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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잠 못 이루는 새벽이다

EAST-TIGER 2018. 10. 25. 04:45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시인 이형기는 <낙화(落花)>에서 말했다.

그러나 가야할 때가 언제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왜 가야 하는 것이며,

그 뒷모습이 왜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 것일까?

거의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지만,

가끔은 그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자체에 불만이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을 수도 있잖아.

순간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더라도,

순간을 누군가는 "영원"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더라도, 

기억해주기를..

언제 마음을 편히 풀어 아쉬움과 근심없이 살 수 있을까?

아직 나는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앞날은 알 수가 없다.

 

부모님의 품이 편안하고 따뜻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만큼이나 상처를 주고 줄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불행하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곁을 떠날 때가 분명 지났다.

나는 나 스스로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고,

가정을 꾸리거나 혼자서라도 살아남아야 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럴 수 없다.

유학을 중단하고 되는대로 살아볼 수 있겠지만,

어떤 한계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것에 체념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유학과 그에 따른 결과들이 그 한계들을 줄이거나 없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럴듯한 저항과 도전을 하며,

쉽게 체념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 부모님의 품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렇다고 지금 나의 삶을 부정하거나 저주할 수 없다.

지금은 죽고자 하면 진짜 죽을 것이고,

살고자 하면 살 수 있을까 말까 할 시대이다.


월요일에 종로에서 남 교수님을 만났다.

근래에 종로에 있는 지인의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내게 말했다.

분명 뭔가를 하고 있으신 듯 하지만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1년 전보다는 생기가 있는 얼굴과 행동이었다.

1년 전에 갔던 동대입구역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고 차를 마셨다.

부끄러운 기억이 있었던 곳이라서,

다시 찾아와 그 기억을 되새기고 극복하고 싶었다.

우리는 저녁 8시가 가까워질 때 헤어졌고,

교수님은 천호역 쪽으로,

나는 급작스럽게 강변역 쪽으로 이동했다.


철학을 전공하는 학부생 정효를 만났다.

우리는 같은 공부를 하는 "학생"이지만,

서로 다른 지점에 있기에 전공에 관한 대화에 있어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가 필요하다.

그것에 대한 크기가 있고 그 크기가 어느 쪽이 커야 한다면,

역시 내 쪽이 그러해야 한다.

아니면 아예 전공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잘못하면 알게 모르게 "선생" 질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되도록 일상적인 주제들로 대화를 했다.

그래도 충분히 철학적인 대화였다.

2시간이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다.  

나는 정효의 뒷모습을 보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한국에서 비 내리는 날은 내게 특별하다.

절기 상으로 상강이었던 화요일 오전에 요란한 비가 왔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세상은 탁한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12층에서 보는 비 오는 날의 풍경들은 흥미롭다.

나는 책을 읽다가 일어나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상하지.. 누가 나를 안아주는 것도 아닌데,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수요일에 예정되었던 모발 이식 치료를 받았고,

이로써 현재 할 수 있는 치료는 모두 끝났다.

앞으로 1년 전후로 치료의 성과를 볼 수 있겠지만,

나는 2년 전후로 그 성과를 의료진과 상의할 생각이다. 

다시 한국에 온다면 "빈손"으로 올 수 없다.

가양역에 있는 병원에 가려고 9호선을 탔다.  


진료를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병원 근처에 도착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책들을 둘러 보았다.

천천히 책들을 둘러 보았는데.. 사고 싶은 책들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작년에 합정역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10만원 가까이 책들을 구입했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의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팔리지 않은 책들과 읽거나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들어 본 책들,

그리고 똑같은 책들이 책장에 진열되어 있다. 

가양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느낀 불만이 있다면..

철학 관련 전문 서적들이 정말 적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한국에서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정서일 수 있다.

깊고 두꺼운 지식들보다는 넓고 얕은 지식들을 선호한다.

그래서 강신주 박사의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시집을 발견했는데.. 순간 걸음을 멈췄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사는 동안 윤동주의 시들을 되도록 많이 외우고 싶다.

언제라도 혹 누구에게나 속삭이거나 말해줄 수 있게..  


원래 진료를 받으려고 했던 것은 A였으나,

어쩌다가 B에 대한 진료도 함께 받았다.

A에 대한 진료는 꼼꼼하고 신중했지만 아무런 치료없이 끝났고,

B에 대한 진료는 A에 대한 진료에 비해 빠르게 끝났지만,

치료는 확실히 받았다.

A에 대한 치료는 언제라도 받을 수 있지만 진료비가 비싸다.

B에 대한 치료는 지금 받으면 더 이상 불편을 겪지 않고 진료비가 싸다.

여기에 삶의 지혜가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은 포장지가 특별히 예쁘면 내용물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그 반대라면 내용물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과장 광고와 홍보에 이끌려,

물건을 구매하고 후회했던 적이 있었을 텐데..

그래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나보다.

오래 전부터 사람에 대한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외모나 겉을 보고 사람의 속과 내면의 생각들을

평가했던 적이 거의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말은, 

동화와 신화, 성경에도 써 있을만큼 만고의 진리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현실에서는 이 진리가 부정된다.

나는 최근의 내 모습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은 나의 어느 곳을 보고 나를 평가할까?

포장지와 내용물은 항상 특별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둘 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둘 다 하잖게 생각한다.

이것도 삶의 지혜이다.

 

오늘 나는 온라인으로 알라딘에서 세 권의 책을 구입했다.

두 권은 시인 윤동주에 관련되었고, 

한 권은 Schelling에 관련되었다.

"사람이 잔인하다"는 것을 어머니와 동생과의 대화에서 느낀다.

이 두 여자들은 내가 그동안 만난 어떤 여자들보다 잔인하다.

정말 "피는 물보다 진하다."

동생에게 독일행 비행기표 예약을 부탁했고,

곧 그 일정이 정해질 것이다.

이제 한국에 머물 수 있는 날들이 일주일이 조금 넘는다.

이상하다.. 한국의 집보다 독일의 집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나태에 맞설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그 일들은,

생각 밖에서 그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

열등감과 자격지심, 자기비판, 질투, 분노 등등..

나와 타인 간에서 생기는 우열의 감정들은 자연스럽다.

그런 감정들에 맞설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더 나은 "나"를 만나더라도,

내가 처한 운명과 그러한 운명으로서의 삶과 책임이 쉽게 달라질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신은 신이다.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과대망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

허무한 것들에 대한 거부가 필요하다.


쌓여가는 붕어빵들과 손님 없는 음식점들.

폐지를 줍고 찾는 노인들의 움직임과 첫 차를 타는 사람들.

공권력과 기득권에 부정되고 무시되더라도,

노력과 도전을 계속하는 사람들.

높은 건물들 밑과 사람들의 발 밑에서 자라는 민들레들과 풀들.

나의 눈은 그것들을 보며,

나의 심장은 그것들에 잠잠히 반응한다.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광석이 형의 노래들을 듣는다.

오늘도 잠 못 이루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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