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世紀 Enlightener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먼저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본문
책을 집에다 두고 시간을 내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읽지 못했는데, 이제야 다 읽었다. 읽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책이 내 방 책장에 꽂혀있기에 “언젠가는 읽겠지”라고 생각하며 안심이 되어 읽지 못했다. 책은 읽으라고 만들어졌지만 가끔 나는 책장에 꽂혀져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보며 장식품처럼 바라본다.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다.
소설가 신경숙의 작품은 처음으로 읽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가들의 작품들만 읽었고, 국내보다는 해외 작품들을 더 읽었다. 하지만 출간된 작년부터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언론보도에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거의 순식간에 읽었다. 내용은 어렵지 않았고 읽고 난 후에 잠시 동안 기분이 먹먹해졌다.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나는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우리 얼굴이 노인의 얼굴이겠지.
그의 늙은 얼굴도 나의 늙은 얼굴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107p>
책에는 정확한 년도가 나오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사이를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 같고, 윤교수와 네 명의 젊은이들의 삶과 인간관계를 통해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상황에 따른 아픔을 교차하면서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인 윤과 명서는 같은 대학, 같은 과로 연인 관계이기보다는 연민 관계에 가깝고, 처음엔 각자의 친구였지만 나중엔 모두의 친구가 된 단과 미루는, 윤과 명서가 자신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이자, 서로가 가진 아픔들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다.
암울한 시대상에서 젊은 날을 보내고 있는 네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위로하지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주변만 맴돌 뿐 다가서지 않는다. 여기에 윤교수가 “중세 성인(聖人)인 크리스토프가 강물이 범람한 상태에서 무거운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다 죽음을 맞이할 뻔 했지만, 자신이 등 뒤에 업은 그 아이가 예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크리스토프’ 예화는 미묘한 모순을 이끈다.
구체적으로 크리스토프는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넜고 예수는 크리스토프 등 뒤에 있었다. 언뜻 보면 크리스토프에게 집중하여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넌 것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예수가 자신을 업은 크리스토프를 지켜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두 가지 관점에서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인간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의 절친한 친구였던 윤과 단은 서로 좋아하지만 연인이 아닌 애매한 관계이고, 서로에게 언젠가 무엇을 하자고 미래지향적인 다짐들과 약속들을 할뿐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명서와 미루, 윤과 미루, 윤과 명서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나고,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세월만 흐른다. 결국 상대적으로 고립되고 연약한 단과 미루는 고통 속에서 자살 같은 죽음을 맞이하고, 실의에 빠진 윤과 명서 역시 서로를 의지하려 했지만 아픔만을 간직한 채 멀어진다. 결국 누구도 ‘크리스토프’가 되지 못한 것이다. 이후 팔 년 만에 걸려온 명서의 전화에 윤은 지난 시대와 날들을 회고하며 윤교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서로가 가진 고민들의 답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야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려 한다.
어떤 시간을 두고 오래전, 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전, 이라고 쓸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358p>
암울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네 사람은 운명공동체였다. 각자 말 못 할 기억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의 기억과 아픔을 진심으로 들어주기만 했을 뿐 지속적으로 위로하며 치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각자가 그럴 수 있는 자신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에 자신들의 기억과 아픔을 묻었고, 일련의 사건들과 팔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남겨진 자들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깨닫게 된 것이다.
예전에 친한 교수님과 식사를 하고 난후 차를 마시면서 나의 고민들을 말하자, 교수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알거나 알고 싶어도, 그 나이가 되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미리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야, 그 나이가 되어야 알 수 있는 거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내 고민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었기에 부정적이었지만, 삶의 순간마다 그 말이 떠올랐고 시간이 갈수록 어떤 의미인지 점점 뚜렷하게 깨달았다. 그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작은 조각만큼만 깨달아도 때론 기쁨의 눈물이 났다.
내가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들의 답을 지금 알 수는 없어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 다만 아쉽게도 지금 이 순간 모른다는 것과, 평생의 삶이 아닌 죽음 이후에나 알게 될 것 같다는 생각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반대로, 고민한 문제들 중 한 개라도 답을 찾거나 어느 정도 풀리면 감춰진 행복이 찾아온다. 무엇을 아는 것이 고통일 될 때도 있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가 올 때도 있다. 그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나는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나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고 싶었다. 갓난아이라면 아는 게 없으니 행복할 것이고, 노인은 아는 게 많으니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20대의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허상 같은 존재였고,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결국 나는 스스로 경험하고 찾아봄으로써 내 고민들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것들은 시간에 맡겼다. 그러나 마냥 시간이 해결 줄 것이라 믿기보다는 나와 비슷한 고민들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해결하려 한다면 더 수월할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그런 사람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찾는 것을 혼자가 편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책 제목처럼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린다면, 그가 "내가 그쪽으로 갈까?"라고 내게 말하기 전에 “내가 그쪽으로 갈게”라고 먼저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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