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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길..

EAST-TIGER 2015. 4. 11. 18:38

여름 학기가 개강했다.

1년 전 여름 학기에 학위 과정을 시작했으니,

다시 맞이하는 여름 학기는 '기점'같이 느껴진다.

얼마나 돌아야 '기점'이 '종착점'이 될까?

그리고 나는 정말 '종착점'에 이를 수 있을까?

반복해서 떠오르는 진부한 생각들은 늘 같은 대답으로 향한다.

"갈 수 있는 데까지 일단 가야 한다"이제 이 생각들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한다.


이번 학기는 종교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할 생각이다.

수강한 강의들의 대략적인 정보들을 보면,

한 강의에서는 F. W. J. von Schelling의<초월 관념론의 체계>와,

다른 강의에서는 Peter Rohs의<믿음의 자리>를 중심적으로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기 말에 이 두 강의에 관한 구술 시험을 볼 생각이다.

이 생각은 아주 확고한데,

일단 강의를 맡은 교수님들과 이전 학기들에서

수강한 강의들로 인해 이미 안면이 있고,

내 발언과 생각에 대해 나름 친절하게 반응해주었다.

물론 이렇게 형성된 '이미지' 뿐만 아니라,

학위 과정 계획 상 나는 이제 시험을 쳐야 한다.

이미 한 편의 논문은 제출을 앞두고 있고,

다른 한 편의 논문은 작성 중이며,

또 다른 한 편의 논문은 가을에 있을 학술제로 대체할 생각이다.

물론 학술제에 참여하게 된다면,

어차피 논문과 필적하는 글을 써야 한다.

여러모로 이번 학기는 무척 중요하다.

이럴 때는 늘 외친다.

"신발! 난 졸라 강하다!"


부활절 연휴 기간이라 개강이 2주 뒤로 연기될 줄 알았는데,

연기가 아니라 정상대로 진행되어,

화요일 오후에 첫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학교 건물들이 도시 이곳 저곳에 있긴 했지만,

그동안 익숙한 건물들에서 수업을 들었기에

강의실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Schelling 수업이 있을 강의실은,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곳에 있었고,

핸드폰에 나온 지도대로 강의실이 있는 건물 앞에 섰지만,

출입문과 해당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단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건물 근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건물 관리자가 내게 물었다.

"F423 강의실 찾아요?"아마 나 같은 학생들이 몇 몇 있었나 보다.

그는 내게 강의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출입문을 알려 주었다.

강의실은 건물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창문을 통해 뮌스터 시내가 보이는 곳이었다.

수업 참여하는 학생들은 7명 정도.

2명은 안면이 있는 학생들이었고,

나머지는 전혀 모른다.

강의을 맡은 Bunte 교수는 오지 않았고,

그의 친구가 와서 수업에 대한 간략적인 말들을 했다.

어디서든 '학생'이라는 자격에 나이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 수업에도 나이 든 중년 학생이 앉아 있었다.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그 중년 학생이 나는 왠지 거슬렸다.

어디서나 나이가 든 사람들의 뭔가 아는 척 하는 것과

특유의 행동들을 은근히 볼 수 있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을텐데,

이 중년 학생은 Bunte의 친구가 나누어 준,

사전 학습 차원에서 준 자료들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아서 읽을 수가 없군요! 저는 읽지 않겠습니다."

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의 눈들이 순간 그의 얼굴로 향했고,

몇몇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나는 계속 바라보았다.

Bunte의 친구는 웃으면서 바로 그에게서 준 자료를 다시 가져갔다.

여기서나 가능한 일이다.


학기가 진행될수록 좋은 점은,

학위 과정에 관련된 정보들에 익숙해진다는 점과,

이전 학기보다 수업 시간에

독일어가 더 잘 들리고 잘 이해가 된다는 점이다.

항상 뭔가 익숙해지고 좋아질 때 쯤,

시간을 돌려 이 상태 이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아마 지금보다 더 나을 것 같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또한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그만큼 뚜렷하게 만든다.

이제 더이상의 시행착오는 하지 말아야 한다.


화요일 합주에서 Thomas는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5월에 있을 협연을 위해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특별히 연습해 줄 것을 당부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음악을 시작한 이후로 크고 작은 공연들을 꽤 했었는데,

단 한번도 '여자친구'가 공연에 온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공연한다고 말을 하면 꼭 그 시간에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단 한번의 공연도 못보고 헤어졌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요일 저녁부터 합주에 돌입했다.


목요일은 아침 수업이었고,

날씨가 좋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집 앞까지 버스가 다니지만,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자전거를 타고 학교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버스는 친절하게도 여러 곳을 들러서 학교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니 다리가 점점 풀렸다.

그래서 중간에 자전거를 세우고 버스를 탈까도 생각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학교까지 도착했고,

나름 한기가 느껴지는 아침이었지만,

내 얼굴에서는 약간의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전거에 자물쇠를 걸어 둘려고 할 때,

윤미 누나를 보았지만 우리는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누나 얼굴만 살짝 보았는데 변한게 없는 표정과 얼굴이었다.

누나는 나를 못 보고 지나친 것일까? 알고도 그냥 지나친 것일까?

아니면 나는 누나를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쉬운 '인사'도 참 어렵고 어색한 일이다.


Zenker 교수의 강의에는 최소 10명 이상의 학생들이 수강한다.

이번에도 거의 30명 가까이 학생들이 수강했고,

이전 학기의 수업보다 훨씬(?) 느슨한 요구 사항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수업 때 다루게 될 책이 그렇게 두꺼운 책이 아니지만,

머리말을 읽어보니 대충 어떤 내용들이 수업에 다루어질 지 상상이 되었다.

아마 칸트의 신 인식에 기반한 이성적 믿음에 대한 논증들일 것이다.

저자 역시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 칸트의 그것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 오랜만에 철학과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지난 주일부터 갑자기 복부와 명치 주변에 압박감을 느꼈고,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어쩔 수 없이 금식을 해야 했고 물과 우유 또는 주스를 마시며 하루를 넘겼다.

함께 책을 읽기 위해 Frau Freude를 만났고 이러한 증상을 말했더니,

자신의 주치의가 있는 병원에 진료 예약을 잡아 주었다.

무척 고마웠지만 그때까지 내 몸이 괜찮을 지는 모르겠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독일에 온 이후로 특별히 아파 본 적은 없었고,

지난 여름부터 나를 괴롭혔던 안구 건조증도 거의 회복했다.

왜 갑자기 식사를 하지 못 할 정도로 아픈 것일까?

그동안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서야 제대로 아파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가슴에서 통증을 느꼈고,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옆으로 돌렸다.

혹시나 내가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Freude 부부가 즉시 이런 나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 내가 그들을 만나러 갔지,

그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불편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내 방까지 온 적은 드물다.

그리고 누구도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집에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가끔 전화나 메일로 연락하는 친구들은 있지만 자주 연락하는 친구는 없다.

게다가 친한 친구들은 한국에 있고

그들이 아무리 메신저나 인터넷 전화로 내게 연락을 취하려 해도,

그 연락에 대한 대답이 없으면 그만이다!

아마 그들은 내가 처한 상황을 볼 수 없으니

내가 바쁘거나 공부하는 줄 알 것이다.

부모님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경남기업 전 회장의 자살.

시화 방조제에 떠오른 토막난 여인의 시신.

그리고 어디선가 이름 없이 잔인하게 비굴하게 죽는 이들.

팟캐스트나 포털 사이트에서 한국 기사를 접할 때면,

가끔 한숨을 쉬기도 하고 탄식하기도 한다.

해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사연들 역시 기구하다.

인간의 생명과 삶은 존중되어져야 하고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왜 인간은 그것들을 '판돈'으로 내걸어

무한 경쟁이라는 '도박' 판에 평생 머물러야 할까?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라!"라는 말은 허무하다.

살 용기가 없으니 죽을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누군가의 죽음에 기뻐하고 안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들 숨죽이며 조용히 살아야 하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미쳤다.


'기억'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짐으로써,

인간은 대상과 관계한다.

자꾸 기억 되어지는 대상은 '그리움'으로,

자꾸 멀어지는 대상은 '무관심'으로,

그렇게 남아있고 사라져 간다.

나를 잊지말라고 소리쳐도 그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고,

나를 잊으라고 해도 그들은 잊지 않는다.

나는 누구의 기억 속에 지금 남아있고,

앞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를 지금 잊고 있고,

앞으로 잊어 갈 것인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지만,

가끔은 기억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수많은 '너'들과 '너'들의 조각들을 기억하고 싶다.


만남과 이별이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제라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언제라도 누군가와 이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이 아닌 개인적인 만남에 무척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던 나.

만나는 동안의 행복과 고마움에 이별을 망설이고 슬퍼했던 나.

이제 나도 변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근래에 이러한 변화의 요구에 자주 직면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들리지 않는 '그들'에게 계속 묻는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거야?"문학 책들을 자주 읽지 못하고 영화를 자주 보지 못해 아쉽다.

문학 책 중 소설은 직면한 시대의 고민들과 해결될 수 없는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고민들을 접하는 대상들이 다양하고 그 고민에 대한 표현 방식도 다양하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 사람들 중에 과거, 현재, 미래의 '나'도 발견하기도 한다.

영화도 같은 역할을 하지만 직접 시각적으로 봄으로써,

소설과는 다르게 생생한 기분이 든다.

특히 사람들의 표정과 상황들이 일어나는 장소와 분위기.

그것들은 영화를 보면서 쉽게 '각인'된다.

내가 나중에 살게 될 집에 꼭 있어야 할 공간은,

서재와 시청각실이다.


팟캐스트로<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듣는다.

나는 그녀의 선한 목소리도 좋아지만,

그녀가 영화를 대하는 자세와 식견에 놀라고,

요일마다 나오는 게스트들과의 대화에서 더 놀란다.

정말 이상적인 여자이고

어떠한 방법과 방식으로도 만나고 싶은 여자이기도 하다.

아직 들을 방송들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까지 들은 방송들 중에

단 한개도 유익하지 않았던 것이 없다.

특히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해박한 비평,

정은임이 직접 영화를 읽어주는 '귀로 듣는 영화'를 좋아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뜨거운 햇살이 창문 밖에 기다리고 있을 때면,

나는 재빨리 블라인드를 내린다.

그리고 방은 한낮이지만 어두워진다.

지난 여름 Frau Freude가 알려준 실내 온도 조절법인데,

아주 효과가 크다.

이 뜨거움을 지나 서늘한 가을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스스로 실망하지 않았으면 하고,

스스로 자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근래에 운동으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가끔 목적지로 생각한 곳에 누군가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느낌은 목적지가 보일수록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달려야 하고 달릴 것이다.

언제 어디선가 그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

혼자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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