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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 오랜만에 웃었다

EAST-TIGER 2017. 12. 30. 11:34


살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다. 

주로 언제 한번 본 영화거나 아니면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다. 


오전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활력이 느껴지는 하루라,

논문을 조금 쓰고 관련해서 읽어야 할 책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하나 붙였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후 잠이 들었다.

저녁에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와 <중경삼림>이 생각났다.

<타락천사>가 보고 싶었다. 

밖은 비도 오고 눈도 왔다.   



"매일 밤,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가는 곳마다 있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였나,  

집에 잠시 VHS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다. 

아마 친척 형이 며칠 동안 맡긴 것이었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의 교육열로 인해 집에 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때라,

근처 비디오 가게들 중 미성년자에게 '미성년자 관람 불가' 비디오를 빌려주는 

비디오 가게로 가서 몇 편 비디오를 빌렸다.

그 중에는 이 영화도 있었다. 


나이든 할머니가 비디오 테이프들이 빽빽한 좁은 공간에서 

살과 먼지 냄새를 풍기며 생기 없는 눈으로 나를 보며, 

비디오 테이프들을 어쩔 수 없이 빌려 주었다.     

한번 빌린 후 다시 그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다시 갔었다.  



"1995년 5월 30일에 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무척 지루했다. 

그 당시 내가 하는 짓들은 꽤나 어른 흉내내는 "애늙은이" 같았고, 

몸은 이미 성인이 다 된 "슈퍼 주니어"였다.

그래서 충분히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야한 장면들이 나올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당시 내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들을 제대로 읽기도 힘들었다. 

이 영화는 나레이션과 미장센이 전부인 영화이다. 


나는 별 특별하지도 않은 풋내기 중학생이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두 남녀가 한 오토바이를 타고 밤거리를 질주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이 장면들 앞에 있었던 장면들을 오늘에서야 제대로 보았다. 


왕가위 감독은 90년대에 자신의 천재성을 다 보여줬다. 

비록 요즘은 예전같지 않지만 그가 90년대에 만들었던 영화들이 

지금 개봉하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 것이다.  

몇몇 한국 감독들이 그의 미장센과 촬영 기법들을 표절했고 여전히 표절하고 있다.


배우 이가흔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미 <천녀유혼2>에서 그녀를 보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배역에 너무 잘 어울렸고,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였다. 


들리는 음악들이 이렇게 좋았나 싶었다. 



"그날 밤은 유달리 추웠다. 겨울이 이렇게 빨리 올지는 몰랐다."


난 게을러서 가끔 누군가 미리 내 것들을 준비해 놓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적은 가족을 제외하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가족이 있을 때만 아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언젠가 가족이 내 옆에 없다면, 

진짜 어른이 되겠지. 

 

난 매일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그런 날 연애를 시작하고 끝내도 괜찮았다. 

100일, 200일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다. 


매일 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어떤 여자가 내가 가는 곳마다 있다면, 

그 순간이 따뜻해질 수도 있겠지. 

그럴 때는 크게 용기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깨만 빌려주면 될테니까. 

   

영화를 보면서 오랜만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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