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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惑할 수는 없다.

EAST-TIGER 2023. 9. 29. 07:45

가을이 일찍 온 듯 일주일 가까이 서늘한 바람과 비가 내렸고, 

아직 여름이라며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너머 방 안 가득히 내리쬐었다.

여기가 비가 오면 거기도 비가 왔고, 

거기에 해가 뜨면 여기도 해가 떴다.

아침과 저녁에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에 얽힌 구름의 모양들을 보니,

이제 가을이다.

 

7월 초에 있었던 논문 발제는 유익했다. 

약 1시간 30분 정도 질의응답이 오갔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말했고, 

다음에 발제할 부분들도 말했다. 

오랜만에 교수님과 반응이 빠른 대화를 나눴다. 

참여한 학생들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해야 하는 것일까? 

6년이 다 되어도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두 번 이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윤석열의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이재명 당 대표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었다. 

둘 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재앙이다. 

차갑고 의심 많은 그들이 만든 어떤 세계.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심한 듯 살지만,

그들의 쌓인 분노와 터진 광기는 사회 곳곳에 소용돌이를 만든다. 

휘말리지 말고 살아남길 바란다.

 

가끔 여러 하던 일들을 멈추고

한 가지 일에만 빠져드는 날이 있는데, 

이토 준지의 작품들을 보는 날이 그런 날에 속한다. 

기괴한 그림들과 기묘한 이야기들의 수상한 조화.

그 조화는 이토 준지의 흥미로운 인식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문득 주방 저쪽에 무심하게 놓인 진공청소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방의 더러운 것들을 묵묵히 먹어치운 저 녀석은 어떤 "나"일지도 모른다."

그가 어떤 인격체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삼십 대를 독일에서 보냈고,

이제 만 나이로도 마흔이 된다. 

不惑이라고 하던데.. 

그 많았던 관심 분야들이 조금씩 줄어들어 취향이 분명해지고,

할 수 있는 것들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惑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외모에서도 드러난다. 

거울에 비친 얼굴보다, 

거리에서 기다리다가 어설프게 창에 비친 얼굴을 볼 때, 

지그시 안을 들여다보듯 얼굴을 본다.

점점 뚜렷해지는 선들. 

꽃이 시들면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지만, 

그 시든 꽃도 어떤 아름다움이라며,

곁에 앉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꽃이든 아니든, 

피할 사람들은 피하고, 

다가올 사람들은 다가오겠지. 

오히려 좋구나.

 

1946년 6월 김구, 김규식 선생이 남북 분단을 막으려고 고심할 때,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분단을 감수하더라도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겠다고 말한다. 

이후 일제 치하 36년 동안 부역했던 악질 친일파들을 대거 풀어주고,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공산, 사회주의자라고 몰았다.

6. 25 전쟁 때 6개월 남짓한 공산당 부역자들을 처벌한다며,

공식적으로는 5만 5천 명, 

비공식적으로는 55만 명의 국민들을 붙잡아 조사했다.

이때 은혜 입은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저들을 즉결처분했다.

김구 선생은 사회주의자로 몰리며 암살당했고,

김규식 선생은 납북되어 병으로 죽었다.

 

독일에서 구입했던 테너 색소폰을 ebay에서 팔았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모든 밴드 활동을 그만두었고, 

제대로 연습하기 어려워서 1년 전부터 ebay에 판매 글을 써두었다. 

이후 여러 구입 제안들이 있었지만, 

지난 8월 말에 정가로 구입한 독일인이 있었다. 

오랜만에 창고에 가서 구입했을 때 받았던 박스에 넣어 포장했고, 

DHL로 Neuenkirchen에 있는 구매자에게 보냈다. 

"고맙고 미안하다."

5년 가까이 함께 했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이 없다면 시들고,

그렇게 시들다가 살 이유를 못 찾으면 죽는다.

사물도 찾지 않고 쓰지 않으면 녹이 슬어,

다시는 쓰지 못하듯이. 

 

정치인들이 뻔한 말과 행동들을 할 때,

국민들은 정치에 흥미를 잃게 된다. 

안 들어도 내용이 뭔지 대충 알 수 있고, 

안 봐도 의도가 뭔지 대충 알 수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 굶어 죽은 이는 없다.

반대로 일부 국민들은 오늘의 끼니를 걱정하며 산다. 

배고픈데 이념을 알아서 무엇하랴?

먹을 것이 풍족해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진원이 형은 어느 콘서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로운 모든 그들에게 고기가 함께 하기를.."

대다수 정치인들은 거의 매일 고기를 먹으면서,

"고기반찬"이 가진 의미를 모른다.

 

9월에 비자 연장을 해야 되고 현재 진행 중이다.  

2년 전과는 전혀 다른 기분과 상황. 

우연인지 원래 그런 건지 비자 업무 담당자는 같다. 

E-Mail로 의견을 나눴다.

필요한 두 가지 서류 중 하나는 제출했고,

다른 하나는 12월 20일까지 제출하면 된다. 

귀찮은데 해야 할 일이다. 

 

라면을 이렇게 먹는다. 

양파, 버섯, 당근, 소시지, 감자, 새우를 조금씩 썰어 냄비에 담는다. 

적정량보다 살짝 적은 생수를 붓고 스프들을 넣은 후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덮는다.

3분 뒤에 계란을 넣고,

5분 뒤에 저민 훈제 연어 살 두어 장을 넣은 후 냄비 뚜껑을 덮는다.

10분에 뒤에 면을 넣고 조금 뒤적거린 후 다시 냄비 뚜껑을 덮는다.

5분 뒤에 냄비를 들고 식탁에 놓고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한 후 냄비 뚜껑을 열면, 

먹기 좋은 라면이 되어 있다.

국물은 남긴다. 

 

올해 두 번이나 머리카락을 짧게 깎았는데,

어느새 자라서 다시 짧게 깎았다.

4년 가까이 열 번 정도 갔던가..?

터키인들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오고 가는 대화가 정겹다.

이발소 안에서는 모두 친구가 된다. 

 

대한민국 검찰은 정권의 충직한 미친 개다. 

잘못 물었으면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절대 놓지 않으니,

법원이 몽둥이로 그 머리를 쳐야 놓는다.

검찰은 이제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처벌의 대상이다. 

 

개인 인터넷 방송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이 늘어났고, 

개인 방송 제작자들이 파는 콘텐츠들도 다양해졌다. 

한국 시간으로 화요일 새벽 3시가 넘었는데, 

한 플랫폼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흩어져 방송을 보고 있다.

늘어나는 인터넷 소매상들 때문에, 

혹시나 내 관심 분야에 해당되는 것들을 찾아본다.

손님을 기다리는 그들의 촉촉한 눈빛. 

자기 얼굴 또는 직접 만든 캐릭터를 내보이며, 

춤을 추거나 게임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를 하거나

아는 것들을 알려주거나 대화를 나눈다.

보상으로 시청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구독, 도네이션을 기대한다.

방송을 보다가 들리는 내면의 소리.

"나 여기 이렇게 살아있어요!"

다 찾아다니며 방송을 볼 수 없는 게 아쉽구나.

 

설거지를 하면서 "Super Shy"를 흥얼거리고, 

햇빛이 방안에 가득할 때 "그날들"을 소리 높여 불렀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바나나 알러지 원숭이"를 부르기도 한다. 

흘러간 말들을 혼잣말로 다시 하고, 

흐린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기분으로 웃고 떠든다. 

밤에는 내일 죽을 사람처럼 눈을 감고, 

아침에는 오늘이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그 "오늘"은 어두운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동생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가족 참 어렵다."

본능적으로 유감을 표했다. 

"너부터 살펴라."

20년 넘게 동생과 대화를 하지 않다가

다시 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그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동생과의 대화는 늘 조심스럽다. 

어머니와 동생은 서로 상처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격 상 대화를 멈출 수 없다.

아마 비슷한 질문을  것이다. 

남들과는 잘 지내는데 왜 가족과 잘 지내기 힘든 것일까?

남들에게 하지 않을 말과 행동들을

가족에게 하기 때문이다.

매일 동생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우울에 사로잡혀 힘들어하지 않게. 

언젠가 만나면 서로 웃을 수 있게.

가족을 잘 돌볼 수 있게.

 

시력검사 후 새로운 안경을 구입했다. 

안경은 필요할 때만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점점 필요할 때가 많아진다. 

조금 흐릿하게 세상을 보면, 

이상하게 편안해진다. 

가끔 익숙한 길을 걸을 때는 안경 없이 걷는다. 

모든 게 뚜렷하면 눈이 아프고 어딘가 부담스럽다.

안경 없이 볼 수 있는 것들이 좋다.

 

많은 사람들이 MBTI로 자신과 타인을 규정하여,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불쾌감이 든다.

심심풀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자꾸 듣다 보면 확고한 신념이 된다. 

제인 오스틴, 히가시노 게이고, 루이제 린저 등,

여러 작가들은 사람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MBTI가 아니더라도 피할 사람들은 피하고 만날 사람들은 만난다.  

경험에서 살아남아야 지식이 된다. 

물론 그 지식 역시 또 다른 지식을 위한 경험이다. 

 

1년 6개월 넘게 진행되었던 어떤 의식은 끝났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사람의 삶인데, 

둘 다 의미를 크게 부여하는 나로서는 필요했던 의식이다. 

한 달 전 내게 처음 따뜻한 감정들을 전해준 그가 생각나,

하루종일 높고 낮은음으로 "미안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늘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고, 

사람과 사랑의 위대함을 가르칠 것이다. 

 

독일에서 맞이하는 8번째 추석. 

죄송하고 미안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시 글을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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