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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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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EAST-TIGER 2021. 11. 17. 06:16

Barcelona에서 읽은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하루키의 단권 장편소설들은 발단부터 전개까지는 탁월하지만 절정과 결말은 완결성에 있어서 기복이 있다. 조금 더 전개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절정의 극적인 상황들이 소설 전체의 완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예전에 장편소설 <1Q84>를 3권까지 쓴 후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이 말은 단권 장편소설에서 더욱 잘 느껴진다.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내용은 어렵지 않다. 나고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섯 사람들이 고등학교 때 만나 절친이 된다. 여자 둘, 남자 셋으로 졸업 후 남자이자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多崎作)는 나머지 넷과 다르게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로부터 절교 통보를 받는다.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만 가진 채, 쓰쿠루는 고향 나고야를 가는 것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진다. 그 불편함은 외로움과 삶의 허무로 이어졌고 몇 년간 죽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도쿄에서 철도 회사에 입사하여 바라던 역 설계와 보수 일을 하게 된 쓰쿠루. 서른여섯이 되던 해에 운명 같은 연상의 여자 기모토 사라(木元沙羅)가 쓰쿠루 앞에 나타난다. 그는 그녀에게 나고야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했고, 그녀는 그에게 그 네 사람을 다시 만나볼 것을 제안한다. 쓰쿠루는 별로 내키지 않다.

"난 개인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흥미가 있어. 네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아직까지 그 등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133-134p>

아카마쓰 게이(赤松慶), 오우미 요시오(青海悦夫), 시라네 유즈키(白根柚木), 구로노 에리(黒埜恵里). 옛 친구들의 이름들을 떠올리며 그들과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쓰쿠루. 특이하게도 자신을 제외하면 네 사람의 이름들에 색깔을 뜻하는 한자어가 있다. 적, 청, 백, 흑. 그 특이점만큼이나 각자 개성들이 뚜렷하여 의견 차이로 서로 다툴만한 일들도 많았을 텐데, 환상의 조화를 이루며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다. 이후 이와 비슷한 친구들과 조화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 시절이 그립고 지금 이런 상황이 아쉽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쓰쿠루는 사라의 도움으로 15년 넘게 궁금했던 절교의 이유를 듣고자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사라의 말은 아마도 옳다. 쓰쿠루는 침대에 누워 그렇게 생각했다. 네 사람은 그의 등에 아직 달라붙어 있다. 아마도 사라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게. <135p>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에는 현실 같은 꿈이 항상 등장하는데, 이 꿈의 해석에 따라 내용에 대한 이해가 결정된다. 쓰쿠루는 유즈키, 에리와 함께 섹스를 하고 사정은 유즈키에게 하는 꿈을 자주 꾼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대학 후배 하이다 후미아키(灰田文紹)를 알게 되고, 묘한 친밀감으로 인해 쓰쿠루는 그를 나고야의 네 친구들과 비슷한 감정으로 대한다. 그의 이름에도 색이 있다. 그 색은 흑과 백이 섞여 만들어진 회색(灰). 하이다가 쓰쿠루의 집에 와서 자신의 아버지가 대학 시절 때 시골에 있는 산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던 날 밤에, 쓰쿠루는 유즈키, 에리와 함께 섹스를 하는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하이다가 그 섹스를 훔쳐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정을 유즈키가 아닌 하이다의 입속에 하게 된다. 현실 같은 꿈에서 깨었을 때 스쿠루는 침대에서 일어나 하이다를 찾았고, 그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하이다와 그의 이야기들을 소설의 맥거핀으로 여기는 해석도 있으나, 나는 그와 그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섬세하면서 냉정한 하이다는 유즈키와 에리를 섞어 놓은 듯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Franz Liszt의 Le mal du pays를 알고 있었다. 그 곡을 고등학생 시절 유즈키가 가끔 피아노로 연주했었다. 쓰쿠루가 하이다 입에 사정을 했던 꿈을 꾼 이후 쓰쿠루는 하이다와 더 교제하길 원했지만, 그는 쓰쿠루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정이 생겨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과 함께 절교 같은 이별을 전한다. 마치 에리가 일본에서 핀란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일본을 떠나 핀란드에 정착한 것처럼. 하이다는 도쿄를 떠나 쓰쿠루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딘가로 떠나갔다. 사람들이 머물렀다가 떠나간다는 사실이 쓰쿠루에게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다. 네 친구들이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한 그 괴로움을 쓰쿠루는 극복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쓰쿠루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애당초 텅 비었던 것이 다시 텅 빌 따름이 아닌가.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다 확인한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 버린다. 그다음에는 텅 빈, 또는 더욱더 텅 비어 버린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금 혼자 남는다. 그뿐이지 않는가? <289-290p>

쓰쿠루가 네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한 이유는 이렇다. 그가 유즈키를 강간했고 유즈키가 임신을 하게 되었기에 네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했다. 그러나 누구도 쓰쿠루가 유즈키를 강간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즈키가 울면서 쓰쿠루가 그랬다고 말했고, 쓰쿠루를 남몰래 좋아했던 에리는 이 상황에서 쓰쿠루보다 유즈키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리가 쓰쿠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이와 요시오는 은근히 심리적으로 쓰쿠루를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청소년기에 이성의 관심은 친밀과 외모의 정도에 상관없이 신경 쓰이는 일이다. 쓰쿠루가 없으면 그 관심이 나를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색깔 없는 쓰쿠루는 각자의 색깔처럼 개성 있는 네 사람들로부터 절교를 당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이후 쓰쿠루의 부재를 느끼며 관계는 와해된다. 그들은 쓰쿠루가 개성 넘치는 자신들의 관계를 지지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회상한다. 서로 다른 색을 모두 담아주는 "팔레트"같은 역할을 쓰쿠루가 맡았었다. 비록 그것이 몇 년간 일지라도.

고등학교 시절, 다섯 명은 빈틈 하나 없이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다. 구성원 모두가 거기에서 같은 행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런 최고의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낙원은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해 가고, 나아가는 방향도 다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할 수 없는 위화감이 생겨났을 것이다. 미묘한 균열도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미묘한이란 말로는 처리할 수 없는 뭔가가 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428p>

운동선수가 될 줄 알았던 요시오는 렉서스 자동차 딜러가 되었다. 빈약한 체구에 공부를 잘했던 게이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있다가 퇴사하고 대기업들을 상대로 사원연수를 대신해주는 사업을 한다. 에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우연한 계기로 도예를 접하게 되어 미대에 가게 된다. 거기서 현재의 남편인 에드바르트 하아타이넨을 만나 결혼을 했고 핀란드에서 남편과 함께 도예 일을 하고 있다. 유즈키는 강간과 유산으로 인하여 폐인처럼 살다가 하마마쓰로 이사를 갔고,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다가 서른이 되었을 때, 자택에서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했다. 고등학생 쓰쿠루는 자신의 옆에 있던 네 친구들이 앞으로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변하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도 알았겠지만, 네 친구들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그 사실이 사유에 들어올 틈은 없었을 것이다.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조화의 표본으로서 사랑은 이별로 거두어지고, 우정은 절교로 거두어진다. 그래서 삶의 어느 순간 또 새로운 사랑을 해야 하고 또 새로운 우정을 쌓아야 한다. 이전에 했던 일들을 반복하면서 인간의 삶은 어디론가 나아간다. 때때로 "결혼"과 "절친"이라는 말로 강하게 엮어지지만 그 강도의 유효기간은 분명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강하게 엮어진 것은 느슨해지고, 그 느슨함이 주는 불안감과 절망은 엮임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거나, 일어날 것 같은 일들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한다. 다시 강하게 엮어질 계기가 없다면, 그 사람들은 체념과 무관심을 서로에게 표현할 것이고 엮임의 끊음을 요구할 것이다. 인간은 이 반복이 가져다준 허무와 새로운 반복을 위한 수고,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 역시 수없이 되뇌게 된다.

인생은 복잡한 악보 같다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16분 음표와 32분 음표, 기묘한 수많은 기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올바르게 해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설령 올바르게 해독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올바른 음으로 바꿔 냈다 하더라도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리란 보장도 없다. 사람의 행위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엉켜야만 하는 것일까? <404p>

소설은 흥미진진한 초반과 중반을 지나서 정직한 후반으로 넘어간다. 예상되는 전개였지만 그 때문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잘 전달되었다.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색을 가졌다면 쉽게 친해지고 둘이 하나인 듯 살아갈 수도 있지만, 똑같거나 비슷하면 방향을 잃는다. 발전인지 정체인지 퇴보인지. 한통속으로 섞이면 잘 알 수가 없다. 한 색은 다른 색과 마주했을 때 뚜렷해진다. 그리고 서로 섞였을 때 새로운 색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색들이 조화를 이루며 섞어지기 위해서는 무색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은 조화를 구체화시키고 감각할 수 있게 만든다. 그것은 어떤 작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리의 말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나 두려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또는 무슨 잘못된 말을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냥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에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역을 만드는 일하고 마찬가지야. 그게,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약간의 잘못으로 전부 망쳐져 버리거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 설령 완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역은 완성되어야 해. 그렇지? 역이 없으면 전차는 거기 멈출 수 없으니까.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맞이할 수도 없으니까. 만일 뭔가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필요에 따라 나중에 고치면 되는 거야. 먼저 역을 만들어. 그 여자를 위한 특별한 역을. 볼일이 없어도 전차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싶어 할 만한 역을. 그런 역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거기에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주는 거야. 그리고 못으로 네 이름을 토대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너한테는 그런 힘이 있어. 생각해 봐.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쳐 건넜잖아." <382-383p>

나는 에리의 이 말이 어딘가 어색하고 약간은 불쾌하다. 쓰쿠루를 좋아하지만 유즈키를 지키기 위해 쓰쿠루를 버려야 했던 에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유즈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도망치듯 핀란드로 왔고 다시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에리가 거의 15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쓰쿠루를 만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 에리는 유즈키의 거짓말을 알았지만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었고, 그 거짓말 때문에 쓰쿠루는 15년 가까이 가슴통증을 느끼며 살았다.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 헤엄쳐 건넜다. 에리 역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지만 고치지 않았다. 쓰쿠루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 상처 받은 쓰쿠루는 그 상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때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이번 순례는 이렇게 끝이 난다.

가 버린 시간이 날카롭고 긴 꼬챙이가 되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소리 없는 은색 고통이 다가와 등골을 차갑고 딱딱한 얼음 기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아픔은 언제까지고 같은 강도로 거 머물렀다. 그는 숨을 멈추고 눈을 꼭 감은 채 가만히 아픔을 견뎌 냈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단정한 연주를 이어 갔다. 소곡집은 제1년 스위스에서 제2년 이탈리아로 옮겨 갔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363-364p>

살아있는 한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이론. 이 이론을 거부한 사람들은 죽음을 택했거나 죽음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심장을 꿰뚫는 상처를 가진 채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심장을 가지고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쳤고, 영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뭔가를 깨닫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살아있는 한 상처는 계속되고, 그때마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뭔가 깨닫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혹은 새벽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에, 마음에 드는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거나 이 말에 가까운 표현을 행동으로 할 것이다.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 <405p>

책을 읽다 보면 유즈키를 누가 죽였는지 궁금한데, 나는 그 범인이 하이다라 생각했다. 하이다는 쓰쿠루의 상처가 만들어 낸 복수의 화신으로서 상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유즈키를 죽였을 것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에리와의 대화에서 유즈키의 죽음을 자책하는 쓰쿠루의 말들을 읽으니 한결 이해가 잘 되었다. 여섯 번째 손가락은 감추고 싶은 개인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오직 혼자서 그 상처를 마주하고 안고 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나 역시 쓰쿠루처럼 미도리카와는 자신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 담긴 주머니를 피아노 연주 전에 꺼냈다고 생각했다. 상처는 한계이자 도전이다.

사라(沙羅)는 그 이름처럼 모래 같은 존재다. 이리저리 흩날리듯 여러 곳을 다니지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사라를 통해 쓰쿠루는 자신의 오래된 상처에 맞서고 회복에 이르지만, 모래처럼 붙잡을 수 없는 여자를 좋아하게 된 그는, 이미 한 번의 상처를 각오를 해야 한다. 사라는 그와 만나면서 50대로 보이는 남자도 만나고 있었다. 수요일이 되기 전에 이야기가 끝나서 사라가 쓰쿠루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조금 예감할 수 있다.

쓰쿠루는 또 차가운 밤바다를 혼자서 헤엄칠 것이고, 영혼의 밑바닥에 있다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 쓰쿠루(作)처럼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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