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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 있어서의 철학

EAST-TIGER 2011. 1. 5. 05:56


1. 희랍의 소피스트들


  기원전 5세기 후반 동안 국력과 부가 절정에 달하였던 아테네에 본토인이 아닌 희랍의 여러 도시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로서 정치적 업적, 문화의 발전, 그리고 예술의 숭고성에 대한 인식의 보급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저한 시기였다. 이처럼 아테네는 문화적 분위기 때문에 이름이 높았으므로, 각처의 희랍 사람들이 흔히 아테네에 체류하면서 그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이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른바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파가 있었다.


  소피스트(sophist)라는 말은 전통적으로나 또는 현재에 있어서나 보통 비난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수사학적 궤변, 지적 천박성, 심지어는 도덕적 불성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옛 문구가 단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좋지 않은 이론을 좀 더 좋게 만들고자하는” 사람을 대체적으로 소피스트라고 부른다.


  기원전 5세기에 있어서의 소피스트의 활동은 전성기에 달해 있었고, 소피스트들은 ‘지자(知者)’ 라고 자처하면서 오만을 부리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자기들은 훌륭한 태도, 사회적 성공의 기술, 웅변에 의해서 집회를 좌우하는 방법,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데 필요한 술책 등을 가르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들의 활동의 중점은 어디까지나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이 희랍인의 생활에 미친 영향은 철학적 탐구 대상을 물리적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이해를 초월한 과학으로부터 좀 더 직접적인 것으로, 세계의 분석으로부터 세계를 다루는 기술과 방법의 생각으로 옮겨 놓은 점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문법과 수사학이요, 웅변술과 시학(詩學)이요, 여러 가지 문학적 스타일의 장단점이요, 교육과 정치학이었다. 


  대표적인 소피스트로는 플라톤이 호의를 가지고 대화했던 프로타고라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 라는 명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소박한 인간의 입장에 서서 실제로 눈으로 보거나 만져 보는, 또는 그 밖에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들만이 실재적이라고 주장하려 하였다. 그는 인간이란 일단 자기의 감각을 불신할 경우에는 모든 건전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프로타고라스의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아무런 음미도 받지 않는 통상적인 인간의 경험을 신뢰하였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그 이상의 지론을 품게 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다. 가끔 ‘상식적 신념’ 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프로타고라스에 있어서도 최초의 의견을 그대로 주장해 나갈 때, 그 이상으로 근본적인 의미가 그 의견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만일 감각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적이라고 한다면, 실재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달라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타고라스는 상대주의를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당시의, 그리고 그들의 도시의 관습에 대해서 적절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소피스트의 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도덕 문제에 대한 그들의 상대주의의 적용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모든 소피스트들은 종래 도덕을 좌우해 온 종교적 권위를 배격하였다. 바로 신의 존재 그 자체가 의심스러우며,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다가 예속시킬 필요가 없다. 자기에게 좋은 것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각자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은 것이란 다름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이요, 그에게 이익을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좋은 것을 어떤 신학적 · 정치적, 또는 사회적 억압 때문에 희생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즉 양심과 정의감은 인간의 내적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적 신념이며, 더 이상의 훈련이나 객관적인 시정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악에 관하여 각자의 느낌에 따라 느낄 뿐이다. 각자의 느낌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타당한 논증의 근거란 있을 수 없다. 


  같은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플라톤에 의하여 “정의(正義)라는 것은 강한 자의 이익을 의미한다.” 는 명제를 주창한 사람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정의로서 통하는 것이란, 자기에게 복종하는 약한 대중에게 자기의 기호나 취미를 강요하는 가장 강한 사람의 의지다. 물론 누구든지 만일 지배자의 의지를 무시하고 그에 따르는 벌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지배자의 의지를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더 강한 사람은 그 지배자가 아니라 자기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타고라스는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상대주의를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방향으로 밀고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현명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이 획득될 수 있는 사회적 힘에다 자기의 취미와 욕망을 연결해 나갈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며 집단에 따라 다른 만큼, 도덕이라는 것도 변천하는 법이다. 아테네에서 좋다고 하는 것이 스파르타에서는 나쁠 수도 있을 것이며, 또 그 반대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사람은 변동하는 관습에 적응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그들의 생각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지성이 뛰어난 사람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절대적인 도덕적 명령도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2.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그가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에서 볼 때에는 소피스트와 유사한 바가 있다. 즉 그도 역시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우주론적 사색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인간에 관한 문제들의 분석을 자기의 중심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주론적 문제들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소피스트들과 달랐다. 그는 어떠한 사실의 문제에 관해서나 경험에 의한 명증의 필요성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경험의 영역을 초월한 어떠한 사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품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설에 있어 소피스트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기준에 의해서 옳다고 인증되지 않는 한 인간의 욕망을 신뢰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좋은 것을 제시하는 지침으로서 신뢰를 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넘어서, 그 목적을 판단하는데 의거할 보편적 기준에다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보편적인 것은 알기 어려운 것일는지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의하면, 특수한 사물이나 행위들은 관찰할 수는 있어도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반면 보편적인 것은 정의 내릴 수는 있어도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도덕적 인식을 얻는 수단으로서 감각을 경시하고 이성을 중시하였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것은 귀납적인 일반화에 의해서 도달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보편적인 것이 나타나 있는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의 공통적 요소를 이끌어 냄으로써 발견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난점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것이 나타나 있는 경우, 우리는 어떠한 것들인가를 알기 위해, 이보다 앞서 그런 경우들을 선택하고 기록하는 데 있어 기준으로 삼아야 할 그 보편적인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기준의 탐색을 거의 끝없는 탐구라고 여겼던 것같이 보인다. 그는 결코 자기가 그 탐구를 끝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고정적으로 구체화된 도덕적 지식의 옹호자가 되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성찰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3. 플라톤


  플라톤에게 철학이란 다른 학문과 같이 논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긴밀한 정신적 교제를 통해서만 사람의 영혼 속에 불꽃처럼 점화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저작이라 추정되는<대화편>들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의 소크라테스적<대화편>들은 비록 그 토론들이 어떤 확연한 결론을 맺고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언제나 자기들이 추구한 분석 과정 속에서 확고한 신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독립적인 사상이 보다 농후한 후기의<대화편>들은 아주 신중하게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들 여러 가지 신념과 결론을 될 수 있는 대로 플라톤 자신과의 공감적 입장에서 종합해 보면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대화편>의 묘사를 잘 살펴보면, 사실은 반어법이면서도 진지한 담론을 계속해 가는 가운데 서로 사상을 교환하는 지성적인 희곡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예컨대<라켈스(Laches)>는 용기, 즉 사내다움을 토론한 것이요,<고르기아스(Gorgias)>는 웅변술을 가르치려는 소피스트의 주장을 다룬 것이요,<파이돈(Phaedo)>은 죽음의 의의와 영혼의 운명을 고찰한 것이며,<항연(Symposium)>과<파이드로스(Phaedrus)>는 사랑의 본질과 그 저속한 형태 및 고상한 형태를 고찰하고, 이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이 영혼에 끼치는 영향을 논한 것이다. 또한<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메논(Meno)>은 덕(德)을 가르치는 가능성과 방법을 논란한 것들이요,<티마이오스(Timaeus)>는 우주의 구조에 관한 그 당시의 몇 가지 학설들을 소개하고, 우주론에 대한 약간의 심오한 시사를 보여준 것이며,<국가편(Politeria;Republic)>은 인간으로서 또는 국가로서의 바르고 훌륭한 형태의 정의를 내리고, 인식에 관한 이설과 교육의 방안을 개진한 것이다. 


  플라톤은<대화편>들에서 철학적으로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조리 있고 논리적인 사유를 증진시켜준다. 둘째는 그러한 사유에다가 자기가 사색해 오던 문제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확정하려는 노력을 가하고 있다. 그가<대화편>을 통해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이성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그의 가능성 있는 영광이며 특권인 훌륭한 삶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질서와 안정과 확실성을 얻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플라톤의 덕(德)에 관한 사상


  플라톤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많은 분야 - 윤리학·정치학·논리학·인식론·미학·형이상학 등 - 의 문제들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 즉 그를 다른 분야에까지 이끌어 간 핵심적 분야는 윤리학이다. 그의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부터 가장 후기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가 직접 간접으로 그 의의를 음미하는 데 골몰한 제일 큰 문제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사람다운 훌륭한 삶을 다루는 데 있어서 기반을 이룬 것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이미 그 이전부터 희랍의 도덕적 전통 속에 간직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는 이 개념을 명백히 밝혀 다른 견해들과 선명하게 대립시킨 천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개념이란 어떤 것의 좋은 상태는 그 사물의 가장 성숙한 모습, 즉 가장 완전히 발전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역시 좋은 상태란 그가 가진 잠재적 모습의 완성이라 하겠다. 이것에 대해 플라톤은 희랍어로 ‘아레테(arete)’ 라고 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흔히 ‘덕(德;virtue)’ 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말한 문맥상의 덕은 단순한 결백, 즉 악의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탁월성의 성취요, 인간의 온갖 능력이 이상적으로 발휘되어 완성에 도달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플라톤은 자기가 말하는 덕이란 개념의 여러 가지 의미를 계속해서 해명하였다. 인간의 타고난 천성은 유덕한 것이 아니다. 실로 인간의 타고난 천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성은 마치 가공되지 않은 재료가 완성된 제품과 관계가 있듯이 덕의 성취와 관계가 있다. 플라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다운 좋은 생활이란 인간성에 숨어 있는 모든 소질을 총체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생활은 금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갖 능력을 통일적 활동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현시켜 감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권위나 법은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사회의 관습과 또한 시민의 법률을 더욱 존중한 것만은 사실이다. 즉 그는 관습이나 법률에 대하여, 그것들이 모두 과거 사람들의 많은 경험적 교훈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경솔히 반대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그 자체로서 필연적으로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려 하지도 않았다. 법률이나 관습은 그것을 예속하고 있는 표준에 의해서 판정되어야 하는 것이요, 그것들 자체가 표준으로 승격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종교적 권위라는 것도 인위적 명령이나 사회적 강제 이상의 어떤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른바 신의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윤리적으로 건전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즉 신의 뜻이라 할지라도 객관적인 도덕적 타당성을 가진 표준에 의해서 판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나 정치나 사회생활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올바르게 인도될 경우에는 인간의 실천생활에 막대한 공헌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러한 실천에 대하여 수단의 구실을 해 온 그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을 사람이 외적 권위로 삼고 복종하여야 할 최후의 목적인 양 떠받드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래서 윤리적 비판의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사람이 가진 능력의 전체적 실현과 조화될 것을 자각적으로 분명히 욕망하게 하는 방법과 수단을 찾는 일이다. 오직 이 능력과 이것들의 가장 조화 있고 완전한 실현과의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여러 가지 욕망이 철저히 음미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 욕망들이 선한 생활을 위한 조건에 합치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완전한 국가와 선한 인간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가 완전무결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올바로 질서가 잡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질서가 잡혀 있다면, 그것이 동시에 완전무결한 국가를 이룰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국가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이 모색하던 덕, 즉 절제와 용기와 지혜와 정의의 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대화편>에서 위와 같은 덕목들만을 제시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경건이라는 것도 포함시켰다. 그러나 특히 강조한 것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덕이었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여러 덕을 질서 잡힌 이상 국가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가를 명확히 표시함으로써 설명하려 하였다. 지혜는 물론 지배계급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용기는 전사의 계급에 고유한 덕이고 절제는 국가 전체를 통해서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할 덕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의 덕을 다른 덕들과 동등한 또 하나의 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덕은 모든 계급과 모든 사람이 다른 덕을 발휘하고 상호간이나 전체에 대해서 필요한 모든 직분을 완전히 수행할 때, 한 국가의 기능에 붙은 미묘한 성질이다. 이것이 없다면 다른 덕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며, 그들 본래의 모습은 불완전한 모방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 이 정의의 덕 때문에 다른 덕들이 생기는 것이며, 또 다른 덕들은 모여서 이 정의의 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네 가지 덕을 관념상으로는 구별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훌륭한 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덕은 훌륭한 사람에게도 또한 필요한 것이다. 지혜는 이성이 인간의 유기적 생활에 고유한 목적을 판별하고,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통일적으로 실현시켜 나가도록 지도할 때 생긴다. 용기는 기개가 어떤 자극적인 욕정이 제안해 오는 유혹을 일축해 버리고, 자연의 사건이나 사회의 불법이 위협해 오는 고생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 앞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면서 오로지 이성의 지시에 충실하게 복종할 때에만 생긴다. 그리고 절제는 인간의 많은 욕망이 각각 다른 관심을 방해하지 않고 통일적 전체 생활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할 정도로 표명될 때 생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끝으로 정의는 복잡한 인간이 하나의 조화 있는 사람이 되어서, 모든 잠재적 능력을 통일된 활동 속에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내적 부조화가 해소될 때 생긴다. 국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에 있어서도 기초적인 세 가지 덕은 결국 질서 잡힌 전체의 훌륭한 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가치는 비단 각 부분의 발전에서뿐만 아니라 그 각 부분들이 어떻게 결합되는 가에도 달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이 있다면 정의는 오직 통일된 전체 인간 속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3)교육설


  플라톤의 철학은 원래 윤리적 관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결국 교육설을 세우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즉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완성에 관한 그의 견해가 원시적인 본성을 완성이라고 할 궁극의 형태로 변형해 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교육설에 있어서의 음악과 체육은 기본적 훈련의 주요 과제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모든 논구(論究)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학과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남녀의 성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훈련으로부터 소득을 얻지 못하게 되는 시각은 바로 그가 교육과정으로부터 밀려날 시간이 되는 것이며, 그가 밀려나는 시각부터는 그가 속할 사회적 계급이, 심지어는 특정한 계급 안에 있어서의 지위가 결정되고 만다. 오직 음악과 체육의 훈련과정을 마친 사람만이 지배자 계급에 필요한 변증법의 교육을 계속해서 더 받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사용한 음악(music)이라는 말은 오늘날 영어가 지니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음악은 희랍 사회에서 뮤즈(Muse) 신이 주재하고 있는 예술 전반에 대한 명칭으로 되어 있다. 그는 조절된 예술은 도덕적 목적을 위해서 유익하게 이용될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절제의 덕을 북돋워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체육도 도덕적 목적을 위해서 옹호하였다. 국가의 견지에서 본다면 체육은 훌륭한 전사를 길러 내는 데 도움이 되며, 인간의 견지에서 본다면 용기의 덕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4)인식론 


  인식은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혹은 form)라고 불리고 있는 다른 종류의 대상에 관한 것이다. 이데아는 개별적인 것과는 달리 지성으로써만 알 수 있는 대상이며 고정적·불변적이요, 시간의 경과에 손상되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영원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개별자로부터의 일반화에 의해서 이데아의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개별자들이 아무리 적합한 이데아의 필요조건에 접근해 간다고 하더라도, 이데아가 지니고 있는 완전성을 남김없이 구현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별자를 본다든가 또는 그 밖의 양식으로 감각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을 자극하여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계기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데아(idea)는 우리가 보든가 듣든가 감각하는 개별자들 가운데의 하나는 결코 아닌 것이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만이 실재적이라는 생각에 젖어 온 사람들의 선입견에 대하여 플라톤의 반대를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선입견에 반대해서 언제나 그는 모든 대상들 가운데에서 이데아야말로 ‘실재적’이라는 술어로 표현될 자격이 가장 많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데아는 개별자들이 영원한 완전성을 손상함 없이 그것의 실재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대상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한 번도 이데아라는 것을 어떤 절대적 내지 일반적 의미에서 실재적이라고 말한 적은 없고, 언제나 개별자에 대한 우리의 교섭을 진정으로 효과 있게 해줄 수 있음직한 방법의 탐구와 관련해서 실재적이라는 말을 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비록 누구나가 깨닫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두 개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즉 개별적 사물들과 개별적 사건들로 되어 있어 완전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저급한 세계와 모든 대상이 완전하고 불변적이고 청정한 고차원적 이데아의 세계와의 두 세계에 동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탁월한 정신과 훌륭한 목적을 가진 소수의 사람은 민감하게 이데아를 인식하고 그 완전한 이데아에서 얻은 영상에 비추어서 이 저급한 세계의 일들을 다스려 나갈 것이다. 이데아의 인식은 - 그리고 다른 어떠한 것과 달리 오직 이것만이 -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별자의 세계에 있어서 좀 더 나은 질서 확립의 기술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리하여 이데아는 오직 개별자들을 판단하거나 그것들에 현명한 어떤 작용을 하거나 하는 데에 관련해서만 ‘실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탐구에 있어서의 개별자에 대한 이데아의 우위성이 곧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실재성의 의미였던 것이다. 또한 이데아를 현실적 세계의 논리적 분석인 동시에 저 세계에 대한 도덕적 선언이라고 말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숙명적으로 ‘육체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왔고 개별자의 세계에서 살게 되기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한다. 태어나기 이전의 인간의 영혼은 불사적인 신 및 순수한 이데아들과 더불어 천상에 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들이 육체 속에 갇히고 개별자들의 세계 안에서 살게 됨으로써 이데아들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지상의 경험이 영혼을 자극하여 그 영혼이 탄생 이전에 알고 있었던 어떤 이데아들을 상기하게 해준다. 이것을 도와주는 인간의 정신이란 감각에 주어진 사실의 입증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 사실을 넘어서 통찰하고, 이들 사실의 해석과 평가에 필요한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지적 생활이 오성지(五性知)의 경지로부터 이성지(理性知)의 경지로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올라갈 수 있는가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주장은 다른 모든 이데아를 이성의 포괄적 체계로 체계화하는 일은 최고의 원리, 즉 원리들의 원리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잘 이룩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최고의 원리가 되는 것은 ‘선(善)의 이데아’ 라고 주장하였다. 사물들이 그들 본연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그들이 고유한 목적에 이바지하며, 그것들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만일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체계적으로 밝혀 주어야 한다면, 인식은 기능이나 가치나 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지 다시 말하면 인식은 그 형성의 원리가 목적론적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목적론적 설명만이 이 가치라는 것을 고려할 수가 있고, 또 우리 주변의 많은 사물들을 봉사의 대상이 될 포괄적 목적에 관계 지을 수 있다. 


5)플라톤의 이상주의(理想主義)


  플라톤은 정치에 있어서 귀족주의를 주창한 사람이었다. 능란한 변론가나 웅변가가 의회에 미치는 따위의 영향을 그는 절대 불신하였다. 인간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의 플라톤의 목표는 사람들을 교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이비적 기술을 버리고 진정한 기술을 도야케 하려는 데 있었다. 진정한 기술이란 그것들의 원리인 이론의 완전한 이해에 입각해서 도야되는 숙련을 말하는 것이다. 이해(理解)는 모든 것의 탁월한 면을 밝혀 주는 이데아의 인식에서 시작되며, 서로 연관성을 가진 많은 이데아를 변증론적으로 파악하는 데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진정한 기술자, 즉 익숙한 의사나 숙달된 체육가나 노련한 정치가일 수가 있다. 오직 건전한 교육의 모든 단계를 통과하여 이성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국가를 다스리기에 적합한 것이다. 만일 완전한 지배자와 확신에 찬 국가가 존재하게 된다면 머릿속에 그리던 완전의 영상(映像)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재빨리도 이 주장에 덧붙여서 이러한 실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제시하는 것이 자기의 탐구 목적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의 목적은 오히려 윤리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었다.


  실직적인 지배계급에게 필요한 지혜는 실제적인 곤경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지식이다. 그리고 실제로 야기되는 무수히 많은 곤경들을 고려할 수 있는 이론이란 결코 세워질 수 없다. 정치적 과업은 이상 국가를 정의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거기에는 바른 정의에 의한 인식도 필요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실적인 일들을 어떻게 그 정의에 맞게 다룰 수 있을까를 결정하는 재질(才質)도 필요하다. 


  플라톤은 후기의 한<대화편>에서 국가의 최고 권위는 법률보다도 오히려 인간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만일 사람이 지혜와 훌륭한 능력만 가지고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은 법률이 지배하는 것이다.” 어떠한 법규나 법률 체계도 변천하는 정세의 얼크러진 혼란 속에서 국가를 성공적으로 지도해 나가는 구실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법률을 활용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연속적인 긴급 사태에 처해서도 그 법률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다시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률은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생활에 있어서는 고정된 원리이지만, 정치적 생활은 오히려 착잡한 우발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6)휴머니즘의 전통


  플라톤은 서구 문화에 있어서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불리게 된 전통을 철학적으로 명확히 표명한 사람인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 전통의 연원을 이룬 사람이다. 휴머니즘을 식민지의 희랍인들에게서 발단된 과학적 전통의 반대 사상이라고 여김은 정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그것은 식민지 희랍인들이 우주에다 기울인 것과 같은 냉철하고 선입견은 없는 탐구를 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제를 주장하기 있기 때문이다. (1) 인간의 최고선(最高善)은 그의 천연적인 잠재력의 실현에 있으며, (2) 그 실현을 촉진하는 오직 하나의 건전한 방법은 욕정과 의지를 억제하고 지도할 인간 본래의 이성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도덕철학에서 발단되는 전통을 표현하는 말로서의 휴머니즘은 당시에도 유행하고 있었고, 플라톤이 명백히 배격한 바 있는 극단적 두 사조의 중간적 사상이다. 더 명확히 말하면 주관주의와 권위주의의 중간인 것이다.


  주관주의와 같다고 할 수 있는 점은, 그것이 인간을 그 자신의 고유한 도덕을 목적 - 이 목적을 허용하기는 하나 그것을 위주로 추구하지 않는 세계 안에서 - 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관주의와 같지 않은 점은 그것이, 인간은 객관적으로 하나의 천성 - 그것의 이상적 잠재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석되어야 하며, 또 설령 어떠한 욕망이 인간을 휘몰아 가고 혹은 그로 하여금 그의 전체적 인격의 올바른 요구를 무시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진정한 도덕적 의의 때문에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천성 - 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권위주의와 같은 점은, 찰나적으로 의식되는 우연적 덧없는 욕정을 불신하고, 이들 충동이나 욕정을 이것들이 따르고 순종하고 이바지해야만 할 이상에 의해서 편달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권위주의와 같지 않은 점은, 소요되는 이상을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된 어떤 명령에서가 아니라, 분석을 통해서 인간성 자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질 본질적 잠재력의 조화 있는 발전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관주의는 언제나 제멋대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에 대하여 권위주의는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제창되었을 때조차도 언제나 억압과 독단주의의 경향을 지녀 왔다. 휴머니즘은 역사적으로 자기보다 극단적인 입장의 시정자(是正者)로서 이바지하는 하나의 전통이 되어 온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더불어 희랍 사상의 절정을 보여 준 철학자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문제에 대해서 아주 유사한 견해를 품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생을 통해서 플라톤 사상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또 플라톤 속에 깃들어 있던 하나의 사고 방향을 완성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의 가르침의 감화와 훈유(薰猶)의 역사적 결과로서 생긴 주요한 두 가지 형태의 사상 중 하나인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의 차이는 강조점과 출발점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어떤 철학이든 그 골자의 대부분은 출발점 여하에 달려 있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그가 이상(理想)의 정의(定議)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현실적 인간의 태만과 결함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자연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이상에 도달할 수 없게 하는 자연적인 여러 한계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보다 이상주의적으로 열망에 불탔던 사람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현실주의적으로 분석에 일관한 사람이다. 


1)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 가정(假定)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성찰 속에는 하나의 근본적 신념이 나타나 있다. 이 신념이란, 궁극적으로 실재(實在)는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많은 구체적·개체적 사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물들을 가장 본래적 의미에서 실재적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며, 파생적 의미에서는 이러한 사물들의 여러 성질이나 그들 사이의 여러 관계, 혹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그 밖의 상태나 양상들도 역시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개체적 사물들은 실체요, 또는 본래적 의미의 존재를 지니고 있으며, 성질이니 관계니 하는 것들이 ‘실체’는 아닐지라도 부차적 의미의 존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래 취지에 좀 더 충실한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실체는 궁극적으로 많은 구체적·개체적인 것들로 되어 있으며, 그 이외의 어떠한 것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러한 개체적인 것들과 관계하지 않고서는 실재적일 수 없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 신념을 명확하게 하는 셈이다.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모든 실체에는 그 실체의 특징을 밝혀 주는 관계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세계에 관한 우리의 사유는 그 세계의 성질에 의해서 좌우되며, 세계의 성질은 사물들이 무한히 잡다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소수의 논술 용어로 요약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특징도 역시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취지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연구의 어떤 대상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가를 분명히 결정지은 다음이라야만 계속해서 유익한 문제들을 설정해 나갈 수가 있고, 또 그 대상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발견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2)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


  함께 모여 자연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많은 실체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여기에 각양각색의 종류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나아가 이 여러 종류들을 하나의 계열, 즉 등급 순으로 배열할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와 같은 등급순의 계통을 세우는 데 사용한 분류의 원리는 조직의 복잡성의 정도였다. 조직의 복잡성이 더해 감과 더불어 어떤 실체가 발휘할 수 있는 지능의 복잡성도 언제나 이에 따라 점점 증대하여 가는 법이다. 물질의 조직의 복잡성이 더하면 더할수록 기능은 점점 복잡하고 착잡해진다.

생명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없어서는 안 될 물질 조직이나 신체 구조에 따르는 하나의 행동 방식이요 활동력이며, 작용이요 기능이다. 식물적 생명은 첫째 단계요 가장 단순한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동물적 생명이다. 이 동물적 생명은 식물적 생명에 필요한 조직 이외에 그 이상의 어떤 특정한 기관이나 구조가 생물체 속에 나타났을 때 생겨난다. 동물적 생명의 기능은 식물적 생명의 기능에다가 감각하고, 욕망하고, 운동하는 기능을 더한 것이다. 식물적 생명과 동물적 생명 사이에는 뚜렷한 선이 그어져 있지는 않다. 과연 확연치 않은 중간적 상태로 보이는 어떤 생물(해면이나 말미잘 같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동물적 생명의 단계는 식물의 단계에서 발전하여 그 조직이 더 복잡해지고 기능의 범위가 더 넓어진 단계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단계로서 이성적인 생명은 생각이니 믿음이니 앎이니 하는 활동이나, 또는 그 밖의 모든 인식활동들은 동물의 신체적 구조가 충분히, 그리고 알맞게 복잡하여졌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역시 단순한 동물적 생명과 이성적 생명과의 사이에도 정확하게 경계선을 긋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같은 동물이면서 인간은 뚜렷하게 합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각기 좀 더 높은 단계들은 좀 더 낮은 단계들을 전제하며 또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물적 생명은 식물적 생명의 기능이 없이는 결코 발생하지 못하며, 이성적 생명은 식물적 생명과 동물적 생명의 기능이 없이는 결코 생겨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즉 영혼)은 일정한 종류의 유기체의 활동력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과 신체와의 관계는 절단 작용과 도끼와의 관계, 또는 시각과 눈과의 관계와 같다고 하였다. 생명은 물론 신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또 생명은 신체로부터 일정한 종류의 체구로부터 분리할 수도 없다. 다른 말로 한다면, 생명은 생물체의 형상(形相)이다. 


3)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윤리학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가장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유기적 관계를 떠나서는 잘 살 수 없는 만큼, 윤리학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불가불 정치학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갈파하였다. 이렇듯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까닭은 우연적인 불의(不意)의 소치가 아니라, 천성적인 불가피한 소치인 것이다. 한 국가의 일원이 아닌 자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거나 인간 이하의 존재, 다시 말하면 신이거나 짐승이거나 그 어느 쪽일 수밖에 없다. 신들은 자족하기 때문에 고립된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완성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요, 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사회적 발전의 소질은 지니고 있지 않다. 만일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충분히 발휘하고자 한다면, 자기가 가진 몇 가지의 소질이나 능력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인간의 고유한 초월성과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사회적인 생활을 통해서 자기에게 부과된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양육(養育)과 도야(陶冶)를 받게 되는 것은 사회로부터이며, 자신의 가장 훌륭한 실현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이 사회 속에서 인 것이다. 


  그는 인간성 속에는 많은 불합리한 요소(이성의 요소를 제외한 인간성의 전체들)들과 하나의 합리적인 원리가 있고, 이 불합리한 요소들의 일부는 이성의 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일부는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성은 선한 생활이나 행복에 맞도록 변형될 수 있는 조합한 재료로 여겨졌으며 인간성 가운데에서 이성의 지배에 속하지 않는 불합리한 부분에 대응하는 것으로서는 자연적 탁월성이 있다. 이것은 행운이나 요행의 결과로 주어진 소질이다. 우리는 이 소질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불행한 조건을 책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자연적 탁월성을 덕(德)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해(理解)가 전적으로 미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며, 그 일부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변경시킬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성(理性)을 사용하여 우리의 타고난 많은 운명을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규제할 수 있게 될 날이 오기를 희망할 수 있는 것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요소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에 관한 한 우리의 행복은 타고난 행운에 달려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성 가운데에서 이성의 지배를 받는 불합리한 부분에 대응하는 것으로서는 도덕적 덕 또는 도덕적 탁월성이 있다. 이 도덕적 덕은 올바른 습관을 형성함으로써 도야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도덕적인 덕은 플라톤의 절제와도 같은 것이다. 


  어떠한 충동이나 욕망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한 상태는 부족과 과도와의 중용이다. 도덕적 덕은 이 중용이 어느 정도로 실현되는가에 따라 생겨난다. 그러나 중용을 성취하기란 용의한 일이 아니며, 장구한 훈련과 실천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특수한 경우에 뜻하지 않은 우연이나 일시적 충동에 의해서 중용에 적중하게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 세련되고 몸에 젖은 행동의 습관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만 항구적으로 믿음성 있게 중용을 발휘할 수가 있다. 


  인격은 그 습관의 성질에 따라서 선과 악으로 갈라진다. 이리하여 인격이란 긴 기간에 걸친 일관된 도덕적 훈련의 소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자라는 것은 언제나 행동할 때 여러 가지 방향으로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형성한 습관에 맞추어 똑바로 믿음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 하나의 행위만으로 미루어 사람을 유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상당한 시간의 경과에 비추어서만, 아니 그의 생활의 전 과정에 비추어서만 사람의 유덕 여부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부분에 대응하는 것으로서는 셋째 유형의 탁월성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지적인 덕이다. 이것은 교도(敎導)와 꾸준한 성찰에 의해서 체득된다. 사람은 사색적 생활을 계속해 나갈 때 가장 성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다른 생활은 지적인 생활을 발전시켜 가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적인 생활은 그 자체를 위해서 영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활이야말로 현실적·궁극적 목적이라고 하겠다. 궁극적 목적이 결국 최고의 지혜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가 이성은 언제나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의 좀 더 나은 완성을 위하여 수단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 좀 더 개혁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은 그 사용 여부를 떠나서 그 자체로서 최대 행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은 좀 더 결백한 철학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두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각각 어느 점을 더 강조하였는가 하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색적 생활에 대한 견해는 이 생활이 환상이나 근거 없는 가능성에 대한 명상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 및 정치적 생활, 그리고 정치적 생활의 무대가 되는 이 세계 등을 지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속에서 가장 잘 영위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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