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世紀 Enlightener

그래봤자 거기까지다. 본문

Section 日記/Hello- Yesterday

그래봤자 거기까지다.

EAST-TIGER 2023. 3. 7. 10:14

춥고 축축한 1월이었다. 
밤에 롤 블라인드 너머로 비가 내리는지 눈이 내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듣다가,
아침이 되면 올라가는 롤 블라인드 너머로 창백한 풍경들을 보았다.
어떤 날은 눈이 쌓여 있었고, 
어떤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통적으로 추웠다. 
"특별할 거 없는 겨울 끝이죠."
음..
끝은 특별할 거 없는 겨울. 
 
가족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묘한 편안함을 느낀다.
의무가 사라진 사람에게 남은 것은 의지에 따른 결정들이다. 
이전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잊힐 것이고,
잊히고 있으며, 
잊혔다.
 
Donald와 Ingrid를 거의 2년 만에 만났다.
서로 멀지 않은 지역에서 살고 있지만,
최근 두 번의 만남은 모두 Musiktheater im Revier였다.
함께 발레 공연을 보았고 공연을 보고 난 후 식사를 하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한국인 발레리나를 보고 짧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약간 허리를 굽혀 어색한 답례를 했다.
"워메, 이게 다 무슨 일이다냐!?"
이 말은 한국 사람이 아니면 알아듣기 힘들다.
호기심 많은 Donald와 Ingrid는 공연 중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내게 그 뜻을 물어봤다.
Ingrid는 식사 도중에 내가 우리 주변에 있던 아시아 사람들을 보며,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이라고 알아보는 것에 대해 재미있어했다.
아마 Ingrid가 네덜란드인과 스위스인, 미국인, 독일인 등을 알아보며 내게 말해줬다면, 
그 반대가 되었을 거다.
"올해 나이가 마흔이 된다고? 아직 젊어 보이는 데?"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을 머금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우리는 서로 짧게 포옹한 후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2월 초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나 공연을 볼 예정이다. 
 
은사님들과 형님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했다. 
연중 메신저 대화 상대 목록 하단에 있던 사람들이 상단으로 올라오는 날이다. 
그 외 다른 지인들에게는 인사를 전하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전화를 걸어 새해 인사를 드렸다. 
 
"연애편지"가 될 것 같았던 논문이 요즘 들어 "참회록"이 되어간다. 
글을 쓰다가 "사랑한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더하게 된다. 
1월 말에 논문 발표가 있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이전 주제들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지도 교수님은 내게 의문을 제기했지만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나는 솔직하게 거의 모든 것을 교수님에게 말했다. 
"Schelling은 주체가 외로운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을 들은 교수님이 빙긋 웃었다.
인간은 절대자의 등을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를 대면하고 함께 산다. 
발표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들을 빌렸다.
책상에 앉아서 남은 부분들을 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때의 자신과 그의 최저와 최고를 보게 된다.
나와 그의 최저와 최고를 보면서 계속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질문들이 던져지고,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계산기보다 빠른 감각의 연산들이 불신과 확신으로 나눠진다. 
여전히 만나는 것은 힘들지만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것은 쉽다. 
붙잡고 있는 것과 놓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쉬울까? 
붙잡아야 할 사람을 놓아서 혼자가 되었다.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지만, 
그때는 그게 가까운 길인지 몰랐고, 
지금에서야 멀리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정말 그게 가까운 길이었고 지금 멀리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
요정이 하늘을 날기 위해 구름을 타야 한다면, 
그것은 슬픈 동화가 맞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일어나는 일들이 비슷하다.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시대착오적인 발언들과 공감할 수 없는 행동들이 뉴스에서 보도되고,  
고소, 고발, 압수수색, 잠정중단, 해임, 직위해제 등, 
소통보다는 권력으로 정국을 이끌고 사태를 수습한다.
3.1절이 왜 일본의 침략을 반성하고 이해하는 날이 되었나?
MB 이후 이런 연설을 오랜만에 듣는다.
시간이 지나면 비난을 무마할 경제적 성과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 건가? 
돈벌이가 곧 국익이라면 무엇이든 팔 수 있다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그렇게 약한 나라가 아니다.
강자들 앞에서 무릎 꿇고 약자들을 내쫓고 핍박하는 것이 한국 보수 정부의 기치라면,
다시는 지지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런 적 없다."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왜 검찰 조사를 받으면 "그런 적 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검찰이 위대한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검찰은 자기가 가진 권력을 유감없이 사용 중이다. 
검찰개혁은 또 이렇게 멀어졌다.
반대로 검찰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마 내년에 검찰 출신 변호사들이 대거 국회에 진입하려 들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여당 전당대회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당의 여러 얼굴들을 보니 당의 역량과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몇몇 세력은 당선보다 얼마나 지분을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함께 공동 정부를 구상했던 사람에게 "종북", "정부의 적"이라고 공격한다.   
오랫동안 당을 지켜왔던 사람들에게 굴종을 요구한다. 
민심이 당심을 바꿀 수 있는데 어떻게 당심이 민심을 바꿀 수 있겠는가?
정말 공간과 직위로부터 생각을 지배당했다. 
 
2월의 첫날밤에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내렸다.
다른 음악을 들을 것도 없이 그 소리를 들으며 글을 썼다.
저녁 같은 아침, 
아침 같은 저녁. 
처음으로 독일의 겨울에 적응이 된 느낌이 들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구차하구나.
 
3주 만에 Donald와 Ingrid를 다시 만났다.
여러 팀이 나오는 Gala 공연이라서. 
일본인 무용수의 흥미로운 연출과 Karlsruhe 국립 발레단의 클래식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스페인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에 앉았던 테이블에서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았다. 
우리는 서로 함께 먹을 식사들을 주문했다. 
Donald와 Ingrid는 와인을 마셨다. 
옆 테이블에 중년 여자 두 명이 앉았는데, 
그중 한 명이 기침을 심하게 해서,
Donald와 Ingrid의 표정은 약간 불안했다. 
"이 주변에 네가 알고 있는 장소들이 어디야?"
Ingrid는 내 단조로운 삶의 동선에 흥미를 느꼈고, 
취기가 오를수록 내게 더욱 편한 질문들을 던졌다.
우연히 Donald의 지인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그를 알아봤고 서로 대화를 나눴다.
그때 Ingrid는 그에게 "누구시죠? 어디에 사세요?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질문을 쏟아냈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질문들 때문에 오랜만에 짧은 웃음들이 내 얼굴에 새겨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대화도 깊어졌다. 
Ingrid와 Donald는 내가 꺼낸 오랜 이야기들을 들으며 진지해졌고, 
나 역시 자주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님이 죽으면 눈물이 안 날 것 같아. 아마 친구가 죽으면 눈물이 나겠지."
우리는 밤 11시가 넘어서 헤어졌다. 
부활절이 다가오면 우편으로 그들에게 선물을 보낼 생각이다.
 
2월 중순에 이 목사님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좋은 레스토랑을 발견했는데 생각이 나서요." 
바로 다음날 점심때 그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함께 식사를 했다.
"원래는 구운 생선을 먹으려고 했는데 벌써 예약 주문이 끝났네요."
아마 이 레스토랑이 좋았던 이유가 그 음식이었을 것 같다.
금요일이었고 중년 부부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테이블들마다 앉아 있었다.
"다음 달에 다시 와서 함께 먹죠."
아쉬워하는 이 목사님의 표정에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카페로 걸어갔다.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에 개업한 카페였다. 
"처음 온 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를 제일 먼저 마셔요."
이 목사님의 말에 나도 함께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가벼운 대화를 했고 오후 2시 30분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수구가 막혀서 도구들을 구입하여 청소를 했다. 
운동을 하면서 몸 상태를 확인한다. 
음식은 적당히 싱겁게 만들어 먹는다.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현준이가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인사를 전했다. 
동생이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인사를 전했다. 
3월 초순도 2월 초순처럼 비가 내린다.
 
오랫동안 "나"를 지키며 살고 있다. 
외로움과 우울 속에 매몰되지 않게, 
이른 아침부터 계단을 내려와 어디론가 떠나는 발소리를 듣는다. 
거짓과 허세, 허영으로 나를 포장하지 않게,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부모님 앞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내게 남겨진 약속들을 지키려고 한다. 
이미 여러 약속들이 그 대상들을 잃고 없던 것들이 되었다.
인내하지 못했고 확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신대로 다른 삶을 찾아 떠났다. 
그 소신은 약속을 저버린 결과의 시작이 될 것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른다. 
가끔 어떤 결과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았고,
참회했으며 또 그러는 중이다. 
아주 오래전 그 사람의 눈을 보고 약속했을 때,
그 약속의 무게를 나는 너무 가볍게 여겼다. 
이 어리석음이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내게 남겨진 약속들을 지키려고 한다.
 
미련은 없다. 
이미 변했고,
많은 날들이 지났으며,
다시 찾을 만큼 귀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옅은 기억들만 둥실둥실.
그래봤자 거기까지다.
...
지조 있고 정직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누운 그 사람.

'Section 日記 > Hello- Yester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 惑할 수는 없다.  (0) 2023.09.29
뜨거운 날들이 다시 왔다.  (0) 2023.06.13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0) 2023.01.01
겨울을 준비한다.  (0) 2022.09.22
원래 하던 대로 하겠다.  (0) 2022.05.2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