의 표밭을 가꾸고 있었고 박근혜와 연대하여 힘을 더욱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당선을 확신했고 차기 대선주자는 박근혜가 유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정치자금도 없었던 노무현에게 국민들은 '희망의 돼지저금통'으로 그를 도왔고, 그의 정치적 지지세력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는 세력을 더했다. 또한 몇몇 연예인들은 공개적으로 그를 적극 지지했다.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대선 결과의 승리자는 노무현이었다. 당선 예측 보도에서 이미 근소한 차로 이회창을 제쳤고, 접전이었지만 한나라당 표밭인 경상도에서 노무현의 지지표들이 나와, 뼈아픈 패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한나라당은 또다시 5년을 기다려야 했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계승했고, 민주당의 미지근한 도움을 받으며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과 외로운 싸움을 했다. 내 기억에 유시민, 정동영, 추미애, 김근태, 천정배, 강금실 등과 386세대로 대변되는 젊은 의원들이 당에서 그를 지지하는 유일한 우군이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와 함께 뉴스를 보면서 아버지께, "노무현의 정치적 지지세력은 민주당도 아니고 국민이다. 국민들은 인간 노무현이 좋아서 표를 찍은 거지. 민주당이 좋아서 표를 찍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개혁과 변화를 원했던 노무현의 정치는 그의 파격적인 말과 행동으로 정치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지만 거대 야당 앞에서는 풍전등화였다. 개혁과 변화의 기운을 힘으로 제압했던 한나라당은 탄핵으로 노무현을 대통령 자리에서 잠시나마 물러나게 했다. 국민들은 야당의 횡포에 분개했고, 헌정사상 초유의 일에 전 세계 언론들은 관심을 가지며 지켜보았다. 나는 그때 작가 강풀이 그렸던 만화가 기억이 난다.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어떻게 탄핵할 수 있는가?' 그 문구는 잊히지 않는다. 또한 전여옥과 유시민의 TV토론은 전여옥이라는 인간에 대해 '세상에 저런 말종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숙아다. 그래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에 여성 지식인의 표상이자, <일본은 없다>의 저자 전여옥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국민들은 탄핵에 서명한 의원들의 명단을 공개하며 낙선운동을 펼쳤다.
생각해보면 그가 추진했던 정책 중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통과된 것이 없다. 오히려 언론과 여러 당들의 비난에 상처만 당했고, 그의 지지가 되어야 할 민주진영도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청와대 기자실 통폐합으로 언론기관의 적이 되었고(조, 중, 동의 중흥기였음), 대연정과 재신임 전략을 통해 한나라당의 분열을 유도했지만 민주진영의 분열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거침없는 발언들과 돌출 행동은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 마저도 실망하고 비난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열린 우리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진영과의 끈을 놓았다. 이제 그의 남은 정치적 기반은 노사모와 일부 지지자들, 가족뿐이었다. 퇴임이 다가올수록 난제들은 더 많아졌고, 경제는 유가파동으로 어려웠다. 모두가 노무현의 퇴임을 기대했고 정권교체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원했다. 그것은 2008년 대선에서 민주진영의 참패로 이어져 노무현은 쓸쓸한 퇴장을 한다.


퇴임 후, 봉하마을에 집 한 채를 지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치계는 행여나 있을 노무현의 정치 훈수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그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은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퇴임 후에도 멈추지 않은, 그의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에 국민들은 사늘한 반응으로 응수했고 일부 국민들은 퇴임한 대통령의 일상에 매력을 느껴 봉하마을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소탈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갔고 국민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이미 그것 말고도 이 나라에는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많았고, 보수와 진보는 끝이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연차 게이트'가 언론에 폭로되었다. 여러 정치계 인사들이 조사를 받았고,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이 조사 불행하게도 그 끝은 노무현까지 닿았다. 도덕성만큼은 자부했던 노무현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재임 시절 "공직자가 뇌물을 받으면 패가망신 시키기겠다."는 말을 했던 그가 아닌가. 국민들의 관심은 봉하마을로 향했고 그의 숙적 같은 언론들은 다시 그에게 칼을 들이댔다. 언론들은 여러 가지 가설들을 내세우면서 그를 모욕했고, 검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봉하마을부터 서울까지 가는 노무현의 모든 일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나는 그가 검찰청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국민들께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검찰청 정문에는 친노와 반노의 두 시위대가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국민들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노무현. 검찰은 "200개 이상의 질문이 있어서 심야조사도 할 수 있다", "박연차와 대질심문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등 쉽지 않은 조사 일정이 될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공개적으로 조사받는 것에 대해 먼저 국민들의 용서를 구했다.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는 일부 소인배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사를 마친 후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무현은 언론들의 억측성 보도에 비통하면서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친형과 아내, 아들, 딸 등 자신의 모든 가족들이 검찰의 조사와 언론의 억측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노무현은 지난 23일 오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서거했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아는 노무현이다. 그의 서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추모와 애도를 하고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쉽다. 왜 이렇게 늦게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을까. 전여옥, 진중권, 박근혜 등 보수와 진보 진영의 걷어든 항상 노무현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왜 이리도 우호적인 발언으로 그를 칭송하는가. 정동영은 무슨 낯짝으로 조문하는가. 또한 김동길처럼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 노인네의 발언은 들을 가치도 없다. 나는 그들이 싫다. 보수와 진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가? 젊으면 진보이고 늙으면 보수인가? 미국과 손잡으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인가? 북한에게 식량 지원하면 진보이고 지원하지 않으면 보수인가? 우리나라의 진보적 생각은 3년만 지나면 보수적인 생각이 된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노무현도 아마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국민 모두가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론기관들이 지나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려했고, 당파싸움으로 혼란한 정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외에도 그가 추친했던 모든 일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관점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소신에서 나오는 평화로운 대한민국의 이상(理想)이었다.


추모하는 국민들에게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자신들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았으면 좋겠다. "얼마나 노무현의 생각과 삶을 이해했는가?" 노무현은 진정 외로운 길을 걸었다. 그가 자신의 지지기반은 국민이라고 말했지만, 국민들은 그의 정치와 말, 행동에 실망한 나머지 대통령 재임 말년에는 민주진영의 10년 정치에 변화를 촉구하며 정권교체를 원했다. 그의 퇴임은 그가 생각했던 이상과 추진했던 정책만큼이나 환영받지 못한 퇴임이었다.


자살, 자진사퇴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사회에 탄식한다. 다음에는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가? 한국인들은 이 사회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줄 위에 올라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 한 번만 실수하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용서는 없고 자비는 더더욱 없다. 종교는 아무런 힘도 없고, 오로지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무뢰배들만 있을 뿐이다. 이 땅의 지식인들은 밥 먹고 똥 싸는 기계이다. 국민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 눈이 어두워져 진실과 의인을 거짓과 악인으로 둔갑시켰다. 나는 이제 그들의 말을 의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지만 지식인들을 위한 나라도 없다.


노무현이 서거한 날 친구 누나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목사는 노무현이 자살했기에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기가 막혔다. 다음 날이 주일이었는데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노무현의 자살을 예화로 들면서 지옥에 대해 설파할까? 소름이 돋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도중 라디오 방송에서 노무현의 자살소식을 특보로 보도하는 중이었는데 버스에 타고 있던 일부 중년들은 "잘 죽었다", "안됐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라고 말했다. 정말 버스를 뒤집어엎고 싶었다. 주일날 교회에서 만난 중학교 2학년들은 부모님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가 떳떳했다면 왜 죽었겠나?", "잘 죽은 거다.", "불쌍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TV를 보니 노사모들은 더욱 흥분하여 조문객도 자체 필터링을 하면서 들여보내고 있었고, 특히 정치인들은 계란을 던지고 욕설을 하며 조문을 막았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어서까지 외롭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죽음을 통해 대한민국의 대통합을 원했을 것 같은데.. 이런 와중에도 여운계는 조용히 묻혔고, 북한은 미사일을 쏘고 지하 핵실험을 했으며, 그로 인해 정부는 PSI에 가입했다.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하려고 한다. 앞으로 '노무현'에 대해 이렇게 많은 글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 이 글을 되새겨 보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생각도 달라지듯이, 이 글도 일부 수정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지난 23일부터 오늘까지 썼다.


잊지 않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2009.05.2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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