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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좋은 밤이다 본문
2014년 4월 16일.
벌써 1년이 지났다.
'세월호 참사'를 처음 접했던 아침 그리고 그날 하루.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미안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가실.
그 사실은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로 변했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통스러워 하면서
아직 '여기'에 남아 있다.
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니 감기가 찾아왔고,
감기로 인해 몸은 무척 나른하고 가벼웠다.
목은 약간 부었고 엉뚱한 장소와 시간에 콧물이 흘러 나와 당황스러웠다.
기침은 가끔 나왔지만 조용한 방에서 유난히 그 소리가 컸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덥게 하여 땀을 흘렸고,
물을 많이 마시면서 잠을 되도록 충분히 자려 했다.
춘하 누나가 보내 준 감기약을 먹었다.
수요일 아침에 Frau Freude가 예약해 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담당 의사는 친절한 여 의사였고 나이가 많지 않는 중년 여자지만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간단한 진찰을 통해 소화기관이 제대로 음식물을 소화지 못하는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고,
진단에 따른 처방은 소화를 위한 차와 작은 병에 담긴 약물이었다.
그리고 금요일에 자세한 진찰을 위해 초음파 검사를 하기로 했다.
에전부터 Christian이 내게 그렇게 말했던 파상풍(Tetanus) 예방을 위한 주사를 맞았다.
날씨가 무척 좋았고,
단 하루였지만 늦봄에 느낄 수 있는 온도와 바람이 불었다.
실내에서는 입고 온 외투를 벗어야 할 정도로 더웠고,
가을 학술제를 위한 모임에 참여하여 담당 교수들로부터
초청된 철학자에 관한 정보와 향후 모임 일정을 들었다.
이번 학술제에는 미국의 분석 철학자 Peter van Inwagen가 온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낯설지만 참여하기로 했으니,
정해진 순서대로 그의 저작들을 읽고 정리하려 한다.
학술제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의 어느 정도는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그들과 나는 특별히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독일이나 한국이나 이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데,
딱 얼굴 정도만 아는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서,
서로 아는 척을 함으로써 이득이 될 것 같지 않다면,
모르는 척 하거나 옅은 미소를 지음으로써,
서로 얽기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제 이러한 행동들과 느낌들에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바로 내 옆 자리에 앉았던 여학생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강의실로 들어와 내 옆 자리에 앉으려고 다가왔을 때,
나는 그녀가 남자인 줄 알았다.
작은 체구였지만 짧은 머리 스타일,
그리고 화장하지 않는 얼굴에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내가 개념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자'라는 특성들에 잘 들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 앉고 양손을 뻗어 기지개를 폈을 때,
그녀의 가슴이 남자와 달리 조금이지만 앞으로 향해있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턱을 괴면서 보였던 손을 보고 확실히 '여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손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남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손이었고,
손가락은 붉었으며 손톱 역시 붉고 길었다.
중성적인 외모였지만 마음에 드는 외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그녀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입을 다문 채 이상한 소리를 내었는데 불규칙적이었지만 자주 내었고,
자세히 들으면 왠지 빠르게 혼잣말흘 하는 것 같이 들렸다.
그녀의 주변이 조용한 상태에서 그런 소리를 내면,
예민한 사람들은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 차렸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앉아 있는 자세가 아닌,
몸을 자주 움직이며 뭔가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가끔은 엉덩이를 약간 뒤로 빼고 책상을 의지한 채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녀는 교수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만 했고 특별히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하진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그녀가 한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고
그녀의 옆을 스쳐가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가늘고 얇은 억양이었지만 그녀가 독일어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당연한 것이지만 왠지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순간 사라졌다.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가 죽었다.
<양철북>,<넙치>등 인상적인 소설들을 남긴 독일의 문호가 죽으니,
조간 신문 첫 면에 그의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려 있었다.
Freude 부부처럼 자연스럽게 '나치의 아이들'로 유년기를 보냈고,
그 사실을 굳이 그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평생 자신만 아는'비밀'이 되었을텐데,
그는 말년에 그 사실을 공개하여 대중들과 독자들에게 사죄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실망하고 돌아서거나 비판하는
일부 대중들과 독자들에 향해 이후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자신이 사는 사회와 세상,
그리고 거기에 사는 '이상한' 인간들을 계속 탐구하며
때에 따라 문학가로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의사를 표현했다.
Freude 부부의 서가 있던 그의 책<양철북>이 기억이 나,
Frau Freude에게 그 책을 빌렸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과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지금의 '나'를 이전의 '나'와 다르게 만들었고,
앞으로의 '나' 역시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처음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했던 느낌들과 기억들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그것들이 어느 정도 반복되어짐으로써,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익숙한듯'시작'을 하고 '끝'을 예감하는 것 같다.
아니면 이러한 예감들이 강제되어 '성숙'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아주 속기 쉬운 '궤변'이다.
가끔 귀찮을 정도로 자기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는데,
괜히 옆에 있어준다는 식으로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그렇게 한 말들 중에서 어떤 것이 괜히 그를 자극해서 안 좋은 결과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냥 내버려 두려 한다.
그리고 나서 그런 나의 모습이 싫어 내게 상심 가득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그냥 미안한 척 반응을 해도 사실 기분은 좋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지어진다.
결국 나는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처음으로 알게 되고
순수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연인이나 친구,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고 보여지는
이 통속적인 관계의 방정식들과 지루한 순환들.
나는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지금까지 알고 경험한 것들은 나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상황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지 자동적으로 지시한다.
이제 만남과 이별이 어렵지 않고 익숙하고 쉬워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럴 때 무엇인가에 빠지고 싶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다.
어쩌면 나는 이 재미없는 관계들에서의 '탈출 기회'들을
여러 번 놓치며 여기까지 온 것일 수도 있다.
상대방 또는 서로의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상처주는 일만 반복하려 한다.
자기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니면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행복'은 아직 멀리 있거나,
다시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내가 한 '말'에 갇혀있다.
금요일에 다시 만난 그 여 의사와 함께,
복부 초음파 검사를 했고 검사 결과는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간이 보통 때보다 부어 있군요"
부은 간이 위의 소화 작용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갑자기 간이 부었는 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근래에 술도 마시지 않았고 식사는 늘 먹던 대로 먹는다.
"지방 섭취를 좀 줄여야 할 것 같고 다음 주 월요일에 피검사를 해보죠"
나의 뱃속으로부터 기분 나쁜 감정과 불안한 감정들이 올라왔다.
Frau Freude는 그런 내게 걱정하지 말고 좋아질 것을 기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좋아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튼튼한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고,
내 의지와 정신력은 강하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 온 감기와 부은 간은
그러한 나의 확신과 믿음에 약간의 균열을 만들려 한다.
내 옆에서 나를 간호하거나 일일히 신경 써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몇 배는 모든 면에서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굳이 강해질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한다.
그 생각은 내 '신앙고백'에 근거한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쉼'과 '행복'을 누릴 것인가..?
오늘도 홀로 말 없는 밤 한 가운데 머물며,
늘 보던 별들도 사라진 하늘 아래에 앉아 있다.
죽기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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