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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만약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EAST-TIGER 2010. 9. 13. 08:34


 황석영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단편<삼포 가는 길>을 읽었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교 때 잠시<장길산>을 읽었고,<강남몽>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그의 장편소설이자 그의 문학세계를 접하게 된 첫 계단과 같다. 


  만주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부터 고된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에 참전했고, 장년기에는 북한을 방문해 199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지금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황석영. 왠지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에서 비롯된 회고이자 성찰이 아닐까싶다. 아마도 내가 그의 신작<강남몽>을 읽게 된 계기도 그의 삶이 내뿜는 묘한 끌림이 나에게 전달되었기에 본능적으로 읽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뭐요 형님 벌써 취했수?

—한잔 쭉욱 마시라우!

—회사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니 시원하겠수.

—어이, 너 말이야, 인생을 어드렇게 생각하나?

김창수의 느닷없는 말에 김진은 피식 웃었다.

—이거 원, 별을 보구 점을 치는 페르시아 왕자두 아니구.

—야야, 사는 게 다 욕이야, 거럼 욕이디 않구······

김창수가 중얼거렸고 김진은 신중하게 술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151p>


  책의 대표적인 등장인물은 박선녀, 김진, 심남수, 홍양태, 임정아 등으로 각 인물들이 접한 시대상과 그들 나름의 생존법을 보여준다. 작가는 각각의 삶을 통해 일제치하 말기와 해방 전후의 우리나라 역사를 조명하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와 권력층의 형성, 60~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권을 중심으로 한 부유층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한 계기로 일약 화류계의 거물이 된 박선녀의 삶은, 그의 이름답게 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받지만, 사랑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 부의 축적과 생계유지를 위해 열심히 살았고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만 바라보며 눈앞의 이익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인물이다. 건설업으로 성공한 김진은 일제치하 말기에 그의 동료들과 만주에서 일본군 스파이 노릇을 하며 친일행각을 하다가, 해방 후 미군으로 옮겨 좌파계열 첩보활동을 계속한다. 드러냄보다는 숨김으로써 철저히 자기관리를 한 그는, 1960년대부터 건설 회사를 창업하여 정관계 로비를 벌이며 부를 축적한다. 같은 시기에 심남수는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어, 오늘날 강남지역의 땅들을 매입․투기하면서 부를 축적하다가, 삶의 회의를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광주에서 폭력조직을 형성하여 서울로 진출한 홍양태는, 정치깡패로 활약하다가 유흥사업을 기반으로 지역관리를 하는 폭력조직두목으로 성장하지만, 삶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고 폐인이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백화점 계약직 점원인 임정아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만, 앞선 네 인물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보다 자수성가를 통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진취적인 마음을 가졌고, 자신보다는 가족의 행복을 먼저 생각한다.


  5명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시대별로 실명과 가명인물들도 등장시키면서 소설의 사실성을 주고 있다. 또한 실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각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과 말, 행동들은 책을 보는 내내 묘한 긴장감과 의미를 주었다. 요컨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사람마다 해방 전후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나타내면서, 그들이 접한 역사적 사건들과 분기들은, 독자들 스스로가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 무렵 심남수는 같은 아파트 동의 아래윗집에 살면서 박선녀와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박선녀를 애틋하게 사랑한건 아니었다. 그가 박선녀에게 잘 대해준 것은 아마도 옛날의 자기 회한이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냉정하고 영악한 데가 있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시속 말로 촌년이었다. 살아내려고 겉으로 차가운 척하는 게 역력히 보였다.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그는 그녀와의 작별을 사무적으로 무덤덤하게 잘해내는 것 또한 사내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에서 십년을 보내고 팔십년대 말에 돌아왔다. 그동안 박기섭의 건설회사는 엄청나게 성장해 강남 곳곳에 그가 지은 아파트들이 서 있었다. 물론 그 무렵에 심남수는 박선녀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심은 결혼도 했고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며 대학에 자리도 얻었다.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던 시대의 기억은 청년기의 씁쓸한 실수처럼 가슴속 깊숙이 숨겨져 있었지만, 젊은 날의 횡재가 그를 안전하게 중년기로 안착시켜준 것은 사실이었다. 구십년대로 넘어오면서 이제 정부도 형식적이지만 민주주의 시늉을 내던 시기였다. 


백화점이 일시에 무너졌을 때 그는 자신의 건축사무소에 있었다. 뉴스를 접한 순간 그가 염려한 것은 일본 체류 시절에 투자금도 회수하여 이제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게 된 박기섭의 회사에 대해서였다. 심남수는 문득 박기섭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시인이 되려 했다던 우스갯소리가 생각나서 픽 웃었다. 그는 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나요······ 괜찮아?

—심교수 웬일이야, 그런데 뜬금없이 뭐가?

—대성백화점이 무너졌다길래.

—글쎄 말이야, 작년엔 다리가 무너지더니 이번엔 백주에 빌딩 전체가 주저앉다니. 우리야 뭐 초기공사 해준 건데 이십 프로나 됐을까? 저건 순전히 준공단계부터 설계변경이 문제였어. 후반공사는 김진 회장이 자기네 대성건설을 시켜서 직접 했다구.

—투자지분은 없나?

—왜 우리두 좀 물렸을 거야.


심남수는 그날 형제처럼 오랜 사이인 박기섭과 그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먼지와 씨멘트 더미에 뒤덮인 백화점 붕괴현장이 저녁 뉴스로 텔레비전에 떠오르는 것을 자기 집 거실 쏘파에 앉아 끔찍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십수일이 지나서 마지막 생존자인 점원 소녀가 구조되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얼핏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국에서 혼자 살 때 어쩌다 꿈속에서 보던 영상이었다. 느릿느릿 슬로우모션으로 베란다에서 잠옷 바람의 여자가 떨어진다. 하도 느려서 흰 옷자락은 펄럭이지도 않고 천천히 물결치다 정지된 빨래처럼 보인다. 순간적으로 돌린 그녀의 얼굴 정면이 멈춰 있다. 그녀는 웃는 것인지 입을 조금 벌리고 있다. 


바로 그 일년 뒤에 박기섭의 우정건설은 과다한 부동산 투자에 따른 은행부채로 부도를 맞는다. 속도의 제값을 치렀다고나할까. <240~242p>


  탐욕의 속도는 빠를수록 이익이 된다. 새로운 치즈를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쥐들처럼, 10년 먹을 양식이 있어도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것처럼, 탐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류문명의 발전과 쇠퇴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해방 전후 부유층과 이기적인 사람들은 무지하고 약한 국민들을 속이고 불법을 저지르면서 열심히 땅과 재산을 불렸고, 그것을 기반으로 오늘날 권력과 명예를 유지하며 자손들에게 부를 세습하고 있다. 그러나 1994년 성수대교, 1995년 삼풍백화점이 연이어 붕괴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던 한국경제의 탐욕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뒤이은 전직 대통령들을 비롯한 공직자와 기업가들의 부정부패는 1999년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국민들은 믿었던 사회 엘리트, 부유층에 깊은 반감을 가졌고, 양극화와 상호불신은 심각한 사회 불균형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나라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동참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나 외환위기와 세계경제위기 속에서도 갈등과 반감을 느끼며 분노를 표했지만 상생을 위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고, 올림픽과 월드컵, OECD국가 등 높아진 국가위상을 보면서 함께 환희의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에는 상하․빈부를 넘어선 국민들 간의 진한 정(情)이 있었다. 결국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듯이, 사회 내 어떤 계층과 지위라도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지 못한다면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 정의, 평등이 실현되기 위한 사회 내 끊임없는 노력들은, 머지않아 탐욕과 생각의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인권과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모할 것이라 믿는다. 



—아, 꿈꿨어요. 아가씨 몇 살이에요?

—스무살이에요.

—좋은 나이네. 우리 딸은 언제 그만큼 클고. 아가씨한테 내 이름 말해줬나?

—아뇨, 진희 엄마라구 하셨지요. 장보러 나오셨다구요.

—그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내 이름 알아둬요.

—나는 박선녀라구 해요. 여기 백화점 회장님 친척인데······ 어느 매장 근무했다구?

—아동복이요.

—우리 둘이 꼭 살아 나가서 재밌게 지내자구. 

—그래요, 사모님.

—앞으로 꼭 하구 싶은 게 뭐야?

—돈 벌어서 내 동생 전동휠체어 사줄 거예요.

—그게 비싼가?

—엄청 비싸죠. 집두 이사가야 해요. 평지에다 공원 근처에 이사가면 순아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고······ 

—그래, 그거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박선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임정아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들을 지워버리고 말을 끊었다.

—나 재력이 있는 사람이야.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박선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가 임정아가 천천히 말했다.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그러구 집두요. 저는 임시직인데요. 우리 부모님은 시골서 올라와서 여태껏 일만 죽도록 하구두 산동네를 못 벗어났지요.

—그러니까 앞으론 잘살아야지.

—그렇지만······ 

정아는 이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 <337~338p>


  소설의 결말에 속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짧은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사회 내 힘의 균형이 서서히 옮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저 얻는 성공과 부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고 땀 흘리며 얻는 성공과 부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의 출현은 기성세대들의 잔재를 청소하며 새로운 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즉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세대들의 부모역할을 감당하며 오늘의 사회를 형성했고, 새로운 세대들은 부모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미래의 사회를 형성할 것이다. 


  돈과 권력, 명예는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물려줘야하고 결국에는 사회에 환원되어 개인이 아닌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사용되어야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그러기 때문에 남들과 더불어 살아야 할 명분이 주어진다. 분명 과거에는 돈과 권력, 명예가 사회의 중심 아이콘이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두 번들어갈 수 없듯이 세월의 강을 유유히, 급하게 흐르고 있다. 5분 뒤의 삶을 알 수 없듯이 다가올 세상은 강을 타고 흘러 내려오고 있다. 당연히 그 피해와 이득의 결과는 지금의 새로운, 젊은 세대들의 몫이다. 


  한편의 꿈결 같은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황석영은 이 책의 제목을<강남몽>이라 하면서<구운몽>,<옥루몽>등 몽자(夢字)류 소설의 특징들을 반영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의 허무한 삶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를 비추어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과거와 현실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이 책이 주는 의미라 할 수 있겠다. 


  5명의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저마다 비판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낳고 길러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자 부모님들이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나라와 사회,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만약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오늘날 소통 불가능하고 불결하게 느껴지는 기성세대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고 존중받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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