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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준비한다.

EAST-TIGER 2022. 9. 22. 04:51

뜨거운 여름이 일주일 전이었는데, 

지금은 차가운 늦가을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이상기후는 여전하다.

옷장을 정리하다가 작년에 사서 입지 못한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미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두꺼운 이불을 꺼냈고 겨울용 슬리퍼를 신었다.

생강과 꿀을 넣고 마실 차를 끓였다.

겨울을 준비한다. 

 

하루 동안  비는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한다.

햇빛이 들지 않은 주방에서 늘 먹는 음식을 만들고 식탁 앞에 앉아 조금씩 먹는다. 

팟캐스트를 통해 세상에 무슨 일들이 있었고 있는지 듣는다. 

식사를 하고 난 후 책상 앞에 앉는다. 

엉덩이가 아프면 잠시 일어나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몸을 움직이거나 침대에 눕는다.

해가 지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다. 

오늘의 뉴스를 듣고 설거지를 한 후 몸을 씻는다.

다시 책상 앞에 앉고 어느 순간 피곤해지면 일어나 잠을 자러 간다.  

  

조금씩 빗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짙은 회색빛이 방 안에 감돌았다. 

저녁 같은 오후가 되었다.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들리는 빗소리가 어색하지 않은 음악들을 선곡했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혼잣말들을 했다. 

나도 모르게 노래 한 소절을 부르고 있었다. 

"나 이렇게 살아. 이렇게 살고 있어."

감당할 수 있는 우울이 찾아왔다. 

 

화창한 7월 중순 토요일에 선교국 예배에서 말씀 나눔을 했다. 

예배 후에 중국 레스토랑에서 정 안수집사님과 식사를 했다.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이 주문을 받았다. 

서로 주문한 음식을 먹다가, 

정 안수집사님이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가정사부터 연애, 결혼, 지금의 삶까지 거침없이 내게 말했다.

그러다가 나와 어떤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고, 

그때부터 긴장하며 말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말들을 하며 반응을 보였다.

의사이자 높은 자부심을 가진 안수집사님은 내 말들을 남김없이 쓸어 담아, 

뇌신경회로를 거쳐 자기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며 내게 말했다.

그 "뇌피셜"이 불쾌했고 그 불쾌감이 내 말에 담겨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안수집사님은 조심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그 말을 멈추게 해야 했는데, 

시계를 본 후 어느새 저녁이 된 것을 알자 먼저 일어섰다.

"오늘 했던 대화는 우리끼리만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나 역시 동의했다.

 

병필이가 11월에 결혼을 한다며 온라인 청첩장을 내게 보냈다.

빠르게 떠오르는 문자들에 기쁨이 담겨 있다. 

"무언가 어려울 때마다 행님이 하셨던 말씀 행동 한 번씩 곱씹어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순간 병필이와 함께 있었던 기억 몇 개가 스치듯 지나갔다. 

저출산 인구감소에 기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청첩장이 경고장처럼 보인다. 

아직 "너"를 발견하지 못했다. 

쉽지 않기에 소중하다. 

요새는 좀 지친다.

어딨니?

 

예상대로 윤석열 정부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규제를 풀고 복지를 줄이면서 민생을 걱정하고,

기업의 편에 서서 노동자의 인권과 임금은 고려하지 않는다. 

극도의 친미와 친일은 한국을 "글로벌 호구"로 이끈다. 

저출산 시대에 만 5세 조기 입학은 유치원의 폐원을 가속화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경제가 어렵다면서 대통령실 이전을 위해 굳이 그 많은 돈을 써야 할까?

검사 윤석열은 지지하지만 대통령 윤석열은 아직 지지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유희열의 라디오 방송들과 그의 음악들을 들으며 자랐던 나에게, 

그의 작곡에 대한 표절논란은 신선하지 않다. 

"시부야계" (渋谷系)와 Acid Jazz, Acoustic, Neo Pop을 즐겨 듣는 그는, 

라디오 방송들에서도 직접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을 선곡하여 들려주었다.

간단하지만 핵심적인 아티스트, 곡 소개와 Guest와의 즐거운 대화 때문에,

요새도 생각날 때마다 찾아서 듣는다.

나 역시 ATM이 그가 단독으로 DJ를 맡은 라디오 방송들 중 최고라 생각한다. 

그의 앨범들을 들으면 몇몇 곡들은 그의 이름으로 덧칠된 원본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정말 완전한 그의 곡들도 있고 들을 때마다 대단하다.

뮤지션으로서 유희열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감성과 재능을 여러 곳에서 사용했다.

이제 Toy 8집에 대한 매서운 표절 검증을 피할 수 없게 됐다. 

Toy 8집은 이 시기를 견뎌낸 유희열의 대답이 되어야 한다. 

 

7월 초에 김 작가님이 환갑을 맞이했다며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초대하는 날에 갈 수가 없어서 따로 가야 할 것 같아 개인적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날짜를 정하다 보니 환갑 당일에 가게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가끔 Wein이 생각날 때 찾는 상점에 가서 내 취향으로 두 병을 샀다.

Münster 중앙역에서 Ennigerloh로 가는 광역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2차선 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보리밭들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 광역버스들은 기점에서 제시간에 출발해도 정류장마다 몇 분씩 늦게 도착한다.

쌓이고 쌓여서 내가 환승해야 할 정류장에 예정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했다.

다음 광역 버스는 50분 남짓 기다려야 한다.

5km 정도 남은 김 작가님 집까지 그냥 걸었다. 

비가 그친 늦은 오후에 부는 여름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바람에 빗물이 조금 스며 있기도 했다. 

이어폰을 꺼내어 음악을 들었고 턱 근처에 적당한 미소를 걸쳐 두었다. 

자전거를 타고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이 나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그 미소가 인사를 대신했다.

1시간 정도 걸었고 김 작가님 집 앞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오래간만입니다." 

외모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서로 3년 가까이 직접 만나지 못했다. 

사모님이 저녁식사를 준비할 동안 전시 중인 작품들과 공방을 둘러보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공방을 확장했고 도예로 여러 작품들을 만들었다며 내게 보여주었다.

보들보들한 김 작가님의 말들을 들으며 나는 아는 만큼 받아 말을 이었다. 

현재 전시 중인 작품들을 보고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때는 김 작가님보다 사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정은임 씨를 알아요? 제 친구의 친구였거든요." 

영화, 정치, 사회 등 사모님과의 대화는 저녁식사를 더욱 넉넉하게 했다. 

식사 후 밤 10시에 김 작가님이 Ahlen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Münster 중앙역으로 돌아와서 Düsseldorf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탔다.   

상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던,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하고 가장 먼저 이 목사님이 생각났다. 

시작하겠다는 말을 전한 후 가장 먼저 이 목사님에게 알려서 그랬을까?

한국을 방문 중인 이 목사님과 통화를 하면서 어쭙잖은 말들을 꺼냈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목사님의 반응에, 

나의 말도 담백해진다.  

스스로 정직하고 성실하기 원했고,

지금도 그렇다. 

 

유학을 떠나기 전 갈팡질팡하는 그를 밀어내자 그가 말했다. 

"밀어내지 마, 좀 머물다가 내가 알아서 갈게." 

이미 결정했기에 이후 마음과 감정의 어떠한 부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모질었던 걸까? 

멀리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았기에 아주 모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나는 없었다. 

오래된 기억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을 보니 가을이 온 게 분명하다. 

남루하고 비루한 시간이다. 

 

6월에 있었던 논문 발제는 잘 끝났다.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도 조금 의문을 가질 정도로 평소보다 적은 부분이었지만, 

존재와 절대에 대한 토론은 치열했다.  

10월에 개강을 하면 슬슬 마지막 부분을 발표해야 한다. 

몇 달간 나 스스로에게 지치고 실망하여 괴로웠다. 

삶의 재미를 찾고자 몇 가지 일들을 했었고, 

늘어지다 못해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죽은 듯 잠을 잤다.

여러 날 동안 말 한마디 없이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직 죽지 않아서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석원이 형과 오랜만에 대화했다.

한국에서 청소년 사역자로 책도 몇 권 쓰고 여러 교회에서 말씀 나눔을 하고 있다.

10월 Dresden에서 집회가 있어서 우리 교회로 오는 홍 목사님과 같이 온다고 한다. 

"보고 싶네." 

 4년 전 나를 보기 위해 신혼여행 일정도 바꾸며 형수와 함께 Münster에 왔지만,

그때 나는 동생과 여행 후 한국에 있었다. 

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방바닥에 앉아, 

서로 읽은 책들을 소개하며 가늠할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아직 나는 예전 그대로 학생인데, 

형은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유능한 사역자가 되었다. 

확실한 것은, 

서로 어색함이 없다. 

 

7월 말에 "열독자" 효성이가 Blog에 왜 일기를 안 쓰냐고 물어서 답했다.

"안 그래도 쓰려한다." 

9월이 돼서야 일기를 쓴다.  

효성이 같은 사람이 만 명만 있으면 난 전업 작가를 할 거다.

 

추석 보름달이 뜬 밤에 동네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와 탄성을 지르며 달을 보았다. 

나는 저녁부터 자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창문을 통해 햇빛 같은 달빛이 눈에 들어왔다. 

황홀한 기분에 잠시 고개를 돌려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눈을 안정시켰다. 

처음 보는 강렬한 달빛. 

그 빛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새벽 1시가 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결 달구경하기 좋았다. 

달 옆에 별이 함께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었다.

 

서로 별 뜻 없이 내뱉은 농담들을 듣고 작게 웃어 준다면, 

누군가 기분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함께 들어준다면,

책을 보다가 문득 좋은 글들을 봤다며 읽어준다면, 

함께 걷을 때 운동화나 플랫슈즈를 신어준다면, 

내가 쓴 글을 그대가 가장 먼저 읽어준다면, 

내가 연주할 때 그대의 얼굴이 보인다면, 

시린 빈 손에 따뜻한 손을 얹어 준다면,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살 때 죽어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있지 마요."

...

이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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