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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과서 본문
집에 QOOK TV가 설치된 이후로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조금 생겼다.
<태왕사신기>이후로 보게 된 드라마는 노희경 작가의<그들이 사는 세상>.
실제 방영 때는 주목 받지 않았지만
매니아층을 형성하여 뒤늦게 빛을 본 드라마인데,
영화와 비슷하게 드라마도 시청률에서는 실패해도 작품성 있는 드라마가 있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로 드라마 종영 이후 실제 커플이 된 현빈과 송혜교를 비롯해서
엄기준, 최다니엘, 김갑수, 배종옥, 서효림, 윤여정, 김여진, 김창완 등 명 배우들이 출연했고,
개인적으로 그녀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노희경 작가의 브랜드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OST를 먼저 들었다.
친한 친구가 이 드라마의 OST를 추천했는데,
몇 곡 안 되었지만, 모두 좋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듣고 있고, 앞으로도 들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윤권의 '술래잡기' 와 성시경의 '연연'을 좋아하는데,
들으면서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As One과 김형석이 제작한 BGM도 좋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림으로만 드라마 바를라고? 너한테 드라마는 뭐냐?"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놀이."
<2회 지오와 준영의 대사 中>
방송국의 드라마국에서 드라마PD로 활약하는 지오와 준영.
옛 연인으로 지금은 이별한 사이지만 서로의 사이는 여전히 각별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일적으로 사적으로 서로 만날 기회가 많아지자,
다시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한편 같은 드라마PD인 규호는 만드는 드라마마다 높은 시청률로 승승장구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외로움과 가족 간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돌한 여배우 장혜진이 나타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드라마국 국장 김민철은 옛 연인이자 당대 최고의 배우 윤영을 잊지 못하고,
전처와 이혼을 하면서까지 지고지순한 애정을 보인다.
그런 애정을 재밌게 느끼는 윤영이지만, 사실 그녀도 민철을 잊지 못하고 있다.
세 커플들의 삶과 드라마 제작현장은 낭만과 시련이 거듭되는데..
감독이 작품속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자만할 때.
작품은 본 궤도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내 앞의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뒷통수 맞는 일이 일어난다. 지금처럼.
<4회 지오 나레이션>
드라마를 보면서 정지오역의 현빈은 배역에 잘 어울리면서 그 반대일 때도 있었다.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가끔 어색한 연기가 있었고, 때로는 훌륭했다.
가장 인상적인 연기는 초반에 연희와 준영 사이에서 갈등하며 눈물을 보일 때,
그리고 준영과 헤어지고 난 후
준영이 집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지만 열지 않고 눈물을 보일 때.
두 장면은 공감이 가는 장면이기도 했고 보고 있는 나도 감정이입이 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송혜교와 연인관계 된 것이 당연할 정도로 생각된다.
주준영 역의 송혜교는 배역과 너무 잘 어울렸다.
순정을 비웃지만 순정파이기도 하고,
강한 척하지만 너무나 여린 여자.
하지만 자기 일에 대한 열정과 도전은 끊임없다.
무엇보다 적절한 애교 타이밍은 압권이었다.
뭐랄까.. 정말 사랑스러움이 느껴져서 '주준영' 이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지오와 준영이 다투고 난 후,
준영이 지오에게 "우리 화해한 거지? 그럼 뽀뽀해줘" 라는 말..
정말 보면 볼수록 주준영이라는 여자에 빠져든다.
손규호 역의 엄기준도 배역과 잘 어울렸다.
이미 연기력은 검증된 상태였지만 냉소적이면서 유머스러운 손규호 역은 그였기에 가능했다.
사실 손규호 같은 캐릭터는 방송가에 어느 정도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디어 프리랜서를 하면서 여러번 비슷한 인물을 만나봤지만,
직접 드라마 캐릭터로 보니 많이 공감했다.
인상적인 장면은 8회에서 국회의원 아버지의 비리사건으로 마음이 쓰릴 때,
그가 술 마시며 핸드폰으로 여러 명에게 전화했지만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 모습.
정말 공감되었고 공감했다.
익숙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그의 말과 행동이 가장 이해가 잘 되었다.
윤영 역의 배종옥을 보면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어릴 때 배종옥은 지금의 젊은 여배우들 못지 않는 인기를 누렸는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연기는 원숙함이 느껴졌고 은근히 이 드라마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오민숙 역의 윤여정과 우정출연한 김자옥도 극중 진짜 배우 역을 맡아 연기하니 더욱 실감났다.
드라마국 국장 역의 김갑수와 CP 역의 김창완, 작가 역의 김여진도 배역에 잘 어울렸다.
극중 김갑수와 김창완의 동병상련한 모습은 진지함과 코믹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고,
김여진은 작가 역과 더불어 드라마의 인물관계를 정리해주는 역할도 한다.
조금 아쉬운 것은 국장 역의 김갑수가 초반부와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윤영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표현해 약간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인배우급에 속하는 최다니엘, 서효림, 판유걸, 이다인, 이준혁도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양수경 역의 최다니엘과 일명 김군 역의 이다인이 인상적이었다.
양수경은 사고뭉치 캐릭터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진지한 면을 보였는데,
최다니엘이 잘 소화했고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많아보였다.
또한 김군 역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개성적인 캐릭터였다고 생각하는데,
이다인이 정말 배역을 잘 소화했고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짧게 출연한 이준혁은 평면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는 처음이었는데,
그녀의 사랑에 대한 해석이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실제 드라마 제작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드라마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긴박감과 열정이 드라마 보는 내내 묻어났다.
배우들 간의 대사와 나레이션도 인상적이었고,
상황별 분위기 연출도 좋았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드라마 집중도가 떨어졌다.
아마 상대적으로 드라마 제작과정이 줄고 멜로가 부각되서 그런 것 같고,
지오가 준영이에게 이별을 고하는 동기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벌어지는 신파는 조금 공감하기 힘들었다.
앞으로 그녀의 드라마를 더 보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이해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때, 그와 헤어질 수 밖에없는 이유들.
그와 헤어진게 너무도 다행인 몇가지 이유들이 생각난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고작 두어가진데,
그와 헤어져선 안되는 이유들은 왜 이렇게 셀 수도 없이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건가.
<12회 준영의 나레이션>
첫회부터 나오는 나레이션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극 중에서 나레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서 차츰 적응이 되었고,
극중 감정과 분위기를 정리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는 인물 간의 대사보다 나레이션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방송국 드라마 제작에 관한 긴박함과 사실성이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뒤로 갈수록 사랑과 이별에 관한 남녀들 간의 반응으로 전환된다.
상투적인 내용이라 별다른 특징은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집중됐다.
사랑에 빠지고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남녀 간의 이유들..
그리고 냉정하게 뿌리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들..
때로는 바보같이 보여 화가 나고,
때로는 안타까워 슬퍼지기도 하고,
어느새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대립과 대사는
나의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
결말이 약간 억지적인 면이 있었는데,
이건 멜로 드라마가 가진 한계임에 분명하다.
아니면 사랑이란게 원래 억지적인 면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지금 살고있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동료들과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내가 사는 세상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드는 축제같은 그날까지.
<16회 준영, 지오 나레이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 멋진 삶도 없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현실에 비추어 수정을 거듭하고,
결국 꿈이 현실에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안정적인 수입과 생활을 좋아하며,
도전과 모험이라는 단어는 흐릿해져간다.
어느덧 나도 20대 후반의 끝에 이르렀지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면 참 의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학생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시위를 했으며,
사진과 음향, 영상작업으로 밤을 새우고 사람들에게 칭찬과 욕도 들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즐거웠고 지금도 프리랜서로 하고 있다.
음악은 20대 중반 때부터 시작했지만 평생 할 생각을 가지고 있고,
책과 글은 천직이라 생각하며 계속 공부 중이다.
이외에도 사랑의 열병에 걸려 하루종일 설레였던 적도 있었고,
이별의 슬픔을 느끼지도 못한 채, 내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 적도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비 오는 날 밤과 새벽 빗소리가 너무 좋아 잠을 못 이루거나 자다가 깨기도 했다.
향기로운 술과 넉넉한 안주로 긴 밤을 친구와 함께 보내는 날은 늘 즐겁다.
이 모든 것들은 30대 이후에도 내 삶의 좋은 밑거름이 될 경험과 깨달음이다.
그리고 지금이나 앞으로나 내가 사는 세상들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내가 사는 세상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에 뜨거운 열정과 커피와 술 한잔의 여유,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인과 친구들이 있다면 험한 세상을 이길만한 힘이 된다.
드라마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과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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