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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 식민지의 철학사상

EAST-TIGER 2010. 5. 9. 04:15


희랍철학에 대하여..


  철학사는 이미 오래 전에 서구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확립된 하나의 전통에 따라, 고대의 희랍인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까닭은 B. C. 6세기 이후 수세기에 걸쳐 고대 희랍의 여러 도시 국가에 인간의 지위에 관한 그들의 성찰의 결과로서 많은 사상들이 형성되었고, 또 그것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후세 사람들의 사색에 영향을 끼쳐 왔을 뿐더러,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들 자신의 지적인 생활 속에서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철학이 희랍인들에게서 시작되었다든가, 혹은 희랍인들이 최초의 철학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 할 수가 없다. 시간에는 최초의 순간이라는 것이 없으며, 역사에는 절대적인 시초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관한 사료에 제한이 있다는 우연성 및 그 밖의 요인 때문에, 우리는 철학사의 서술과 연구를 부득이 희랍인들에게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과거의 어떠한 국면들이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이나 인간 문제들을 설명하고 평가하는 데 필요한가 하는 데 관한 경험적 판단의 한 요소를 구현하는 것이다. 법률의 역사나 종교의 역사는 로마 사람들이나 헤브라이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사는 희랍인들에게서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제1장 희랍 식민지에 있어서의 철학


1. 역사와 전통


  우리가 식민지 시대의 희랍 철학에 대한 지식을 얻는 원천은 주로 후세의 철학자들이나 저술가들의 문헌 속에 인용되어 있는 단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희랍 식민지에 있어서의 철학의 역사를 본래의 모습대로 확립하기에 충분한 자료 내지 신빙할 만한 자료를 제공하여 준 사람은 없다. 


2. 밀레토스 학파


1)탈레스 

탈레스는 물이 만물의 원리라고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는 물이라는 것이 자연계의 모든 중요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불가결의 요건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탈레스의 중요한 점은 그가 분명히 이 세계를 신이나 초자연적 힘의 활동에 의해서 설명하려고 한 이전 사람들의 노력으로부터 방향을 돌리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른바 자연주의 세계관을 세움으로써 역사상의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즉 자연의 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뚜렷한 요인을 자연 자체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2)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의 완전한 자연주의 우주론을 세운 사람이다. 흙, 공기, 불, 물 등은 당시의 희랍인들이 보통 생각하였듯이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모두 더 궁극적인 실체가 여러 가지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이 궁극적 실체는, 그것의 변화를 통하여 다양한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정자(apeiron)라고 부르고. 흙과 공기와 불과 물은 이 무한정자가 각각 마르고 차고, 덥고, 젖은 모습을 띠고 나타난 형태의 것들이다. 또한 이 세계의 상태는 어느 것도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종국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 형태의 세계들이-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특정한 세계도 물론 그중의 하나에 불과한 무수한 세계들이-이제까지 하나하나 뒤를 이어 생겨 왔고, 또 앞으로도 연이은 생멸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무수한 세계 중에서 우리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세계뿐이다.


3)아낙시메네스

아낙시메네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의 설을 반대하며, 현존 세계의 고정된 물질들 가운데에서 궁극적인 요소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는 궁극적인 요소를 공기라고 하고 다른 만물은 공기의 농후화와 희박화의 과정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공기는 비단 궁극적인 질료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통일을 유지하고 있는 궁극적인 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4)크세노파네스

크세노파네스는 우리가 비록 정확한 세계의 원래 모습이나 현재 모습을 알 수 없을는지 모르나, 진리가 어떠한 것이든 반드시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주의적·비신학적 이론 측에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신들도 탄생한 것이며.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지니고 있고, 사람처럼 활동한다고 여겼다. 크세노파네스에 의하면 이 의인(擬人)적 신관은 터무니없는 잘못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 아무도 신의 참모습을 안 사람은 없었고, 또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이렇듯 그는 통속적인 종교적 신념을 부도덕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여 공격하였다. 


3.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는 수(數)가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원리라는 생각이다. 즉 가치 있고 훌륭한 것에는 정밀하고 명확한 형식이 필요하다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명확하지 못한 것, 정밀하지 못한 것, 부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요. 확연한 것, 정확한 것, 제한적인 것은 좋은 것이다. 이리하여 수학은 사물에 대한 그 응용에 있어서 윤리학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그 요소나 활동이 적당한 비례를 나타낼 경우에 최선의 형태를 띠게 된다. 피타고라스의 또 하나의 중심적 사상은 순결성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마 피타고라스 자신도, 그리고 그보다 뒤의 피타고라스 학도들은 분명히 영혼의 윤회를 믿고 있었다. 그들의 교설에 의하면, 오직 순결한 영혼만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영혼에 필요한 것은 음악과 철학에 의한 정화이며, 이것에 대해서 영혼은 나쁜 정욕이나 속된 욕망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또 지나치게 세상사에 사로잡히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피타고라스 철학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금욕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계로부터 영혼을 분리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통 이해하지 못하는 정복(淨福)을 누리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던 것이다. 세월이 감에 따라 피타고라스 교단은 두 파로 나눠지는데, 한 파는 수사상(數思想)의 과학적인 적용을 중시하고 다른 한 파는 그들의 수의 고찰로부터 얻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정신적 문제에 관한 식견에 대하여 신비스러운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전자는 천박한 목적으로부터 영혼을 정화하기 위하여 고도의 도덕적인 교육과 훈육을 요한다고 보았으며, 후자는 감각에 나타나지 않는 세계에 신비로운 관심을 품고, 정치적 및 시민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4. 헤라클레이토스 


에베소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궁극적 질료인 동시에 인간이 의식하고 추리할 수 있는 생명 원리라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 까닭은, 불이란 끝없는 변화를 연상시킬 만큼 부단히 타고 있으며, 총명한 이성을 연상시킬 만큼 찬연히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말은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보통 자연 속에 어떤 항구적인 실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변화가 끝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우주의 불변적 격식에 따라 일어난다. 오로지 감각에만 의해서 판단하는 사람은 자연 속에 있는 법칙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만지고 하는 모든 것이 일정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변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란 곧 법도에 따르는 정연한 변화인 것이다. 변화의 구조는 그 자체를 이성의 구현이게끔 하는 하나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정설에 의하면, 불을 만물의 궁극적 질료인 동시에 인간이 의식하고 추리할 수 있는 생명 원리라고 보는 견해를 남긴 것도 역시 헤라클레이토스이다. 


5. 엘레아 학파


1)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와 정반대의 견해를 품은 대표적 철학자로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생성 변화의 사실을 강조한 데 대하여, 파르메니데스는 진정한 실재의 불변성 내지 항구성을 강조하였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잡다한 유전의 세계, 분명히 우리의 주위에 전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인간적인 범상한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이 세계는 허망한 세계이며 비실재적인 세계라고 한다. 이 세계가 비실재적이라는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는, 이 세계에 관해서 우리가 표명하는 모든 의견들이 모순에 차 있음을 증명할 수가 있고, 또한 모순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떠한 의견이든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 거짓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실재에 관하여 내릴 수 있는 정당한 정의는 오직 한 가지, 즉 불변·부동의 불가분적인 일자(一者)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그 연속체에는 안이든 밖이든 결코 공허한 공간은 없다고 여겼다. 파르메니데스가 자기의 견해를 변호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해 오는 논증 방식은 이른바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이 변증법이란 어떤 주장을 부인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되며, 그 부인이 논리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그 주장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관찰된 사실들이 가지는 감각적 명증(明證)에다 호소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변증법은 관찰이나 감각적 경험의 모든 사실들이 허망하고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의 논증들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밖의 어떠한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존재하는’ 것은 불생·불멸이다. (3)‘존재하는’ 것은 불변적이다. (4)‘존재하는’ 것은 불가분적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가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일자이고 유일(唯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제논

제논은 역설을 이용하여 철저하게 자기의 논지를 밀고 나갔다. 아마도 그는 잡다한 대상과 변화의 실재성을 믿으려는 일반 사람들의 자연적 경향에 반대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옹호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은연중에 일원론 대신에 다원론과 변화를 주장한 피타고라스의 설에 반대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논의 역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공허한 공간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2)만일 발이 날쌘 아킬레스와 동작이 느린 거북이가 경주를 하되 출발에 있어서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선두에 서 있다면, 아킬레스는 결코 그 거북이를 앞지르지 못할 것이다. (3)공중을 향하여 쏜 화살은 실제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러한 역설들이 아무리 그 형식이 우스꽝스럽다 할지라도 그 의도에 있어서는 자못 진지하다. 그것들은 일상적인 공간이나 운동에 개념에 대하여, 또는 감각의 명증성에 관한 신뢰성의 관념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것들이었다. 


6. 다원론적 학파


다원론자들은 만물은 유전한다고 본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실재는 유일 불변이라고 본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조정하려고 한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변화하는 사물들은 변하지 않는 부분들로 되어 있으며, 사물에 있어서 일어나는 변화는 동일한 항구적·불가분적 궁극적 원소들의 재분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 세계를 다원론적으로 보았고, 그 각 원소는 불가분적인 일자라고 보았다.


1)엠페도클레스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 분자에는 네 가지 종류(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 네 가지 종류란, 흙·공기·불, 그리고 물이다. 이들 네 가지 뿌리에서는 무한히 다양한 혼합물이 쉴 새 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네 가지 뿌리가 혼합되는 비율이 그때그때 형성되는 거시적인 사물마다 무한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각 혼합체를 우리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뿌리 중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뿌리의 종류에 따라 이름 짓고 있다. 예컨대 흙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대개의 경우 많은 변화된 종류가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수많은 거시적인 사물에 대해서 아무 차별 없이 하나의 이름이 통용되는 경우도 흔히 있는 것이다(진흙, 찰흙.. = 흙). 또한 엠페도클레스는 뿌리들을 혼합체로 결합시키고 다시 그것을 분리시키는 작용인(作用因)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 작용인에는 사랑과 미움, 둘이 있다고 믿었다. 사랑에 의해서 원소들이 결합되면 거기에는 조화와 평화가 깃들게 되고, 미움에 의해서 분리되면 싸움과 불화가 일어난다. 이리하여 질서와 혼돈이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서로 순환하는 것이다.


2)아낙시고라스

아낙시고라스에 의하면, 거시적 대상들의 성질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원소의 종류를 다만 흙·공기·불·물 네 가지에 국한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그는 많은 종류의 궁극적인 원소(종자) 내지 입자가 있다고 추론하였다. 이 종자는 수적으로 무한인 동시에 크기가 대단히 작은 것이다. 온갖 종류의 성질들은 이들 종자 가운데의 어느 것이 지니고 있는 성질들이다. 그리고 한 복합물의 이른바 성질이라는 것은 여러 종류의 종자들이 혼합하여 그 복합물을 형성할 때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는 종자로부터 온 것이다. 종자들 가운데에는 다른 어떠한 것들보다도 더 순수하고 더 기계적이며, 혹은 더 미묘한 종류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것은 다른 것들처럼 복합물 속에 혼입되지 않는다. 이들은 만물을 지배하는 힘이요 모든 것의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낙사고라스는 ‘정신(精神;nous)’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며, 또 전 우주에 질서를 주는 것이다. 


3)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궁극적 단위가 그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를 ‘원자(原字;atoma)’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원자에 대한 견해는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의 뿌리니 종자니 하는 것에 관한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여러 가지 원자들은 오직 크기와 형상에 있어서만, 즉 양적인 면에서만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복합물이 질적 특성을 지니게 된 까닭은 등질적인 원자들이 결합하는 구조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주 안에 있어서는 양은 질보다 더 궁극적인 것이요, 다시 말하면 질은 양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과학적 설명은 질적 차이를 분해하여 그 바탕을 정확히 계량할 수 있는 양으로 그것을 환원시켜야 한다. 둘째로 운동·변화·성장·쇠멸 등을 설명함에 있어서 사랑과 미움, 정신 등 같은 외적 힘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운동을 원자에 고유한 것이라고 보고, 따라서 모든 변화는 원자 자체의 본성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은 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원자들의 자연적·자발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엘레아 학파가 공간을 부인한 것과는 달리 데모크리토스는 공허한 공간의 실재성을 긍정하였다. 물론 공간이 실체는 아니다. 그것은 원자들의 운동에 대한 하나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공허한 공간이 없다고 한다면, 원자들로부터 우주의 여러 과정을 조성하는 막대한 종류의 사물들이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주장들은 “운동에 관해서는 기계론, 구조에 관해서는 원자론, 실체에 관해서는 유물론” 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7. 과학적 전통 


B.C. 6세기 내지 5세기에 있어 진정으로 뛰어난 철학자들은 종교적 이익을 이론적으로 수호하거나, 우주개벽설(宇宙開闢說;우주의 발생과 발전에 대한 이론을 신화, 종교, 철학, 과학의 관점에서 풀이한 각각의 이론)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위의 세계를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았으며, 주위의 세계 속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에 의해 분석함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자신이 경험이 미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 말할 경우에도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을 자기들의 관찰할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철저히 시험해 보았다. 그들은 실험에 의해서 관찰을 보충하는 수단을 강구하고 생각을 시험하는데, 그 당시로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을 조건들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것도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만큼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는 여기지 않았으며, 어떤 것을 귀중하다는 의미에서 신성하다고는 생각하였지만, 연구와 비판의 대상에서 볼 때는 신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 ‘과학적’ 이라는 말은 어떤 사상을 나타내고는 있되 정당하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갖지 못한 의견을 고집하는 그 밖의 수법들과 대조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이라고 함은 희랍 식민지의 철학자들에 있어서는 탐구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며, 과학이란 세계, 인간, 사회 등을 끈기 있고 편견 없이 음미하여 나가는 노련한 구상에서 오는 지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과학적 정신은 일종의 성실한 호기심, 즉 옛 전통에 사로잡혀 관찰하는 감각을 흐리게 하거나, 또는 판단하는 정신을 왜곡시키거나 하는 일이 없는 호기심이다. 바로 이러한 유산이 식민지 희랍 사상가들로부터 과학적 정신에 충실한 서양 문명으로부터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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