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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aGo와 이세돌 대국 이후: 인간은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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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aGo와 이세돌 대국 이후: 인간은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EAST-TIGER 2016. 3. 31. 00:56


  인공 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5번기 대국은 독일에서도 매시간 보도될 정도로 흥미로운 승부였다. 바둑은 유럽에서 인기 있는 게임은 아니지만 사람과 컴퓨터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의 능력을 겨룬다 것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기 충분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인류 문명과 기술이 어디까지 이르렀고 앞으로 어떻게 발달될 것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5번기 중 가장 재미있게 본 대국은 2국이었고 인공지능의 한계를 본 것은 4국이었으며 인간의 한계를 본 것은 5국이었다. 2국에서 백을 쥔 이세돌 9단은 수비적이고 신중한 바둑을 두었고 흑을 쥔 알파고는 공격적인 바둑을 두었다. 아무래도 흑을 쥔 알파고 입장에서 백에게 주어지는 덤(7.5집)을 만회하기 위해 실험적이고 예상 밖의 수를 두어야 했는데 그 수들이 하나같이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수였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세돌 9단은 2국에서의 패배가 무척 안타까웠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백을 쥔 사람은 흑의 공세를 막아내기만 해도 이기기에 굳이 먼저 싸움을 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같은 인간과의 대국에서만 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2국은 프로 기사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에게도 어떤 새로운 바둑의 '교본'이다. 


  4국은 전형적인 컴퓨터의 한계가 드러난 대국이었다. 또한 알파고가 '인공지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만약 이세돌 9단의 78수가 알파고의 실수를 유도하여 흔히 '떡수'라고 말하는 수들을의 원인이 되었다면, 알파고는 어떤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아직 없는 것이다. 즉 프로그램으로서 기존의 정보들을 재생산하고 주어진 조건에만 응용할 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창조하는 능력은 아직 없다. 이것은 알파고를 '인공지능'이라고 부를 수 없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습이 그동안의 컴퓨터 게임들에서도 볼 수 있는 익숙한 것이었다. 컴퓨터는 게임 난이도에 따라서 유저들을 상대하지만 제한된 정보와 움직임으로 상대하기에 아무리 어려운 난이도라도 유저들이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헤비 유저들은 대전 게임에서 컴퓨터를 상대할 때보다 같은 유저들을 상대할 때 더 긴장하고 집중한다.


  5국은 반대로 인간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대국이었다. 같은 조건과 상황에서 인간의 계산 능력과 판단은 버그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컴퓨터를 이길 수 없다. 사실 바둑의 경우의 수가 무한대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대국이 종반으로 갈수록 의미없는 말이다. 바둑알이 바둑판의 공간을 채워갈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알파고일 수 밖에 없고 통계나 상황에 따른 계산의 결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알파고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이세돌 9단은 4국을 이김으로써 알파고를 이긴 최초의 인간이자 최후의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개인적으로 앞으로 어떤 게임든지 인간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거나 이길 수 없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등장이 많아질 것이고, 인간이 그러한 프로그램의 약점들을 발견하고 극복하려는 노력과 시간은, 그 약점들을 극복하는 프로그램의 발전 속도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5번기 대국 이후에 국내외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지고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한결 같이 '두려움'이 앞서는 암울한 미래였다. 대표적으로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기계 문명이 인간 문명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세계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세계가 가능하다고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거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결국 해당 목적에 부합하는 최상의 '물체'를 만들려는 것이고 그것의 능력은 기술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 '물체'를 통제할 수 있는 지 없는 지에 따라, 그리고 그 '물체'가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이 넘어서 '자의식'을 갖게 되거나 그것과 유사한 능력을 갖게 된다면, 인간이 '터미네이터'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인간이 '터미네이터'가 지배 당하는 인류 문명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수십년 내에 있을 것 같진 않다. 


  가장 우려되는 것이 인간의 노동과 일자리가 인공지능 로봇과 프로그램으로 인해 가치가 약화되고 사라지게 되는 상황인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수십년 내에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18세기 중반과 19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산업혁명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 로봇과 프로그램은 인간만의 고도화된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육체 노동을 넘어서 정신 노동을 지향한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노동이 생계 유지와 자아 실현의 수단이 아닌 개인의 '선택'으로 그 의미가 변화될 가능성을 갖는다. 흔히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일은 곧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말한다. 


  인공지능 로봇과 프로그램이 인간의 노동과 일자리를 대체한다면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더 이상 노동과 일자리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 아직 이러한 발상에 쉽게 동의할 수 없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오랫동안 노동의 개념과 가치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살지도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눈 앞에 와 있다. 원래 '일을 한다' 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대상 선택이 가능한 '타동사'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뚜렷하게 만드는 '자동사'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존재하지, 일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와 존엄의 근거가 어떤 수단이나 상황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닌 순수 그 자체로 능동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이러한 문명의 전환기에서 인간이 여전히 그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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