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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즐겁고 치열한 대화

EAST-TIGER 2009. 7. 3. 09:31


1학기 동안 대학원 수업을 위해 전공서적은 많이 읽었지만, 

내가 여유나 필요성을 느껴서 읽었던 책은 몇 권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학기 중에 내가 학교를 오가는 전철과 버스에서 읽었던 책이었고, 

여름방학이 몇 주 지난 지금에서야 다 읽게 되었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대담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13가지의 토론 테마를 선정하여 부드럽고 격렬한 대화를 한다.

책 카피 그대로 '그들은 서로에게 번개였고 피뢰침이었다.' 

덕분에 한 테마씩 넘어갈 때마다, 내 안에 교양과 지식이 쌓아져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책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솔직함과 진심이 느껴졌고, 

잠시 책을 덮은 후에도 생각나게 할 만큼의 대화들이 많았다.

책을 보는 내내 나는 그들의 대화 가운데 제 3자의 위치에서 참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생명과학은 인류에게 득이 될 것인가?


최재천: 사실 사람들이 생명과학에 걸고 있는 기대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여기에도 큰 맹목성이 있죠. 사람들이 은근히 가장 원하는 것은 불멸이에요. 생명과학이 발달해서 어느 순간에 우리를 죽지 않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가 죽지 않는 방법을 발견하면, 그게 모두가 죽는 순간입니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이 엄청난 번식력 속에서 지구라는 요만한 땅덩어리가 살아남는 게 신기한 일이에요. <176p>


  인간은 오래 전부터 영원불멸을 꿈꾸었고, 원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도정일 교수도 많은 신화들이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성을 교훈으로 가르쳤고 인간 역시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현재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 할 수록 인간의 욕망들은 과학을 통해 실현되어졌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녔고, 손에는 휴대폰이 쥐어졌으며, 인터넷은 지구를 작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생명과학의 발달을 통해 극에 이르게 되는데, 인간복제, 난치병 치료, 불로장생 등은 현재 인류가 바라고 있는 최대의 욕망이다. 이러한 때에, 최재천 교수는 생명과학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과학적인 근거에서 비롯된다. 간단한 말로, 생물의 번식력은 무척 빠르고 죽은 자들을 대체하지만, 양 쪽 중 하나가 멈추어 버리면 인류는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결국 생명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죽이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DNA는 영혼을 복제하는가?


최재천: 지금 제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만 하지 않는다면, 그러고 나서 영혼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영혼도 DNA의 씨앗일 수 밖에 없다" 고 대답하겠습니다. 생물학자로서 제가 제 무덤을 너무 깊게 파고 있군요. 하지만 멋 훗날을 위해 미리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274p>


  최재천 교수의 이러한 말에 도정일 교수는 "영혼이 DNA라면 영혼도 당연히 유전되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 고 답변한다. 덧붙여서 "영혼은 복제되지 않고 유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란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그 존재를 믿고 싶어하는 성향(disposition) 자체는 인간의 DNA에 들어 있다." 고 말함으로써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의 관점에서 결론내린다. 예전에 영혼의 복제에 대해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아일랜드>를 보면서 의문들었는데, 두 지식인의 대화 속에서 뭔가 해답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영혼이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단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보이지 않는 대상을 제한된 표현으로 사용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기 어렵고, 증명 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도정일 교수는 영혼에 대한 정의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의 산물이 영혼' 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내 생각과 비슷하다. 나는 가끔 영혼과 인간의 의식을 헷갈려 하는지만, 현재 내가 생각하는 영혼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자유의지이자, 신이 인간에게 준 신성(神性)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과 과학은 진화의 산물인가?


최재천: 과학과 기술의 차이를 짚어야 할 것 같아요. 과학이 기술과 같이 발달했을까 아니면 따로 발전하다가 뒤늦게 만났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동양의 기술을 평가할 땐 경험을 바탕에 둔 기술이라고 하잖아요.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동양의 과학은 경험적 기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죠. 과학적 기술은 서양에서 나온 겁니다. 지금은 과학적인 기술이 경험적 기술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헤게모니가 서양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과연 과학적 사고라는 것이 어떤 순간에 나왔다고 보기보다는 인간 뇌의 작용 중 한 부분, 즉 자꾸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려고 하는 과정이 진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진화의 결과물로서 과학이 나왔겠죠. 그런 점에서는 과학의 진화도 상당히 생물학적이라고 생각해요. <362p>


  최재천 교수는 인문학과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발달하게 되었고, 둘은 따로 진화했다기보다는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도정일 교수는 문화의 특성을 들어, 인류의 문화 속에서 인문학과 과학이 시대의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발달했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개인적으로 인문학과 과학은 인간의 필요로 의해 발달했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의지에 의해서 머리 속에 있는 감성적 생각들을 시(詩)와 문학으로 표현해냈고, 몸의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어 나갔다. 결국 지금 두 교수가 대담을 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근거가 있다. 인문학과 과학의 대화는, 종교와 과학처럼 인간의 필요에 근거하기에 서로를 넘어설 수 없고 지속적으로 발달할 것이다.



누구나 동성애적인 욕망이 있다?


최재천 이건 매우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저는 인간은 누구나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봐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어떻든 결국은 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고, 많지 않은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억압적이면서 결국 드러내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그 가운데는 조금씩 드러내면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도 있을 거구요. 저는 그런 성향이 식물이나 동물 세계에도 있고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이느냐 안보이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440p>


  동성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금기시 되는 것들은 이미 그러한 성향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있어왔고 그 대상들은 사회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다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의 동성애를 이론적으로 알게 된 순간 나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남들 보기에는 부끄러운 일이기에 은밀한 곳에서 동성애를 즐겼던 것이다. 그들에게 동생애는 그들 사상에 입각하여 의무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의식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거로 볼 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본능에 충실하다. 설령 생각과 본능에 의한 것이 사회법이나 도덕, 윤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생각과 본능을 실현한다. 그것도 안되면 상상이나 꿈 속에서라도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인간에게 있는 성향일 것이다" 라는 최재천 교수의 의견은 틀린 말이 아니다. 


  도정일 교수도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일부 긍정한다.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인간은 무엇으로도 해석할 수 없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인간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때에 따라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과 환경에 의한 복잡한 영향들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이고 이는 인간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해석 할 수 없다는 근거가 된다.

 


신화(myth)란 무엇인가?


도정일: 이성의 질주 끝에 인간이 도달한 것은 '광기' 입니다. 과학과 이성으로 몰아냈다고 생각한 '귀신' 들은 늘 뒷문으로 다시 들어와 사람들의 가슴을 점령했어요. 삶의 불안과 공포, 두려움은 이성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려거든 그들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찾아보라고 말이죠. 가슴 들여다보기죠. 그러자면 신화적 사유나 상상력을 이해하는 방식이 로고스를 거들어야 합니다. 로고스는 미토스를 거들어야 하고, 두 개가 다시 만나야 해요. 신화란 말이죠. 인간이 옛날부터 두려워했고 지금도 두려워하는 것들의 표현입니다. 계몽이니 진보니 하는 것들도 사실은 엄청난 두려움의 산물이죠. <496p>


  이번 학기 대학원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공부하면서 신화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읽었고 그것을 토대로 나의 의견을 말하자면, 신화는 인간이 가지는 고도의 상상력이 집약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화에는 그 신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인간들이 생각했던 인간이해와 살았던 전통양식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신화를 통해 당시 인간들이 가졌던 생각과 고민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에 근거하여 신화가 상징하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신화들을 이해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화들은 지금이 아니라, 무척 ‘오랜 전’ 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즉 신화는 세상의 처음에 대하여, 하늘과 땅은, 산과 바다는, 구름과 강물은, 그리고 수많은 짐승들과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되었고, 왜 그러한 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당시 인간들이 의문을 가졌던 ‘기원’(그것의 어떤 것의 기원이든지 간에)의 문제에 대한 ‘대답’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화는 오래 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금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자세하게 전해주는 살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신화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극적 상상력(theatrical imagination)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도정일 교수의 의견은 과학이 발달한 현 시대에서 왜 인문학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라고 본다.



사회문화의 다양성은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도정일: 문학이 문학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세상이 구박하고 조롱하는 바보들에게서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 인간의 정수, 똑똑한 자들이 죽었다 깨도 도달하지 못할 높은 차원의 진짜배기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서양문학에는 '거룩한 바보(Saint Fool)' 라는 인물이 있어요. 바보는 바본데, 알고 보니 성인 반열에 들 만한 바보, 그게 '성 바보' 입니다. <522p>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은 환영 받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인간들은 지금 자신이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외에 것들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도정일 교수는 그것에 대한 예로 '잡초' 를 들면서 "잡초의 가치는 당장의 효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 고 말한다. 즉 사회적으로 쓸모 없는 존재들은 앞으로도 쓸모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그런 존재에 대해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회문화의 다양성에 있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흔히 '바보' 로 여겨지는 명명되어지는 존재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바보' 들이 통속적인 인간들이 평상시에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해 내기도 하고, 인간에게 소중한 그 무언가를 그의 삶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다른 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에서는 '바보' 캐릭터가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문학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계해할 것은 자기가 아는 지식과 정보의 통찰로 인한 편견으로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면 사회의 다양성은 잃게 되고, 여러가지 크고 작은 사회문제들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능동적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기적 유전자' 는 극복 되어야 한다.


최재천: 요즘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의 위력이 엄청나잖아요. 그런데 옛날이라고 가축 병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즘은 한 번 병이 나면 전 세계가 다 흔들흔들 하잖아요. 광우병은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왜 일본까지 걱정을 해야 됩니까? 조류독감이 홍콩에서 일어났는데 왜 브라질이 흠칫합니까? 이게 모두 인간이 소들의 자유의지를 빼앗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소들의 다양성이 없어져서 그런 겁니다. 영국의 소나 일본의 소나 우리나라의 소나 다 똑같거든요. 가장 젖을 많이 짤 수 있는, 가장 살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소를 계속 인위적으로 선택해왔기 때문에 결국 전 세계에서 똑같은 소를 키우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병원균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소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이웃 마을의 소 한 마리가 쓰러져도 우리 집 소는 쓰러질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죠. <541p>


  리처드 도킨스의 명저<이기적 유전자>에서 그는 유전자 결정론적인 입장으로, "유전자는 생물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이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생물은 그것을 위해 이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고 이타적인 행동 또한 이기적인 계산에서 비롯되었다" 고 말한다. 이와같이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이 되는 생각과 행동에 민감하며 그로 인한 폐해는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최재천 교수가 예로 들었던 전세계적인 가축병은 인간이 도킨스의 의견을 실현시킨 결과이다. 이외에도 지구온난화, 생명과학, 이상기후변화 등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기적인 재앙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은 자연과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고, 그 질서가 파괴 될수록 그에 따른 결과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되돌아 온다.



인간에게 도덕 유전자는 있을까? 


도정일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경쟁력' 입니다. 자유 경쟁이라는 것은 진짜 자유 경쟁이죠. 그럴 때만 경쟁은 '탁월성' 을 가려내는 '선체제(善體制)' 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한국에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라" 가 돼요. 규칙이고 뭐고 없어요. <577p>


  책에 의하면 도덕 유전자는 '모방' 을 통해 전승된다. 예를 들어 공자나 예수 같은 성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모방' 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또한 모범이 될 만한 도덕적 행위를 모방함으로 도덕 유전자는 전승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모방이 있다면 부정적인 모방에는 규칙과 공정성을 잃어버린 상태도 가능하다. 도정일 교수는 '자유 경쟁' 의 예를 들어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열거한다. 그는 "무규칙한 경쟁의 문화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퍼져서 무조건 이겨놓고 보자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다." 며 "신문 같은 언론 조직들도 자유 경쟁을 떠들 줄만 알았지 경쟁의 공정성과 규칙의 원칙은 지키지 않는다." 고 말한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경쟁' 은 악체제(惡體制)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 마련된 규칙과 질서를 사회 구성원들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파괴되는 순간부터 정의로운 사회는 없다. 개인적으로 대학원생이자 일선의 교사로서 안타까운 점은 10-20대에 속해 있는 가장 순수하고 패기 넘치는 사회 구성원들이 정의에 민감하지 않다는 점이다. 학교나 사회에서 정의를 말하면 남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거나 왕따가 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옳을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없게 되거나 불의한 일을 불의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장착된 시한폭탄과도 같다. 즉, 어느 순간에 불의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거나 그렇게 될 때, 정의는 멀어지고 너도 나도 불의를 행하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 때는 성인들의 위대한 가르침이나 도덕이라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성 회복과 정의로운 사회 구축은 지금 같은 시기에 더더욱 중요하고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그들이 모방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21세기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최재천: 남자든 여자든 참 힘들어진 세상입니다. 텔레비전을 틀면 완벽한 남성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잘생겼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거기다가 자상하기까지 한 주인공 남자 배우. 그 남자를 보다가 배 나오고 일요일에 쿨쿨 잠만 자는 남편을 보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요. 예전에는 사회가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경쟁을 하더라도 규모와 강도가 아주 작고 약했죠.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요. 작은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가닥할 수 있는 거리가 굉장히 많았다는 거죠. 지금은 모든 사람이 타이거 우즈에게 비교당하고 전지현에게 비교당하게 되어버린 겁니다.<584p>


도정일: 인간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절망적인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는 좀체 반성하지 않고, 더구나 반성의 결과를 사회운영에 적용해서 필요한 변화를 일구어내지 않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절정에 이르거나 죽음이 코앞에 보일 정도로 위기가 닥쳐야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거죠. 지금처럼 풍요의 맛을 본 시대에는 삶의 방식을 바꾸기가 더 어렵고 정치 민주주의 아래서는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니까 본질적 변화를 시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민주주의가 두터운 다양성을 위한 체제인데, 그것이 또한 다양성을 어렵게 하는 얇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596p>


  두 지식인의 마지막 대화는 인류의 미래이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간들이 서로에 대한 비교와 경쟁을 넘어 협동할 것을 당부한다. 사회는 다양성이 유지되고 인정되어야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고, 여기에 서로 돕는 협동이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있다. 최재천 교수는 "지금의 인류가 진화의 최정점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며 "우리는 진화에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화의 과정 중에 있다." 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인류의 크고 작은 문제들은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서 근거한 재앙들이다. 또한 인류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안일한 마음을 갖는 것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절제와 도덕성 회복으로 정의롭고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실현시켜야 하고, 인문학과 과학 역시 그런 사회를 위해 각 분야에서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13가지 테마 중 인상적인 부분을 선택하여 두 지식인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첨부하여 서평을 썼다. 꽤나 많은 분량으로 출판되었지만 인문학과 과학의 두 지식인의 치열한 대담은 상당히 흥미로웠고, 내게 있어서 지식과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거의 전 영역을 두 지식인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고, 두 지식인의 다양한 학문적 이해의 지식의 폭이 엄청나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새삼 알 수 있었다.


  인문학과 과학은 서로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위치에서 인류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 지금도 헌신하고 있고 서로를 견제하며 발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영역은 각자의 길을 걷지만 때로는 연합하여 인간이 가지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최전선에서 활약할 것이다. 생각만큼이나 긴 서평이 되었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가지는 의미와 소중함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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