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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날들이 다시 왔다.

EAST-TIGER 2023. 6. 13. 03:21

봄에서 여름으로.

봄이 되었다고 느끼는 몇 가지 있는데,

거리에 노란 수선화와 목련이 피고, 

차가웠던 빗소리가 따뜻해지며, 

밤에 더 이상 난방을 하지 않는다.

5월이 되어서야 봄을 느꼈다. 

6월이 되니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여름이 있다.   

그날들 속에서 이 글을 쓴다. 

 

물가가 올랐다는 것이 이상하게 낯설다. 

코로나 대유행 전까지는 50유로면 일주일을 살았다. 

대유행 이후에는 70유로가 필요하다.

사람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험난한가?

한국은 더 올랐다고 하더라.

한번 오른 물가는 내려오지 않으니, 

개인의 삶이 위태로워진다.

검소한 삶은 이럴 때 유익하다. 

얼마나 언제까지 유익할까? 

전쟁과 전염병이 또 다른 전쟁과 전염병을 낳았다.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낯설다. 

사는 것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이전 학기와 거의 같은 일정으로 진행된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읽는다. 

논문 발제는 7월 초에 있다. 

 

예수의 부활과 사후 부활은 개신교의 주요 교리다.

부활이 없으면 현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거의 모든 신화와 종교가 부활을 주장하는 이유다.

나는 인간 예수의 삶을 더 묵상한다. 

가진 것 없는 자가 가진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약탈하는 것처럼 민망하다.

지독한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서 사랑이 완성된다더라.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더라.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를 남에게 주거나,

그냥 다 주라고 하더라. 

스스로 죽어야 다시 산다더라.

모두가 가족이라고 하더라.

"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더라.

그리스도로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불행하다.

부활을 해서라도 행복하기 바랄 정도로.

그럼 사는 동안 언제 행복할까?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 

그때 행복할지도 모른다.

부활이 필요 없을 정도로. 

희박하다. 

 

겉으로는 부정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큰 나라의 우파는 국익을 앞세워 작은 나라를 약탈하고,  

작은 나라의 우파는 국익을 앞세워 큰 나라에 자기 나라를 판다.

 

학창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내가 "학교 폭력 피해자"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어리석을 정도로 폭력에 무력했고, 

아버지의 명예와 내 믿음을 지키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이름들을 기억한다. 

나는 그들의 폭력들과 그때의 표정들을 기억한다. 

내가 202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다면, 

그들을 모두 법의 판단에 맡겼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나에게 자신의 말과 행위들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마치 그때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그들이 내게 가했던 폭력들과 그 흔적들을 대면하며 살고 있다.

신은 그 고난을 내게 주었다.

신은 그들에게 무슨 고난을 주었을까? 

내기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신의 의로움이 이루어지길 원한다.

 

3월에 단비가 오랜만에 안부를 묻더니, 

5월 초에 다시 단비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래 교제했던 사람과 결별했다고 한다. 

지난번에 결혼을 준비한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없던 일이 된 건가?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나 이외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알고 시작한 일이다. 

사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면,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5월에 나영이와 오랜만에 대화를 했다. 

원래 살던 부산으로 내려가 일을 한다고 말했다. 

다시 부모님 하고 살다가 역시나 견딜 수 없어 혼자 산다고 한다. 

낯선 서울보다 원래 살던 부산이 아무래도 더 좋겠지.

목소리가 이전보다 밝다.

잘 살아라. 

 

대통령도 초보고, 

당 대표도 초보다. 

어떤 일에 초보라고 해서 꼭 못하진 않는다.

그들이 초보이기에,

그들이 권력지향적이기에,  

그들이 만들려는 세상이 더욱 잘 보인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치 검사의 변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고, 

당 대표는 민주당의 정치적 한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충성하기를 바란다. 

당을 방패 삼아 자신의 실패를 감추려고 하니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독단(獨斷)"이라는 단어가 두 사람을 통해 실현되었다.  

가련하구나. 

지난 선거 때 그들을 보며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여.. 

 

Tina Turner가 죽었고, 

Astrud Gilberto가 죽었으며,

George Winston이 죽었다. 

그날마다 그들 각자의 음악을 들으며 추모했다. 

大江健三郎가 죽었을 때는,

어렴풋 군 복무 중 읽었던 그의 책 구절들을 떠올렸다. 

 

제발 내게 언제 한국에 오는지 묻지 묻지 마라.

내가 한국에 가면 뭔가 달라지나? 

내 인생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냐? 

사람들이 깔려 죽고 끼어 죽고 치어죽고,

굶어 죽고 떨어져 죽고 찔려 죽고, 

맞아 죽고 알아서 죽는 지금 시대에 나를 걱정하여 다 무슨 소용이냐? 

그대들의 가족들을 걱정하고 그대 스스로를 걱정하라. 

내가 한국에 있다면 그대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작정인가?

단순한 호기심인가?

실없고 마음에 없는 말들을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나 역시 그대들에게 그런 말들을 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그대들을 위해 매일 아침 기도한다.

지금은 그 정도로만 그리워하자. 

 

"이런 말하면 상처 줄까 봐 안 하려고 했는데.."

아, 진짜.

안 하려고 했으면 아예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 상처 주는 게 덜해지냐? 

안 해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안 해야 한다. 

하려면 끝을 볼 생각으로 그 말에 책임질 생각으로 해라. 

... 보다가 껐다. 

 

5월 어느 날 저녁에 국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전화가 오는 것에 놀랐고, 

그다음은 스마트폰에 뜨는 번호가 한국 번호라서 놀랐다.  

마지막으로 받자마자 서러운 울음소리에 놀랐다.

동생의 전화였다. 

말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울음소리였다.

나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그럴듯한, 

평소 생각했던 말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냈다. 

"좀 우니까 괜찮아졌어." 

울어서 괜찮아진다면, 

나도 울었을 텐데..

 

걱정하지만 해결해주지 않는 시대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을 불태운 노동자가 있었고, 

2023년 5월 1일 자신의 몸을 불태운 노동자가 있었다. 

53년 가까이 노동자의 삶은 변하지 않았던 것일까?

세계가 많이 변했고 대단해진 것 같은데,

거의 또는 전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삶의 일부라는 점에서 근심스럽다.  

 

실시간 조회 수와 동시 접속자 수로 진실과 거짓이 구별된다.

미디어는 부엌이 되었고 재료들은 어디에든 널렸다.

기자들과 크리에이터들은 주방장이 되어 음식을 만들어 낸다. 

무슨 맛인지 모른 채 일단 먹다 보면, 

어느새 취향이 되어버린다. 

어딘가 찝찝하다.

그 취향이 원래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껴지는 혐오.

마치 "방사능 오염 처리수"를 마시는 기분이 아닐는지.  

 

5월에 다시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은사님들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부모님께 감사 안사를 전했다. 

6월에 아버지와 나는 대화 도중 다투었다. 

스트레스는 그렇게 해소되면서 또다시 쌓인다.

누군가 나를 비웃듯, 

나는 나를 그렇게 비웃고, 

그런 망상들과 씨름하며 뭔가를 하고 있다. 

...

뜨거운 날들이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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