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世紀 Enlightener
나를 죽이고 또 나를 살리며 하루를 산다 본문
빗소리가 들리는 밤이다.
어젯밤에도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빗소리와 함께 주기적으로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와,
차의 엔진이 켜지고 꺼지는 소리들이 들린다.
기차가 오고 가는 신호음은 자정이 지나면 들리지 않는다.
바람 부는 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지는 밤에는,
꿈이 없는 잠에 든다.
12월은 언제나 비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독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되어간다.
떠나기 전이나 후나 생활 흐름에 큰 차이는 없지만,
한국에 있었다는 흔적들이 짙게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지금 독일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지금 독일에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지금 독일에 있든 한국에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어떤 사람들이 내 친구, 가족, 아는 사람들이다.
누가 더 가깝고 누가 더 먼 것일까?
나를 그리워하거나 찾는 사람들이,
내가 그리워하거나 찾는 사람들이,
진정한 내 가족과 친구, 아는 사람들이다.
이번 학기 Kolloquium은 유익한 면이 있다.
지루한 것은 여전하지만 Schellng의 <자유론>을 함께 읽으면서,
그의 은유와 직유가 담긴 문장들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내고 있다.
선과 악에 대한 논의는 스스로 지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혀를 자극한다.
Schelling은 악의 부정적 토대에서 선의 긍정적 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선은 악에 의해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선이 악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그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악은 늘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중력과 같다.
Schelling은 성서에서 악이 태초부터 근원의 유무에 상관없이 전제되었다는 것과,
어둠 속에서 빛과 생명이 발현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Schelling이 플라톤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철학에서 논의된 존재의 기원을 과학의 이론들에서 발견할 수는 없었다.
Schelling은 플라톤의 저작들에서 세계와 이성의 기원을 찾았고,
신의 이성이 인간 안에 선천적으로 주어졌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리고 그 이성의 개념들이 무질서의 질료였던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기에,
이 개념들과 인간의 이성은 같은 성질을 가진다.
Schelling은 이 이성을 이데아로 본다.
즉 질료적 이데아로서의 세계는,
형식적 이데아로서의 지성과 만나,
하나로서 지금의 지적 생명체가 된 것이다.
누군가나 어떤 일에 기대를 하지 않고 사는 삶은 불행하다.
인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그 자체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항상 대상들에 둘러싸여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존재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의 문장을 자주 쓰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호의와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거나,
그 호의와 도움에 기쁘고 즐거워하지만,
자신들이 말한 문장들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은 욕구와 결합했을 때 강력해진다.
"소망을 품으라!"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방 청소를 했다.
늘 하던 청소여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항상 "처음"이라는 단어가 잘 느껴질 때는 그 느낌의 근거를 더듬는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내려앉은 먼지들과 부스러기들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손걸레로 눈에 보이는 먼지들을 닦아낸다.
그러나 모든 먼지나 부스러기들을 제거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먼지들과 부스러기들이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나는 그럼 또 청소를 하겠지.
이 반복적인 순환 과정은 기억, 공부, 만남, 사랑, 일 등,
사람이 하는 생각과 행동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굴레를 벗어나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그리고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낯선 것들이 다시 익숙한 것들이 되므로,
거대한 굴레 속에서 벌어지는 일시적인 착각들이다.
이것은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원래 완전한 시스템은 직선적이지 않고 원과 같다.
그리고 처음과 끝은 늘 같은 지점에 있다.
누군가는 청소한 내 방에서 더러운 부분들을 찾아내고,
나의 게으름과 꼼꼼하지 못함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내 방은 또한 나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작업실이 깨끗한 것 또한 의심스럽고 이상한 것이다.
Frau Freude의 생일은 11월 30일이다.
생일날에는 이웃들이 와서 축하를 했고,
그 다음 날에는 가족들과 내가 축하를 했다.
아들과 딸들은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손자도 보았다.
갓 태어났을 때 보았던 아기는 두 발로 뛰어다니는 아이가 되었고,
어른들에게 수줍었던 아이는 점점 청소년이 되었다.
80대 중반이 되면 이런 풍경이 보일 수도 있다.
나는 Freude 가족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인형 뽑는 기계들이 많아졌다.
내가 어릴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형을 뽑으려 들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을 넣어서 인형 뽑는 것보다,
그냥 인형을 사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정말 인형을 잘 뽑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고,
순간의 감정과 반드시 뽑겠다는 오기 또는 예전에 인형을 뽑았던 자신감으로,
인형을 뽑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
혹시 인형을 뽑는 것이 아니라 인형을 뽑았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고,
누군가에게 "인형을 뽑았다"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까?
적은 돈과 노력으로 더 많은 돈과 비싼 물건을 갖고 싶어하고 높은 성과를 이루고 싶은 것은,
여러 번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이다.
그러나 그런 욕망과 의지가 실현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알면서도 해야 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한 풍경인 것 같다.
욕망을 파는 기계 앞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돈과 노력을 쏟는다.
작년에 제자이자 후배인 기환이가 인형 뽑는 기계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나는 그를 격하게 밖으로 끌어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많아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딱 이 정도까지만 행복하자" 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일까?
아니면 위로를 하는 것일까?
행복에는 정도가 없고 확실한 대상도 없다.
이 주관적인 감정이 소소하고 확실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소하기에 아쉽고 확실하기에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행복을 찾는다.
이제 밴드 합주 연습실까지 버스로 이동해야 하고,
매주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합의한 날에 하게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화요일에 합주가 있다는 것과,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애정이다.
오랜만에 나타난 나에게 몇몇 사람들이 안부를 물었고,
새로운 연주자와도 인사를 나눴다.
알토 색소폰 주자들이 부족해서,
지난 공연 때부터 테너 색소폰을 불 수 없게 되었다.
합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교통편이 낯설어 Ulrich의 차로 이동하다가 집 근처에서 내렸고,
이후부터는 콜택시로 집 근처까지 이동한다.
학생 교통카드가 있으면 오전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버스 노선이 끊기거나 제한된 정류장들 사이를 다니는 택시를 불러,
무료로 이동할 수 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온 택시 운전기사와 대화를 나눴고,
그의 순수한 말들과 따뜻한 배려에 고마움을 가졌다.
새로운 생활 습관과 삶의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들과 거의 완전하게 결별해야 한다.
익숙한 것들을 떠나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 낯선 것들이 익숙해졌을 때,
다시 그 익숙해진 것들을 떠나 다시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는 어떤 "공부"이자 "삶"이다.
그러나 어떤 변명거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사는 곳까지 오는 것에 대해,
나는 감격스럽게 감사한다.
그의 기억 속에 내가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기억 속에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주 놀라운 인간들 사이의 애정표현이다.
그러나 찾아오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은 늘 닿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움은 어디에 있든지 서로가 서로를 부른다.
그래서 만나려고 노력하거나 안부를 전한다.
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이 잘 자라는지 궁금해 하신다.
여전히 짧은 머리이기에 큰 변화가 없다.
오히려 짧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리는 느낌도 받는다!
비가 오는 날들이 많고 날씨가 추워져,
운동은 주로 실내에서 하고 있다.
한국 가기 전에 주문했던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깎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
어둠이 빠르게 찾아오기에 하루도 빠르게 지나가는 듯 하다.
매일 잠들기 전에 작은 촛불을 켜서 대림절을 기리고 새해를 기다린다.
매 순간 열심을 내어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평생 내 나태함과 게으름에 맞서 싸울 것이다.
나를 죽이고 또 나를 살리며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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