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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감당할 수 없는 질투와 의심을 가진 남자의 활극 본문
2010년 영화 <시> 이후 8년만에 이창동 감독이 신작을 발표했다.
어느 때보다 긴 공백기였으나 발표를 하자마자 프랑스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또한 해외에서는 호평 일색이었던 영화가 국내에서는 극장 관객수를 볼 때 "불호"로 평가되었다.
이창동 감독 역시 이런 대조된 반응들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보는 재미가 있고 다 보고 나서 여러 생각들이 든다.
그래서 그가 영화를 계속 만들 때까지 계속 볼 것이다.
이번 신작도 그런 동기에서 보았다.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이름을 알 수 있는 출연 배우들은 유아인, 스티븐 연, 문성근 그리고 특별 출연한 최승호 당시 PD 정도이다.
신인 여배우 전종서가 출연했는데 특별하진 않았지만 신비로운 매력이 조금 보였다.
극 중 등장하는 음악들은 몇 곡 없지만 Mowg가 음악 감독을 맡았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의 홍경표 촬영 감독이 이 영화의 촬영 감독을 맡았다.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둘의 연기가 극 중 분위기들을 형성하고 조절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한국적인 미장센들이 있다,
주로 롱테이크 장면에서 서서히 시선이 이동하며 보여지는 것들이 이번 작에서도 많았다.
고양이, 우물, 특수한 공간, 메타포, 말 없는 전화 등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볼 수 있는 소품들이 나온다.
극 중 의도적으로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 장치들이 많아서 영화를 보고 난 후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
이 영화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허구와 사실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흥미로운 미장센들이 많기에 해외에서 호평을 받을 수 있는 영화이다.
긴 러닝타임은 여전하다.
"죽는 것은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단서들이 나열될 뿐 그 단서들이 완성된 의미로 치환되지 않는다.
단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추측과 심증만 가능할 뿐이다.
영화 시작 후 20분 정도까지의 설정과 내용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택배 알바를 하는 종수가 도우미 알바를 하는 고향 친구 해미를 만나고 섹스를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둘의 관계를 애매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특히 해미가 종수에게 침대 밑에 있는 남성용 콘돔을 주는 장면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이후 종수는 해미와 연인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중 알게 된 벤과 연인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예감한다.
이때부터 애매한 것들을 확실하게 하고 싶은 종수의 말과 행동들이 시작된다.
동시에 항상 문제가 산적한 종수의 삶과 별다른 문제 없이 사는 듯 한 벤의 삶이 대조를 이루고,
해미가 벤에게 더 마음을 기운 듯한 모습에 종수의 분노는 쌓여간다.
이 분노는 극 중 거의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영화는 감당할 수 없는 질투와 의심을 가진 남자의 활극이다.
본인의 노력으로 명확하게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현실과 진실을 말해 주지 않거나 무관심한 사람들 떄문에,
단지 느낌과 추측들로 쌓여진 종수의 분노들이 자기 확신과 충돌하여 애매한 대상들을 자기 방식대로 정리한다.
헐떡이며 뛰어다니는 종수의 모습에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의 방황과 같다.
종수의 삶에는 풀어야 할 문제들 위에 새로운 문제들이 겹쳐지지만,
벤의 삶에는 친구들과의 파티와 예쁜 여자친구들을 만나며 삶을 즐기는 것이 일상이다.
파주와 서울 사이를 차로 다닐 수 있지만,
종수의 삶이 벤의 삶과 비슷해지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한국에는 "개츠비"(Gatsby)들이 많은 걸까?
이것들은 그의 삶에서의 "미스테리" 같은 일들이다.
"한국에는요, 비닐하우스들이 진짜 많아요."
물리적 영역을 제외하면 물증과 심증이 일치 않는 이상 인간의 삶과 그 순간들을 인과율로 해석할 수 없다.
해미는 종수의 여자였을까? 아니면 벤의 여자였을까?
벤은 해미를 죽인 것일까? 아니면 단지 해미를 더이상 만나지 않는 것일까?
태워진 비닐하우스와 우물은 진짜 있었던 것일까?
눈에 보여지는 대상들은 진짜일까? 아니면 어떤 것들의 메타포일까?
질문에 엮어진 인물들이나 대상들이 스스로 증명하고 고백하지 않는 이상,
보고 느끼는 "나"는 계속 그 질문들의 답을 추측하고 인물들과 대상들을 의심할 뿐이다.
그러한 불안정하고 애매한 상황들에서 인간은 더욱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느낀다.
그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극에 달하면 그 불안정하고 애매한 상황들을 빠르게 정리하려 든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태우고 파괴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불놀이와 불구경를 좋아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자신보다 약한 것들이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은 것처럼,
장인들이 자신들이 만들다 실패한 물건들을 파괴하는 것처럼.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경혐되어지는 것들이 분노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방식으로 분노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지금은 넉넉한 돈과 "안정적"이라 불리는 직업이 없으면 쌓여가는 문제들 속에서 헐떡거리며 살게 된다.
이창동 감독은 이 헐떡거림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계층이 청년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종수가 아버지의 공판장에 참석하는 장면들이다.
아버지의 공판에 방청인은 종수 혼자 뿐이고,
담당 변호사는 종수에게 아버지의 형량을 경감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이웃 사람들을 설득해서
재판부에 반성문과 탄원서를 제출하라고 권하지만.
그 반성문과 탄원서는 진정성에서 거리가 멀다.
판사는 공판에 있어서 피고인의 감정과 의도를 고려하기 보다는,
오직 제출된 증거들과 법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린다.
죽든지 말든지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관심 없는 판결이다.
해미가 사라졌지만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것은 종수 뿐이다.
종수는 벤의 집에서 해미의 것으로 추정되는 패션시계와,
해미가 키우던 고양이로 추정되는 "보일"을 보게 된다.
벤은 이전에 해미를 소개했듯이 새로운 여자친구를 친구들 앞에 소개한다.
아무도 해미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 새로운 여자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며 흥미를 보인다.
벤의 집과 그의 행적 외에 다른 곳들에서 해미의 행방을 찾은 결과,
단순 도피 또는 채무관계로 인한 사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집된 물증들과 심증들을 바탕으로 종수는 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종수는 죽은 벤과 그의 차 그리고 자신의 옷가지들을 태운다.
마치 아무도 관심없는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불타듯이 태워진다.
종수는 정말 해미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녀와의 섹스가 그리웠을까?
해미는 벤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의 재력을 원했을까?
해미의 자취방에서만 행해지는 종수의 자위 행위들과,
대마초을 피운 후 옷을 벗고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의 모습이,
인간의 내면적 상태를 가장 정직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할 수 있는 것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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